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두 남자2021.11.05.
“결혼하지 마.”
아픈 손을 피해서 손목을 꼭 잡고, 그는 가까이서 시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 말 들어. 하지 마, 그 결혼.”
시현은 놀라서 한참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결혼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이까짓 일로 엎게.”
오늘 일로 분명 화도 나고 상처도 받았다. 앞으로 이런 시댁과 어떻게 지내야 하나,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엎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남자, 사랑해?”
시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랑하니까 결혼하지, 그럼.”
6년을 만났다. 비록 이제는 처음 사귀었을 무렵의 설렘 따위는 거의 사라져버렸지만, 오래 만나면서 쌓아 온 의리도, 편안함도 다 사랑의 한 형태인 거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태하는 가차 없이 되물었다.
“생일날 손을 그 모양으로 만드는 남자가, 좋다고?”
“어머니가 그러셨던 거야. 오빠는 방에 있어서 몰랐어.”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우진은 시현이 고춧가루를 맨손으로 만지는 장면은 못 봤지만, 그 후에 손이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분명히 보았다.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하는 더욱더 화난 얼굴을 했다.
“시어머니 될 사람이 결혼 전부터 부려먹는데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야?”
“원래 시댁은 다 그런 거야. 딸 같은 며느리가 어디 있어? 나 말고 윗동서 되실 분들도 다 똑같이 하던데 뭘.”
하지만 태하는 내뱉듯이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더 일 커지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둬.”
왈칵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면서부터 부쩍 태하 생각이 자주 났다. 내 결혼식에 태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흥신소 써서 찾을 생각을 다 했을까. 태하라면 누구보다 축하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찾아 놓고도 겨우 한다는 말이 결혼하지 말라니.
“너 그게 할 말이니? 축하는 못 해줄망정!”
“그럼 나더러 당신이 쓰레기 같은 자식이랑 결혼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윤태하!”
시현은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네 매형 될 사람이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태하의 목소리도 따라서 커졌다. 답답한 듯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그는 날카롭게 다그쳤다.
“그 자식은 당신을 지켜주지 못해. 당하고도 모르겠어?”
“글쎄 오빠는 몰랐다니까?”
“손이 그 지경이 됐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제 입장을 이해해 주지 않는 태하가, 시현은 원망스러웠다. 자기는 젊고 멋지고 가진 것도 많으니까 원하면 언제든, 누구하고든 결혼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는 걸 왜 모를까.
“나 벌써 서른세 살이야. 6년이나 만나 놓고 이제 와서 결혼 엎으면 어떡하라고? 그러다 자칫 평생 결혼 못 하면…….”
태하가 말을 가로챘다.
“내가 책임지면 되잖아.”
흠칫 놀라는 시현을 향해,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 결혼 하지 마.”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눈빛에 숨이 막혔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자 태하가 바짝 다가섰다.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다가오는 태하를 피해 뒷걸음치다 결국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시현의 앞을 가로막은 채, 태하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하자 태하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 좀 봐.”
마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아닌 남자의 눈빛. 순간 시현은 격렬한 거부감을 느꼈다. 네가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안 되잖아. 세상 모든 남자가 그래도, 너는 안 되는 거잖아. 기억이 돌아왔다며. 왜 여전히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늦었다, 이만 가봐야겠어.”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방금 한 말은 안 들은 걸로 칠게.”
*
“후…….”
시현이 사무실에서 나가 버리고, 혼자 남은 태하는 벽에 기대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남자 사랑해?]
그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방금 자신이 그 질문을 하는 데 얼마만 한 용기가 필요했는지. 그러니까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겠지.
[사랑하니까 결혼하지, 그럼.]
잔인한 여자였다. 늘 그랬듯이.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늘로 태하는 확실하게 알았다. 강시현의 남자가 그녀를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심지어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생일날 저렇게 혼자서 울게 만들고……! 새빨갛게 부어 있던 시현의 손을 떠올리자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애타게 원해온 것을 갖고도, 조금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인간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나라면 당신을 울리느니, 차라리 내가 죽고 말 텐데! 한참 우두커니 서 있다가, 태하는 사무실을 나왔다. 떠날 때는 이미 결심이 선 후였다. 설령 강시현이 그 남자를 사랑한다 해도, 이제는 내가 보내지 않겠다. *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시현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어제 너무 이런저런 일이 많이 일어나서 그런지, 출근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지쳤다. 사실 가장 큰 사건은 당연히 우진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마음에 걸리는 것은 태하였다. 태하의 기억이 돌아오면 하고 싶었던 얘기가 끝도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의 아버지는 잘 지내시는지, 그동안 대체 왜 연락이 안 됐던 건지. 그런데 정작,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바탕 싸우고 말았다.
