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누가 울렸어 (9/181)

#9. 누가 울렸어.202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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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은 시현의 생일이자 우진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로 한 날이었다. 시현은 이른 새벽부터 단장하느라 바빴다. 미용실에 들러 머리 손질을 하고, 메이크업은 최대한 옅게 했다. 우아한 느낌의 진주 귀걸이를 달고, 옷과 구두도 단정한 디자인으로 골랐다.

16551942769743.jpg“시현 씨 남자친구 부모님한테 인사 간다더니 그게 오늘이었어?”

아침에 출근한 시현을 보고, 미주가 놀라 물었다.

16551942769747.jpg“응. 이따 퇴근하고 바로 가봐야 해.”

미주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16551942769743.jpg“퇴근할 때까지 자료 준비 다 할 수 있겠어?”

16551942769747.jpg“무슨 자료?”

16551942769743.jpg“기억 안 나? 우리 내일 아침에 본부장님한테 지금까지 작업한 거 첫 평가 받기로 했잖아!”

시현은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프러포즈 소동이니 우진의 부모님께 인사니, 요 며칠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깜빡 잊고 있었다. 시현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작업량을 가늠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퇴근 때까지 끝내는 건 무리다.

16551942769747.jpg“어쩔 수 없지 뭐. 가서 저녁 먹고 도로 회사 들어와서 야근하는 수밖에.”

16551942769743.jpg“오늘 시현 씨 생일인데 괜찮겠어?”

16551942769747.jpg“지금 생일이 문제가 아니잖아. 내일 본부장님이 뭐라고 지적하시면 대답은 해야 할 거 아냐.”

점심도 사무실에서 샌드위치로 때우면서 하루 종일 일했는데도 역시나 일은 퇴근 때까지 다 끝나지 않았다. 야근할 각오를 하고, 시현은 일단 회사를 나왔다. 미리 준비한 홍삼 세트 외에도, 호텔에 들러서 주문해 둔 케이크를 찾아서 택시를 타고 우진의 집으로 향했다. 우진의 집은 서울과 경기 남부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쯤에 있는 아파트 단지였다.

1655194276982.jpg“어, 왔어?”

집 앞으로 마중을 나온 우진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편한 차림이었다. 트레이닝복 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나온 걸 보고 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16551942769747.jpg“옷이 그게 뭐야? 난 이렇게 차려입고 왔는데.”

1655194276982.jpg“에이, 나야 우리 집인데 뭐 어때. 너희 집에 인사드릴 때나 차려입으면 되지.”

우진이 웃으며 시현의 손에서 선물상자를 받아들었다.

1655194276982.jpg“얼른 들어가자. 부모님 기다리셔.”

시현은 심호흡을 하고 우진의 뒤를 따랐다.

1655194276982.jpg“엄마! 시현이 왔어요!”

우진은 크게 외치며 문을 열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초로의 부부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16551942769747.jpg“처음 뵙겠습니다. 강시현이라고 합니다.”

시현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16551942785124.jpg“오, 그래. 어서 와요.”

뒤이어 어디선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바람에 시현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런 시현을 보고, 우진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1655194276982.jpg“오늘이 우리 엄마 생일이잖아. 형수님들이 생신상 차리고 있어.”

손에 땀이 다 촉촉하게 배어 나왔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다고 했지, 큰형에 작은형, 형수들에 조카들까지 다 와 있다는 말까지는 못 들었는데! 다복한 가족들이 대단히 자랑스러운 듯, 우진은 하나하나에게 시현을 소개했다.

1655194276982.jpg“이쪽은 우리 큰형.”

16551942769747.jpg“안녕하세요, 강시현입니다.”

1655194276982.jpg“그리고 이쪽은 우리 작은형. 나랑 많이 닮았지?”

16551942769747.jpg“처음 뵙겠습니다, 강시현입니다.”

이쪽은 큰형수, 이쪽은 작은형수, 이쪽은 큰형네 큰조카, 얘는 큰형네 둘째, 얘는 작은형네 쌍둥이……. 어른부터 아이에게 이르기까지 몇 번이나 자기소개를 한 끝에야 시현은 겨우 인사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진의 부모님을 따라 안방으로 들어가며 시현은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참았다. 본론을 시작하기도 전에 녹초가 되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방 안에 들어가서도 벌어졌다. 스커트를 입은 채 소파가 아닌 방석 위에 앉으려니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마주 앉은 우진의 부모님은 너무나 편안한 자세였다. 시현의 옆에 앉아 있는 우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혼자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자니 괜히 죄라도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금세 다리가 저려오는 것을 꾹 참고 자리에 앉아 있자 아까 작은형수라고 했던 여자가 수정과를 내 왔다.

