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많이 변한 몸, 그대로인 눈2021.10.22.
그가 와이셔츠를 걷고 복근이 탄탄히 잡힌 배를 드러내 보였다.
“좀 만져주면 좋겠는데.”
흠칫 놀라는 시현의 손을 드러난 복부에 갖다 대면서, 그는 뚫어져라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왜, 나는 남자도 아닌 거 아닙니까?”
시현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여태 어떤 심정으로 옛날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다 듣고도 또……! 화를 내고 뿌리쳐버릴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뺨이라도 한 대 후려쳐버릴까. 순식간에 별별 생각이 교차하는데, 문득 빤히 쳐다보고 있는 태하의 눈과 마주쳤다. 귀여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낮아졌지만. 이제는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커져 버렸지만. 딱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어릴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이 키운 태하라는 것을 실감하는 동시에, 시현은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나도, 여태 너를 다른 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네가 아프다는데, 어떻게 내가 너한테 화를 내고 때릴 생각까지 했을까.
“그래, 그러자.”
그녀는 태하가 하는 대로 순순히 내버려두었다. 그가 살며시 제 복부에 시현의 손을 갖다 대었다. 말랑한 배 대신에 딱딱한 복근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흠칫 놀라 손을 움츠릴 뻔했지만 꾹 참았다. 몇 살이 되었든, 몸이 어떻게 변했든, 이 사람이 태하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시현은 애정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태하의 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생소함은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에 애틋함이 가슴을 채웠다.
“아침에 찬 거 마셨나 보다. 너 어릴 때부터 찬 거 먹으면 배앓이 했거든.”
차분하게 말하는 시현을, 태하는 오히려 당황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모르겠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 네가 보는 지금의 나는 어떤지. 그냥 좀 쉽고, 만만해 보이는 사람인지.”
“…….”
“그럴 수도 있겠지. 보다시피 내가 잘난 데라고는 하나도 없거든. 그렇게 예쁜 얼굴도 아니고, 집안이 볼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보다 대단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도 많이 먹었고.”
“…….”
“근데 있잖아. 그런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한 가지가 바로 너야. 너 본부장으로 온 날은 무척 당황도 했지만, 그날 밤엔 기쁘고 설레서 잠도 못 잤어. 어쩜 그렇게 멋지게 컸을까. 어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됐을까. 생각 같아선 회사 정문에 현수막 붙이고 싶더라. 우리 태하 본부장 됐다고.”
“…….”
“그동안 이런저런 생각 많이 했어. 네가 왜 나를 잊어버렸을까. 혹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라서 그랬던 건 아닐까. 그래서 억지로라도 기억나게 만들고 싶어서 자꾸 따라다니고, 귀찮게 굴었던 거야. 내가 너한테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일까 봐, 그게 견딜 수가 없어서.”
“…….”
“근데 이제 그만할래.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도 상관없어.”
그의 눈을 바라보며, 시현은 힘주어 말했다.
“나를 기억하든 못 하든, 넌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거든.”
태하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바라보는 눈빛에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안타까운 듯도, 화가 난 듯도, 어딘가 슬픈 것같이도 보였다. 문득 그가 손을 뿌리치는 바람에, 시현은 놀라서 불렀다.
“태하야?”
그러나 태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 *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태하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관자놀이에 손을 얹어 두 눈을 감싼 남자의 입에서, 괴로움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어쩌라는 거야, 대체……!”
* 태하가 가버리고, 시현은 혼자 터덜터덜 사무실로 내려왔다. 그러나 좀처럼 아까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마지막으로 본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태하는 왜 그런 표정을 했을까.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눈빛으로…….
“왜 그래, 시현 씨? 어디 안 좋아?”
“그냥. 봄인데 여태 날이 쌀쌀해서 그런가, 기분이 좀 처지네.”
시현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자 미주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기운 내야지, 비싼 목걸이 사주는 약혼자도 있는데.”
엉뚱한 말에 시현은 의아한 눈으로 미주를 쳐다보았다.
