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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좀 만져주면 좋겠는데 (6/181)

#6. 좀 만져주면 좋겠는데20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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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42198671.jpg“어쩌지?”

시현의 귓가에, 유혹하듯 낮은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16551942198671.jpg“……이젠 내가 관심이 생겨버렸는데.”

시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1층에서 내리는 대신에 다시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옥상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16551942198681.jpg“잠깐 저 좀 보시죠.”

시현은 그대로 옥상으로 태하를 끌고 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태하는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시현은 말했다.

16551942198681.jpg“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16551942198671.jpg“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

16551942198681.jpg“말했잖아, 너랑 내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시현은 필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16551942198681.jpg“네가 지금 기억이 안 나서 이러는 건 알겠는데, 나중에 기억이 돌아와서 나한테 이랬던 거 떠올리면 아마 죽고 싶어질 거야.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해, 나중에 땅 치고 후회하지 말고.”

16551942198671.jpg“전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태하가 한숨을 지었다.

16551942198671.jpg“대체 우리가 무슨 사이라는 겁니까?”

시현은 잠시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16551942198681.jpg“……그때 넌 초등학교 2학년,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어.”

오래된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 시현은 생일이 빨라서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탓에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열여섯 살이었다. 학기 초라 돈 들어갈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제 고등학생이니 독서실도 다녀야 하고, 사야 할 책도, 문제집도 중학교 때보다 확 늘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시현은 작은아버지 댁에 얹혀살고 있는 신세였다.

16551942222946.jpg[넌 어쩜 그렇게 돈 달라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니?]

작은어머니는 시현에게 돈이 들어갈 일이 생길 때마다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었다. 독서실비를 받은 게 바로 어제인데, 오늘도 문제집값을 달라고 할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16551942198681.jpg‘뭐라고 말씀드리지…….’

고민하면서 길을 걷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와 눈앞을 휙 스쳐 갔다. 깜짝 놀라 쳐다보자 웬 어린 남자아이가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 있고, 로봇이 그려진 실내화 주머니가 아이의 등에 부딪쳐 땅에 구르고 있었다. 아이들 몇 명이 웅크린 아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16551942222956.jpg“멍청이래요, 멍청이래요. 한글도 못 쓰는 바보래요.”

16551942222956.jpg“야, 외국인! 너네 나라에 가서 살아!”

놀리는 아이들은 초등학교 2, 3학년쯤 되어 보였고, 당하는 아이는 그보다도 훨씬 작았다. 제 몸집만 한 책가방을 메고 있지 않았으면 유치원생으로 봤을 것 같다. 시현은 도끼눈을 뜨고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16551942198681.jpg“너희들 뭐 하는 짓이니? 혼날래?”

고등학생 누나가 눈을 부릅뜨고 다가가자 녀석들은 우와아아, 하면서 도망가 버렸다. 괴롭히는 아이들을 쫓아버리고 다가갈 때까지도 아이는 웅크린 그대로였다. 시현은 아이의 팔을 잡아 일으켜서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16551942198681.jpg“괜찮니?”

뒤늦게 얼굴을 올려다보고 시현은 흠칫했다. 새하얀 피부에 갈색의 눈동자. 아이는 혼혈이었다.

16551942198681.jpg“저녁 먹을 시간인데 얼른 집에 들어가. 엄마가 찾으시겠다.”

그제야 아이는 툭 하고 중얼거렸다.

16551942222976.jpg“엄마 없어요.”

시현은 당황했다.

16551942198681.jpg“그럼 아빠가 찾으시지 않겠어?”

16551942222976.jpg“아빠도 없는데요.”

이번에야말로 시현은 할 말을 잃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소리가 났다. 꼬르륵.

