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목걸이는 다른 여자에게 갔다2021.10.26.
점심때 회사 근처의 공원에서 만난 우진은 시현을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나왔어?”
모른 척하기는. 시현은 대답 대신에 살며시 눈을 흘겼다. 시현은 딱히 가리는 음식도 없었고, 먹는 것 자체에도 크게 집착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메뉴는 주로 우진이 골랐고, 대부분은 그가 좋아하는 국밥이나 덮밥 종류였다. 하지만 오늘은 역시나 달랐다.
“오랜만에 너 좋아하는 해물 파스타 먹으러 갈까?”
하기야 프러포즈하는데 설렁탕이나 해장국은 좀 그렇겠지. 시현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팔짱을 끼고 걸어서 예쁜 카페 겸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참, 시현아. 우리 부모님 뵐 준비는 하고 있지?”
“아침에 미용실 예약해놨어. 선물은 홍삼 세트 할까 하는데 어때?”
“그거 좋겠네. 우리 아버지 요즘 부쩍 건강에 신경 쓰시거든. 거기다가 케이크나 하나 사 오면 어떨까? 어머니 생신인데 케이크에 촛불은 끄셔야지.”
마치 그날이 시현의 생일이기도 하다는 건 잊어버린 것 같은 말투에 조금 서운해졌지만, 시현은 웃어넘겼다. 그야 오늘은 프러포즈 받는 날이니까.
“알았어. 미리 호텔에 예약해서 좋은 걸로 사 갈게.”
잠시 후 주문한 시푸드 파스타가 나왔다. 좋아하는 음식인데도 시현은 맛이라곤 거의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머릿속은 이 남자가 언제쯤 프러포즈를 하려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우진은 좀처럼 본론을 꺼낼 기미가 없었다.
“요즘 주식 떨어져서 여기저기 곡소리 나고 아주 난리야. 네 덕분에 난 처음부터 손도 안 대서 얼마나 다행인지. 너희 회사 사람들은 어때?”
“우리도 마찬가지지 뭐.”
음식을 거의 다 먹어갈 때까지도 딴소리뿐이어서, 시현은 생각다 못해 포크로 살짝 홍합을 벌려 보기까지 했다. 혹시 목걸이가 이 안에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 홍합 안에 목걸이는 들어 있지 않았고, 우진은 식사가 끝난 후에야 겨우 가방에서 작은 쇼핑백을 꺼내 내밀었다.
“자, 받아.”
“이게 뭐야?”
시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감추며 애써 모른 척을 했다.
“화이트데이잖아, 오늘.”
“웬일이야, 오빠가 그런 걸 다 챙기고?”
시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쇼핑백에 든 상자를 열었다. 네모반듯한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목걸이가 아닌 핸드크림이었다.
“이게 뭐야?”
“요즘 날이 건조해서 그런가, 너 손이 평소보다 더 거칠어 보여서 샀어. 엄청 비싼 거니까 꼬박꼬박 챙겨 발라.”
무슨 놈의 핸드크림이 오만 원씩이나 하는지, 하고 우진이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일단 실망하게 만들고, 진짜 선물은 마지막에 줘서 놀라게 하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시현은 상자를 도로 닫았다.
“잘 쓸게.”
이제나 하려나, 저제나 하려나. 그러나 우진은 끝내 프러포즈의 프 자도 꺼내지 않았다. 계산까지 마치고 나서 시계를 보더니 아차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어, 나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시현아. 그럼 이따 저녁때 통화하자.”
결국 시현은 우진을 불러 세웠다.
“저기, 오빠.”
서둘러 자기 회사 쪽으로 가려던 우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왜?”
“혹시 뭐 잊어버린 거 없어?”
“어? 잊어버린 거라니?”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시현은 자존심이 상하는 걸 무릅쓰고 얘기를 꺼냈다.