16551942785124.jpg“그래, 우리 우진이랑은 꽤 오래 만났죠?”

우진의 어머니 정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곱게 화장을 하고 진주목걸이까지 걸고 있는 걸 빼면 동네에서 으레 마주칠 법한 흔한 인상의 퉁퉁한 아주머니였다. 딱히 사나운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애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16551942769747.jpg“네. 올해로 6년째입니다.”

16551942785124.jpg“사실 우리 우진이, 그동안 선도 여기저기 많이 들어왔거든요. 놓치기 아까운 아가씨들도 여럿 있어서, 몰래 슬쩍 한 번만 만나 보라고 해도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여자친구가 이렇게 예쁜 아가씨였네.”

분명히 칭찬이라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표정 관리가 잘 안 돼서 시현은 얼른 수정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1655194276982.jpg“엄마도 참, 별소릴 다 하셔.”

우진은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16551942801248.jpg“그래, 듣자니까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 댁에서 자랐다던데?”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가 물었다.

16551942769747.jpg“네. 그래도 어릴 때부터 키워주신 분들이라 친부모님이나 다름없이 생각합니다.”

시현은 태연한 낯으로 거짓말을 했다. 작은아버지 부부는 단 한 번도 친부모처럼 군 적이 없었고, 물론 시현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16551942801248.jpg“그래도 어디 친부모님하고 같은가.”

잠시 말의 의도가 파악이 안 됐다. 혹시 내가 작은아버지 댁에서 구박을 받고 컸을 것 같아서 안됐다고 말씀하시려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데 정임이 곁에서 끼어들었다.

16551942785124.jpg“아유, 당신도 참. 걱정 말아요, 내가 데리고 잘 가르치면 되지 뭐.”

뭐가 걱정이고 뭘 가르친다는 것일까. 불안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진작 비어 버린 수정과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우진이 귓가에 속삭였다.

1655194276982.jpg“시현아.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나가서 형수님들 좀 도와.”

시현은 당황했다. 아직 자신은 이 집안 사람이 아니다. 오늘 처음 인사 왔으니 어디까지나 손님인데 갑자기 주방 일을 도우라니.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자 우진이 또다시 귓속말로 재촉했다.

1655194276982.jpg“형수님들 주방에서 계속 일하고 계신데 계속 앉아만 있을 거야? 아랫사람이 먼저 예쁜 짓을 해야 윗사람들도 예뻐하는 거지.”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으면서도 맞는 말 같지 않았다. 하지만 슬슬 다리가 아프다 못해 쥐가 날 것 같아서 시현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주방 일이 나을 것 같았다.

16551942769747.jpg“그럼 저는 잠시 나가서 일 돕겠습니다.”

우진의 부모님 둘 중 누구도 됐다고 말리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전쟁을 벌이고 있고, 주방에서는 상차림이 한창이었다.

16551942769747.jpg“제가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어색하게 다가가서 말을 걸자 앞치마를 두른 두 여자가 동시에 손을 저었다.

16551942815191.jpg“아유, 손님으로 온 건데 돕긴 뭘 도와요?”

16551942815191.jpg“괜찮으니까 가서 앉아 있어요.”

다행히 윗동서가 될 사람들은 친절해 보여서 시현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다.

16551942769747.jpg“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기가 뭐해서요. 뭐든지 편하게 시켜주세요.”

16551942815191.jpg“그럼 상 차리는 동안 겉절이나 좀 무쳐줄래요?”

보니까 커다란 양푼에 조각조각 잘린 배추가 가득 담겨 있고 고춧가루와 액젓, 마늘 등의 양념이 위에 끼얹어져 있었다.

16551942815191.jpg“양념 다 해놨으니까 그냥 무치기만 하면 돼요. 너무 힘줘서 주무르면 안 되고, 손끝으로 조물조물. 알겠죠?”

시현은 두 윗동서가 상을 차리고 있는 동안 알아서 서랍을 열어 비닐장갑을 찾아서 꼈다. 겉절이를 무치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16551942785124.jpg“세상에, 누가 겉절이를 비닐장갑을 끼고 무쳐?”

우진의 어머니, 정임이었다. 손가락으로 시현을 가리키며 정임은 두 며느리를 다그쳤다.