16551942198681.jpg“혹시 배고프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시현은 근처 마트에서 라면을 사서 아이를 따라갔다. 아이는 시현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택가의 허름한 반지하에 살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자 썩어 가는 밑반찬과 시어빠진 김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쌀독에 쌀은 조금 남아 있었지만 쌀벌레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현은 낡은 양은냄비에 급히 라면을 끓였다. 계란 하나 넣지 않은 라면을,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듯이 허겁지겁 먹었다. 라면을 먹는 아이를, 시현은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명주실처럼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머리칼과 커다란 갈색 눈동자. 마치 어릴 때 읽은 그림책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예쁜 아이였다. 먹는 사이사이에 말한 바에 따르면 아이의 이름은 윤태하. 올해 아홉 살로, 초등학교 2학년이라고 했다. 몸집이 작아서 겨우 일곱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사실 아까 그 아이들과는 같은 반이라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안 계셔서 태하는 할머니와 둘이 산다고 했다.

16551942198681.jpg“그럼 할머니는 어디 계셔?”

시현은 태하의 그릇에 라면을 더 덜어 주면서 물었다.

16551942222976.jpg“집에 잘 안 들어와요.”

16551942198681.jpg“마지막으로 나가신 게 언젠데?”

16551942222976.jpg“세 밤 됐어요.”

16551942198681.jpg“언제 돌아오신다는 말은 없으셨고?”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2198681.jpg“그럼 그동안 밥은? 어떻게 먹었어?”

16551942222976.jpg“학교에서 급식 먹었어요.”

16551942198681.jpg“그럼 아침이랑 저녁은?”

이번에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어린아이가 하루에 달랑 한 끼 먹고 버텼다는 뜻이다. 심지어 주말에는 그조차도 못 먹었을 텐데……. 아이가 또래보다 훨씬 작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 같아서, 시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1942198681.jpg“라면 먹고 있어. 누나 잠깐 나갔다 올게.”

순간적으로 아이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시현은 말했다.

16551942198681.jpg“금방 올 거야.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오래 굶었으면 분명 먹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어린아이가 벌써부터 철이 든 건지, 눈치를 보는 건지 솔직하게 말도 못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16551942198681.jpg“얼른 갔다 올게.”

시현은 뛰다시피 태하의 집을 나와서 아까 라면을 샀던 마트로 향했다. 다행히 주머니에 어제 독서실비로 받은 돈이 있었다. 작은 포장에 든 쌀을 사고, 계란이니 햄이니 소시지니 아이가 좋아할 만한 반찬거리도 이것저것 샀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시현은 제법 요리에 능숙한 편이었다.

16551942222946.jpg[미리미리 신부수업을 시켜 둬야 나중에 시집을 잘 보내지.]

작은어머니는 시현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무렵부터 툭하면 주방으로 내몰아서 가정부와 함께 부엌일을 시켰다. 정작 자기 딸인 아현은 결혼을 안 시킬 셈인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못하게 했지만. 과자까지 몇 개 사고 나자 독서실비는 깨끗이 사라졌다. 돈을 잃어버렸다고 작은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니 걱정이 됐지만, 굶는 아이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시현은 양손에 묵직한 봉투를 들고 도로 태하의 집으로 향했다.

16551942198681.jpg“라면 다 먹었니?”

돌아온 시현을 보고 태하는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했다. 만난 지 한 시간밖에 안 된 사람에게 이렇게 의지할 정도면,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던 걸까. 문득 어릴 적의 자신이 떠올라서 시현은 눈물이 핑 돌았다. 시현의 부모님이 사고로 함께 돌아가신 것은 시현이 딱 태하만 한 나이 때의 일이었다. 그때의 충격과 슬픔을 시현은 여태 잊을 수가 없었다. 하늘 아래 혼자가 된 기분이랄까. 그래도 자신은 최소한 굶지는 않았다. 작은어머니는 비록 시현을 가정부 부리듯 했지만, 밥을 먹지 못하게 한 적은 없으니까.

16551942198681.jpg“들어가서 TV 보고 있어. 누나 주방에서 일 좀 하고 있을게.”

하지만 태하는 계속 시현의 곁을 서성거렸다. 시현이 ‘칼이 어디 있지?’ 하고 혼잣말이라도 할라치면 얼른 알아듣고 꺼내주었다. 한집에 사는 사촌 여동생인 아현은 시현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조금도 시현을 따르지 않았다. 심지어 툭하면 제 엄마에게 시현의 실수를 일러바치지 못해서 안달을 했다.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가 귀엽고도 애틋해서 가슴이 쿡쿡 찌르듯 아팠다. 시현은 지저분한 주방을 싹 청소하고 밥솥 가득 밥도 해 놓고, 반찬도 만들었다. 신 김치를 맛있게 볶고, 계란말이를 만들고, 소시지와 햄도 구워 놓았다.