“…….”
시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지었다. 그래, 누나 남자친구를 대하는 남동생 같은 기분인 건 알겠다. 하지만 결혼을 엎으라는 둥, 심지어 만나 본 적도 없는 우진을 쓰레기 취급한 건 태하가 선을 넘은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눈빛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 결혼 하지 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걸까.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태하가, 자꾸만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대체 6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숨을 쉬며 사무실에 도착하자 미주가 물었다.
“시현 씨, 어제 야근 잘했어? 회의 준비는 다 됐고?”
“뭐, 대충.”
정작 태하와 한바탕 다투는 바람에 일은 꺼내보지도 못했다. 집에 돌아가서 이것저것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도저히 집중이 안 돼서 결국은 접어버렸다.
“참. 케이크 고마워, 미주 씨.”
“응? 무슨 케이크?”
미주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이 되묻는 바람에 시현은 당황했다. 당연히 미주가 챙겨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미주가 아니라면, 그럼…….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실에 팀원 모두가 모이고 태하가 들어왔다.
“그동안의 진행 상황을 체크해봤습니다.”
팀원들은 마치 교수 평가를 앞둔 대학생들 같은 표정으로 일제히 본부장을 쳐다보았다.
“기능이 어떻고 디자인이 어떻고를 말하기 전에, 방향성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교수는 가차 없이 F를 때렸다.
“뭔가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하는 작업은 단순히 기존 앱들의 기능을 통합하는 게 아닙니다. 버릴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서 단순화시키고, 그 위에 새로운 서비스를 더하는 거죠.”
개발 중인 프로토타입을 시연해 보이며 본부장은 하나하나 지적했다.
“예를 들면 상담 기능. 도대체 왜 이게 상세메뉴마다 각각 다 들어가 있는 겁니까? 왜 소상공인을 위한 대출이 첫 화면부터 보여야 하죠? 보험 쪽에 건강관리 기능을 넣는다고 그걸 몇 명이나 쓰겠습니까?”
본부장은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애초에 UX 디자인에서부터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UX 기획자 중심으로, 이번 주 내로 최대한 삭제 계획을 세워서 제출하세요.”
시현은 얼굴이 확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팀 내 유일한 UX 디자이너인 시현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지적당한 시현을 감싸듯, 팀장이 나섰다.
“저어, 본부장님. 아무래도 일주일 가지고는 힘들 것 같습니다.”
팀장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능 삭제는 저희 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각 사업부와 관련된 문제여서, 하나하나 협의를 거쳐야…….”
“협의는 내가 합니다.”
팀장의 말을 딱 자르고, 태하는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냥 이 기능이 사용자 입장에서 정말로 필요한가, 아닌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어떤 기능이든 가차 없이 쳐내서 가져오세요.”
너무 무모한 주문을 한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물론 태하가 뛰어난 기획자이자 개발자이기는 하겠지만, 은행 업무에 대해서 뭘 알까. 시현은 어떻게든 그 부분을 제대로 설명하려 했다.
“본부장님. 미래은행은 인터넷 은행 같은 핀테크 업체와는 다릅니다. 훨씬 서비스의 범위가 넓고, 정부와 맺고 있는 국책 사업들도 많아서, 그렇게까지 버릴 수는…….”
“버리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태하는 시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 번쯤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시죠. 버려야 하는데도 못 버리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시현은 깨달았다. 이건 UX 디자이너 강시현이 아니라, 인간 강시현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시현을 한참 바라보다, 태하는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일주일 후에 다시 회의 소집하겠습니다.”
* 아침 회의 때 시현에게 한바탕 쏘아붙여 놓고, 태하는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보는 앞에서, 그렇게까지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새빨개져서 민망해하던 시현의 얼굴을 떠올리자 뒤늦게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이러다 앞으로 내 얼굴도 안 보려고 하면 어쩌지.’
더 좋아하는 쪽이 약자라는 말의 뜻을, 태하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견디다 못해 태하는 그날 저녁, 퇴근하는 시현의 뒤를 따라 나갔다.
“잠깐만.”
회사 앞에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시현을 불러 세우자, 시현이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존댓말이다. 역시나 단단히 마음이 상했구나. 태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기, 아침엔 내가…….”
내가 너무했어. 머뭇머뭇 사과하려는데, 태하의 말을 가로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시현아!”
태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서 양복을 입은 회사원처럼 보이는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진 오빠?”
남자를 본 시현이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그럼 저놈이……! 태하의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제 끝난 거야?”
다가온 남자가 다정하게 시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다, 그제야 태하와 눈이 마주치고는 움찔했다.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