“목걸이? 그게 무슨 소리야?”
미주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내가 배가 아파서 이걸 말해줄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얘기가 나온 김에 그냥 말해준다.”
대체 뭘까. 시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다가앉자 미주가 큰 비밀이라도 말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나 지난 주말에 백화점 구경 갔다가 시현 씨 남친 봤잖아.”
미주는 우진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우진이 회사 앞에 데리러 왔을 때 미주와도 몇 번 마주쳐서 인사한 적이 있었으니까.
“혼자 왔길래 혹시 시현 씨 선물 사러 왔나, 궁금해서 슬쩍 따라가 봤단 말이야. 그랬더니 클로버 매장 들어가서 목걸이 사더라고!”
클로버는 명품 주얼리 브랜드의 이름이었다. 특히 시그니처인 세잎클로버 모양의 목걸이는 그 흔한 명품 백 하나 없는 시현도 익히 알 정도로 유명한 디자인이었다. 시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거 되게 비싸지 않아?”
“글쎄, 뭐 사는지 정확히는 못 봤지만 작은 사이즈도 대강 200만 원 가까이는 되지. 300 넘는 것들도 많고.”
미주가 부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여튼 그래서 딱 감이 왔지. 아, 화이트데이 선물이구나!”
하지만 시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귄 지 6년이나 됐지만 우진은 화이트데이 따위는 챙긴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사탕 몇 알 쥐여주면 다행이고, 보통은 그냥 지나가곤 했다. 시현도 딱히 기념일 같은 데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비싼 목걸이를 샀다면…….
“어떡해, 미주 씨.”
시현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나 프러포즈 받나 봐!”
시현은 거친 손이 콤플렉스여서 평소 반지를 끼지 않았다. 손이 남의 눈에 띄는 게 싫어서였다. 그러니까 프러포즈 반지 대신에 목걸이를 준비한 게 아닐까.
“어머. 괜히 내가 입방정 떤 거 아냐? 남친은 서프라이즈 하고 싶었을 텐데.”
미주가 뒤늦게 헉, 하고 입을 가렸다.
“아냐,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미리 마음의 준비는 하는 게 좋지.”
그렇지 않아도 양가에 인사를 하는 단계까지 왔는데 여태 프러포즈를 할 기미가 없어서 살짝 서운하던 참이었다. 이대로 프러포즈도 못 받은 채 결혼하는 건가, 싶어서. 그런데 오빠도 다 생각이 있었던 거구나.
“하여튼 부럽다, 시현 씨.”
기쁜 나머지 눈시울까지 뜨거워지는 시현을, 미주가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도 기 좀 나눠주라!”
* 역시나 우진은 그날 밤에 연락을 해왔다.
- 시현아, 내일 점심에 시간 있어?
올 것이 왔구나. 시현은 두근거리는 것을 감추느라 애를 썼다.
[왜 점심이야? 저녁도 아니고.]
- 알잖아, 나 요즘 매일 야근인 거. 괜찮으면 점심때 잠깐 얼굴 보고 식사나 같이하자. 내가 너희 회사 근처로 갈게.
다음 날 아침에 시현은 무척 신경을 써서 단장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드라이도 하고, 화장에도 공을 들였다. 결혼식에 참석할 때나 입는 화사한 색깔의 봄 원피스를 차려입고, 구두도 늘 신는 검정 단화 대신에 굽이 있는 것으로 골랐다. 귀걸이까지도 제일 아끼는 것으로 꺼내 달면서도 목걸이만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목걸이는 우진이 직접 걸어줄 테니까.
“아우, 강시현. 아직 안 죽었어.”
거울 속의 자신을 살짝 곁눈질로 흘겨보며 시현은 괜히 눈웃음을 쳤다.