16551942785124.jpg“너희가 그러라고 했니?”

두 며느리는 한꺼번에 펄쩍 뛰었다.

16551942815191.jpg“어머, 아니에요, 어머님!”

16551942815191.jpg“죄송해요, 어머님. 저희가 못 본 사이에 멋대로 꺼냈나 봐요.”

그제야 시현은 깨달았다. 겉절이나 무쳐달라고 했던 게, 쉬운 일을 시킨 게 아니라 본인들이 하기 싫은 일을 떠맡긴 거라는 것을. 비닐장갑을 낀 채 얼어붙어 있는 시현을, 정임은 혀를 차며 쳐다보았다.

16551942785124.jpg“음식이라는 건 손맛인 거예요. 친정에서 여태 그런 것도 못 배웠나? ……하기야 친엄마도 아닌데 뭘 제대로 가르쳤을라구, 쯧쯧.”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시현은 비닐장갑을 벗었다. 시뻘건 양념을 맨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하는 시현을 보고, 그제야 정임은 흡족한 얼굴을 했다.

16551942785124.jpg“모르는 건 흉이 아니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 배우면 돼요.”

분명히 눈을 뜨고 있는데 눈앞이 캄캄해졌다. *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시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16551942769747.jpg“…….”

양손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끈거리며 아파 왔다. 아픈 손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바보 같은 자신이었다. 왜 나는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을까. 왜 나는 이런 일 못 하겠다고 똑바로 말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손님으로 가서 겉절이 따위를 무치고, 못 배웠다는 소리를 듣고, 그러고도 끝까지 앉아서 즐거운 척 밥을 먹고, 내 생일에 남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심지어 설거지까지 돕고 나서 나왔을까.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우진은 시현의 비참한 기분 따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까 배웅한답시고 따라 나와서 싱글거리며 하는 말이 이랬다.

1655194276982.jpg[그것 봐. 우리 엄마 아빠 좋은 분들이라고 내가 그랬지?]

기가 막혀서 시현은 대꾸도 못 한 채 그냥 택시를 타버렸다. 아까 설거지를 하면서 비누로 몇 번씩이나 닦았지만 손은 점점 더 빨갛게 부어올랐다. 택시비를 지불하느라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다 너무 아파서 하마터면 비명이 나올 뻔했다. 몸도 마음도 지쳤다. 집에 가서 누워 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당장 내일 아침 회의를 준비해야 했다. 회사 앞에 도착하자 이미 밤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지금부터 야근을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길이길이 기억될, 최악의 생일이다. 회사 안은 거의 불이 꺼져 있었다. 지친 몸을 끌고 사무실로 향하다, 복도 저만치서 이쪽을 향해 오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태하였다. 얼굴을 보는 순간 와락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여기저기 치이고 휩쓸리다 드디어 내 편을 만난 기분이었다.

16551942769747.jpg“태하야.”

그러나 돌아온 것은 더없이 무뚝뚝한 인사였다.

16551942837099.jpg“늦게까지 수고가 많습니다.”

그대로 가던 길을 가버리는 태하의 뒷모습을 보며, 시현은 자신이 완벽히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할 사람조차도 내 편이 아니고, 내가 키운 아이도 나를 못 알아보는데. 사무실로 들어오자 책상 위에 생일케이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미주가 갖다 놓았나, 하고 생각하며 시현은 하나하나 초를 꽂았다. 큰 초가 세 개, 작은 초가 세 개. 도합 여섯 개의 초에 불을 붙이자 어둑한 사무실이 금세 부드러운 불빛으로 가득해졌다. 시현은 가만히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16551942769747.jpg“세상에 내 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흘러넘쳤다. 말로는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 떠올린 것은 태하였다. 정작 결혼할 사람은 우진인데, 이상하게 그랬다. 세상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고 단 한 사람만 내 편으로 남는다면, 그건 우진이 아니라 태하일 것 같았다. 정작 그 태하가 자신을 몰라본다는 게 죽도록 슬펐다.

16551942769747.jpg“거짓말쟁이.”

덧없이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시현은 울먹였다.

16551942769747.jpg“어른이 되면, 생일날 내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네 입으로 말해놓고……!”

시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돌려세웠기 때문에. 놀라서 올려다보자 조금 화가 난 듯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16551942837099.jpg“누가 울렸어.”

눈물로 범벅이 된 시현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 태하는 다시 물었다.

16551942837099.jpg“묻잖아, 누가 울렸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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