“왜 우리 팀에 나랑 친한 미주 씨 있잖아. 미주 씨가 그러는데, 주말에 오빠가 백화점에서 뭘 사는 걸 봤다고 하길래. 혹시 내 건가 했지, 난.”
“어?”
우진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금세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거? 우리 부장님 심부름 간 거였는데. 결혼 20주년이라고, 사모님한테 선물하신다고 해서.”
순간 시현은 얼굴에 불이 확 붙는 것 같았다. 아, 내가 김칫국 마시고 있었던 거구나. 대체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시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애써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세상에, 부장님이 오빠한테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시키셔?”
“알잖아. 우리 부장님, 아들 대학교 숙제도 나한테 대신시키는 양반인 거. 그날도 그 목걸인지 뭔지 사느라 얼마나 오래 줄을 섰는지.”
우진은 진저리를 치며 험담을 늘어놓았다.
“엄지손톱만 한 목걸이가 이삼백만 원씩 하는데 그걸 줄 서서 사고 있더라. 하여튼 요즘 여자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시현이 넌 그런 여자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내가 줄 서면서 몇 번이나 생각을 했는지 몰라.”
차마 나도 그런 목걸이 하나쯤 가져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프러포즈를 받는 줄만 알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쓰고 나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참 속도 없이 날씨도 좋다.”
터덜터덜 걸어서 회사로 돌아오며 시현은 생각에 잠겼다. 작은아버지 댁에서 결혼 독촉이 나오기 시작한 건 벌써 수년 전부터의 일이었다. 독촉도 독촉이었지만, 시현도 우진과 빨리 결혼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작은아버지 댁에 더부살이하듯 살아온 시현은 평생 ‘내 집’, ‘내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빨리 사랑하는 사람과 내 가정을 꾸려서 행복해지고 싶었다.
[오빠, 우리 언제쯤 집에 인사드려?]
그러다 보니 서른 즈음부터는 본의 아니게 재촉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아직 우리 둘 다 젊은데 뭐 그리 급하다고.]
그럴 때마다 우진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몇 년 전에 결혼을 했을 것이다.
[혹시 오빠는 결혼 생각 없는 거야? 그런 거면 솔직히 말해줘.]
진지하게 물어도 우진은 늘 웃어넘겼다.
[에이,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 왜 그래.]
올해 들어서 겨우 본격적으로 얘기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우진에게서는 ‘난 급할 것 없다’는 듯한 태도가 가끔 느껴졌다. 마치 시현이 졸라서 마지못해 결혼하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우진은 아직 시현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프러포즈가 뭐가 중요해? 어차피 결혼할 거, 그냥 형식적인 건데.’
시현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원래 결혼하기 전에는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이라지 않은가. 나도 그런 거다. 그래도 자꾸만 심란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 식으로 결혼하는 걸까. 어릴 때는, 멋진 남자가 내게 꽃다발을 내밀면서 열렬히 청혼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꺼내 신은 굽 높은 구두가 새삼 불편하게 느껴져서 시현은 느릿하게 거리를 걸었다. 길가의 벚나무에는 조금씩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는데, 봄은 아직도 먼 것만 같았다. 터덜터덜 회사로 돌아오는데, 저만치서 보라가 부르며 달려왔다.
“강 대리님! 어디 갔다 오세요?”
보라가 애교 있게 팔짱을 꼈다. 평소 같으면 무척 반가웠겠지만, 오늘따라 지쳐서 시현은 짧게 대꾸했다.
“점심 약속이 있어서.”
“아, 화이트데이라 남자친구 만나고 오셨구나?”
눈치 빠른 보라는 금세 배시시 웃더니 시현이 들고 있는 쇼핑백을 힐끗 쳐다보았다.
“뭐 좋은 선물 받으셨어요? 저도 보고 싶어요.”
시현은 부끄러워서 얼른 쇼핑백을 뒤로 감췄다.
“별 거 아냐.”
“왜요, 보여주세요.”