“화이트데이 날 프러포즈도 받고, 응?”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오늘따라 무척 괜찮아 보였다. 서른 넘어서면서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던 눈가의 주름마저도 오늘은 다 어디로 갔는지 눈에 띄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자 모처럼 미세먼지 한 점 없이 화창한 봄 날씨에 더욱더 기분이 들떴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복도에서부터 활기찬 인사와 함께 상큼한 미소를 흩뿌리는 시현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강 대리 아침부터 왜 저렇게 업돼 있어?”
“곧 결혼한다잖아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시현은 모델이라도 된 듯 도도한 워킹으로 제 자리에 착석하였다.
“오, 시현 씨. 오늘 완전 힘줬는데?”
“신경 좀 썼지. 프러포즈 받는 날인데.”
감탄하는 미주에게 윙크를 날리고, 시현은 컴퓨터를 켰다. 활기차게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뭔가가 허전하다. 잠시 생각한 후에야 빼먹은 게 떠올랐다. 맞다, 모닝커피! 시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를 내리는데, 등 뒤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태하가 서 있었다. 순간 흠칫했지만 시현은 금세 발랄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얼마 전 일로 시현은 이미 마음 정리를 했다. 그래, 태하가 나를 몰라본다고 너무 다그치지 말자. 같이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기억도 돌아오겠지. 설사 영영 안 돌아온대도 상관없다. 태하는 태하니까. 시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왠지 태하는 눈이 커다래졌다.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시현은 조금 민망해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닙니다.”
그제야 태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커피머신을 빤히 쳐다보길래, 내가 가로막고 있어서 그러나 싶어 시현은 얼른 머신 앞에서 비켜주었다. 왠지 커피를 뽑을 생각은 안 하고, 태하는 제자리에 서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왜 그러세요?”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그때 마침 여사원들 한 무리가 휴게실로 쪼르르 들어오다 태하를 보고 반색을 했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젊은 본부장은 미래은행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태하를 본 여사원들은 금세 오빠 만난 팬들 모드로 들어갔다.
“오늘도 멋지시네요, 본부장님!”
“어머, 넥타이 너무 예쁜 거 매셨다.”
“모닝커피도 직접 갖다 드시나 봐요. 그런 건 비서님한테 시키셔도 될 텐데.”
여럿이서 둘러싸고 한마디씩 하는 말에 태하는 금세 혼이 쑥 달아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럼 수고들 해요.”
등을 돌려 휴게실을 나가려 하는 태하에게, 보라가 물었다.
“근데 본부장님, 그게 뭐예요?”
그제야 시현은 태하가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하는 얼른 쇼핑백을 뒤로 감췄다. 그러나 이미 매의 눈을 가진 여사원들에게 다 들켜버리고 난 후였다.
“어, 그거 캔디젤리숍 거 아니에요? 거기 수제사탕 되게 맛있는데.”
“어머, 저희 화이트데이 챙겨 주시는 거예요?”
보라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태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에이, 원앱팀 여자들 주려고 가져오셨겠지.”
“뭐 어때, IT 총괄이시니까 우리도 먹을 자격 있지. 그렇죠, 본부장님?”
결국 태하는 여사원들에게 쇼핑백을 강탈당해버렸다. 한숨을 쉬며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에 혹시 나 주려고 가져온 건가, 하고 생각했다가 시현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나. 태하는 나를 기억도 못 하는데.
“본부장님 잘 먹겠습니다!”
너도나도 달려들어 한 주먹씩 챙기는 바람에, 순식간에 사탕은 다 사라져 버렸다. 시현은 손도 뻗어보지 못했다.
“와, 선배님들 너무하신다. 우리 강 대리님 것도 안 남기시면 어떡해요?”
보라가 뒤늦게 항의하고는 얼른 제 사탕의 포장을 뜯었다.
“강 대리님, 아 하세요.”
아, 하고 입을 벌리자 보라가 시현의 입에 사탕을 쏙 넣어주었다.
“나 챙겨주는 거 보라 씨밖에 없다니깐?”
달콤한 사탕을 입속에서 굴리며, 시현은 휴게실을 나왔다. 이따가 프러포즈 받을 생각에 한껏 들뜬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