16551942198681.jpg“배고프면 밥이랑 반찬이랑 꺼내 먹어. 누나가 내일 저녁에 또 올게.”

이미 해가 진 지 한참이었다. 한밤중에 어린아이를 혼자 두고 가자니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밤새 같이 있어 줄 수도 없었다. 아직 시현도 고등학교 1학년, 집에 늦게 들어가면 야단을 맞는 소녀에 불과했다. 가지 말라고 떼를 쓸 법도 한데 태하는 어른스러웠다. 얼굴에는 시현이 가는 게 싫다고 뻔히 쓰여 있으면서 입으로는 순순히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16551942222976.jpg“안녕히 가세요, 누나.”

태하가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발걸음이 더 안 떨어졌다. 시현은 생각 끝에 제 가방에 달려 있던 작은 곰돌이 인형을 떼어서 내밀었다.

16551942198681.jpg“이거 가지고 있어.”

태하는 인형을 받아들고 이게 뭐예요, 하고 묻듯 맑은 갈색 눈으로 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6551942198681.jpg“우리 엄마 아빠도 돌아가셨거든. 이건 엄마가 옛날에 내 생일날 주셨던 거야.”

시현은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을 맞췄다.

16551942198681.jpg“나한텐 엄청 소중한 거야. 그러니까 잘 가지고 있다가 내일 꼭 돌려줘야 해.”

다시 올 거라는 확신을 주고 싶었다. 태하도 알아들었는지, 그제야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시현이 준 인형을 꼭 안고,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아이는 문가에 선 채로 작은 손을 흔들었다.

16551942222976.jpg“내일 또 와요, 누나.”

태하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시현은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

16551942198681.jpg“너 그때 가나다라도 쓸 줄 몰랐어. 그때부터 내가 너 한글 가르치고, 밥 해 먹이고, 이 닦이고 머리 감겨 가면서 키운 아이가 바로 너라고.”

어느덧 훌쩍 커 버린 아이는, 내내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시현은 호소하듯 말했다.

16551942198681.jpg“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돼.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된다고!”

16551942198671.jpg“뭐, 그 말이 사실이라 치고.”

태하가 시현의 표정을 살피듯 지그시 바라보았다.

16551942198671.jpg“지금은 서로 어엿한 성인 아닙니까. 밤새 나한테 안겨서 잤는데도 아무렇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16551942198681.jpg“내가 너랑 안고 잔 게 하루 이틀인 줄 알아?”

미치겠네. 시현은 한쪽 발을 쾅 굴렀다.

16551942198681.jpg“천둥 번개 치는 날마다 내가 너 안고 잤어. 학교에서 1등 할 때마다 내가 뽀뽀해줬다고. 너 배 아프면 내가 문질러주면서 키웠다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발달 장애 기미까지 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많이 안아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룻밤 옆에서 잔 게 뭐가 어쨌다고 이 난린가, 도대체. 그제야 태하는 확인하듯 물었다.

16551942198671.jpg“그러니까, 강시현 씨한테 있어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애다, 이겁니까?”

16551942198681.jpg“그래!”

이제 좀 알아듣나 싶어서 시현은 한숨을 쉬었다.

16551942198681.jpg“알았으면 이제 헛소리 작작 해. 한 번만 더 이러면 진짜 화낼 거니까.”

딱 잘라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손목을 붙잡혔다.

16551942198671.jpg“사실은 아까부터 배가 좀 아파서.”

그가 와이셔츠 자락을 걷어 복근이 탄탄히 잡힌 배를 드러내 보였다.

16551942198671.jpg“좀 만져주면 좋겠는데.”

흠칫 놀라는 시현의 손을 드러난 복부에 갖다 대면서, 그는 뚫어져라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16551942198671.jpg“왜, 나는 남자도 아닌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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