한바탕 실랑이를 하다 결국은 쇼핑백을 빼앗기고 말았다. 상자 안에서 나온 핸드크림을 보고, 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이 핸드크림 되게 좋은 건데. 엄청 신경 써서 고르셨나 봐요.”
“그래?”
“그럼요. 저도 백화점 가서 맨날 살까 말까 고민하다 너무 비싸서 못 사고 내려놓는걸요?”
사실 보라는 부잣집 딸이었다. 중앙일간지인 ‘조한신문’ 사주(社主)가 바로 보라의 아버지였다. 그런 보라가 이까짓 핸드크림 하나를 못 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시현은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자기 나름대로는 좋은 거 산다고 신경 쓴 거겠지.
“점심시간 끝나겠다. 얼른 들어가 봐, 보라 씨.”
쇼핑백을 돌려주고, 보라는 생글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오후에도 파이팅하세요, 대리님!”
* 밖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오던 태하는, 복도에서 시현을 마주쳤다.
“본부장님.”
자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어서 태하는 놀랐다. 아까 아침에 봤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생글거리며 활기차게 인사해 오는 얼굴이 말도 못 하게 예뻤다. 원래도 예쁜 여자가 화장까지 제대로 해 놓으니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쳐다보다 깨달았다.
‘아, 오늘이 화이트데이였지.’
데이트라도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난번에 시현이 아무렇지 않게 배를 문질러준 일로, 태하는 확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몸으로 유혹하려 들어봐야 시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짓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사실 애초에 성격에 맞는 짓도 아니었으니까. 대신에 앞으로는 좀 더 진지하게 다가가 볼까, 하고 사탕을 준비했던 건데.
[어머, 저희 화이트데이 챙겨 주시는 거예요?]
결국은 건네주지도 못하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빼앗겨버렸다. 어쨌든 분명 아침에는 그렇게 반짝반짝거리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졌을까. 태하는 용기를 내어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강시현 씨. 혹시 무슨 일이라도…….”
하지만 시현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사무실을 향해 가버렸다. 일부러 무시했다기보다, 딴생각에 빠져서 아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걸음걸이마저도 시무룩해 보이는 시현의 뒷모습을 보며 태하는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제 사무실에 돌아와 앉아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태하는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마침 아침에 휴게실에서 보았던 여사원 중 하나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태하는 상대를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비서가 여신인가 뭔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여신(與信)팀 소속이겠지. 정작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났다. 무슨 색깔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상대가 입은 연두색 블라우스 위를 슬쩍 살폈지만 사원증조차 걸고 있지 않았다. 결국 태하는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으로 불렀다.
“이연두 씨.”
“네?”
당황한 얼굴을 보면 이연두가 아니라 이분홍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건 상대의 이름 따위가 아니었다. 태하는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물었다.
“혹시 원앱팀 강시현 대리님, 점심시간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강 대리님 나가서 남자친구랑 점심 드시고 오셨는데요.”
“고맙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태하는 돌아섰다. 약혼녀가 그토록 취했는데도 데리러 오지도 않는 걸 보고 대체 뭐 하는 놈인가, 싶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점점 그 생각이 확실해지는 기분이었다. 혹시 그녀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닐까. 대체 그 남자친구란 놈이 점심때 무슨 짓을 했길래 시현이 저런 표정을 하는 걸까. 화가 치미는 한편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직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게 아닐까? *
“하!”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태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보라는 헛웃음을 쳤다.
“진짜로 기억 못 한단 말이야?”
전에 마주쳐서 인사했을 때는 어둑한 복도였으니까 못 알아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까 아침에는, 주위에 사람이 여럿 있었으니까 알은체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까 정말로 기억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뭐, 이연두 씨?
“……네가 나를 기억 못 하면 안 되지, 윤태하.”
비뚤어진 미소를 짓는 보라의 목에서, 세잎클로버 모양의 목걸이가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