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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옆집에 이사 온 남자 (12/181)

#12. 옆집에 이사 온 남자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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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벼락 같은 회의 후, 팀원들은 하루 종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대체 뭘 버려야 하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도대체 버릴 기능이라고는 없었다. 애초에 7개나 되는 애플리케이션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빼는 걸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뼈를 깎는 심정으로 버리고 또 버린 것이 지금의 결과인데 여기서 더 버리라니 대체 어쩌라는 건지. 팀원들끼리 퇴근시간까지 회의에 회의를 거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서, 시현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16551943196609.jpg“오늘은 이쯤 해요. 제가 더 고민해볼게요.”

사실 팀에서 UX 기획자는 시현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개발과 UI 디자인 등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 즉 본부장이 주문한 삭제 작업 자체가 원래 시현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16551943196616.jpg“잠깐만.”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돌아보자 태하가 서 있었다.

16551943196609.jpg“무슨 일이시죠?”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어젯밤 일도 그렇고, 아침 회의 때 들은 소리도 그렇고, 지금은 태하에게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16551943196616.jpg“저기, 아침엔 내가…….”

태하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데, 누군가가 시현을 불렀다.

16551943196633.jpg“시현아!”

다가오는 우진을 보고, 시현은 깜짝 놀랐다.

16551943196633.jpg“이제 끝난 거야?”

싱긋 웃으며 시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던 우진이, 뒤늦게 태하를 보고 움찔했다.

16551943196633.jpg“누구야?”

수상쩍게 바라보는 눈빛에, 시현은 얼른 말했다.

16551943196609.jpg“인사해, 오빠. 내가 늘 말하던 태하 있지? 걔가 얘야. 태하 너도 인사해. 이쪽은 김우진, 나랑 결혼할 사람이야.”

그러나 두 남자는 왠지 인사는커녕, 한참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진도 175센티미터로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태하는 군대 갈 때 받았던 신체검사 결과가 이미 187센티미터였다. 지금은 그보다도 더 커 보였다. 자연히 태하가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그게 별로 유쾌하지 않은 듯, 우진도 턱을 한껏 치켜들고 태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16551943196616.jpg“…….”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돈 끝에, 우진이 내뱉듯이 물었다.

16551943196633.jpg“언제 찾은 거야?”

왜 나한테 얘기 안 했느냐, 하는 듯한 말투여서 시현은 얼른 설명했다.

16551943196609.jpg“며칠 안 됐어. 태하가 우리 회사에 들어왔더라고. 나도 깜짝 놀랐지 뭐야.”

16551943196633.jpg“아, 그래?”

그제야 우진의 표정에 여유가 생겼다. 우월감이 어린 얼굴로, 그는 태하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쳤다.

16551943196633.jpg“고졸이라고 들었는데 좋은 회사 들어갔네? 뭐, 사회생활이 생각처럼 쉽지 않겠지만 한번 잘 버텨 봐. 나처럼 과장쯤 되면 좀 나아질 테니까.”

시현이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우진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16551943196633.jpg“어유, 시현이가 맨날 애라고 해서 진짜 어린앤 줄 알았는데 엄청 크네. 농구 해도 되겠어. 언제 취업 축하주라도 한잔할까?”

태하는 굳은 표정으로 우진이 하는 양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때마침 회사에서 나오던 사원들 한 무리가 태하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16551943211531.jpg“본부장님, 이제 퇴근하십니까.”

16551943211531.jpg“안녕히 가세요, 본부장님!”

태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3196616.jpg“수고들 많았습니다.”

그제야 우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16551943196633.jpg“본부장?”

그런 우진을 힐끗 쳐다보고, 태하는 말없이 등을 돌려 가버렸다. *

16551943196633.jpg“본부장이라고? 스물여섯 살짜리가?”

도저히 믿기 힘든 듯, 우진은 몇 번이나 물었다.

16551943196609.jpg“태하 고등학교 때부터 앱 개발했었거든. 오빤 모르겠지만 우리 업계에선 유명한 개발자야. 자기 회사도 따로 있어.”

16551943196633.jpg“그런 놈이 왜 너희 회사에 왔는데?”

명백히 적대감이 어린 말투에 시현은 머리가 아파 왔다. 태하도 우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더니, 우진도 마찬가지일 줄이야. 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들 으르렁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16551943196609.jpg“우리 원앱 개발 프로젝트가 지지부진해서, 윗선에서 구원투수로 모셔온 거야. 1년 계약이래.”

설명했는데도 왠지 우진은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시현은 얼른 말을 돌렸다.

16551943196609.jpg“근데 오빠가 웬일로 우리 회사까지 왔어? 요즘 바쁘다면서.”

16551943196633.jpg“너 어제 우리 집에 인사 오느라 고생했잖아. 맛있는 거 사주려고 왔지.”

어제 일로 여태 앙금이 남아있었던 시현은, 그 말에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긴 자기도 부모님 앞에서 대놓고 편들어 주기는 힘들었겠지. 괜히 나 미운털 박힐까 봐.

16551943196609.jpg“나 고생한 거 알긴 아나 보네?”

16551943196633.jpg“에이, 내가 왜 몰라. 다 알지.”

우진이 다정하게 어깨를 껴안아 와서, 시현은 픽 웃어버렸다. 오래 만난 사이의 좋은 점이란 이런 게 아닐까. 서로 잘 아는 만큼, 서운한 마음이 있어도 오래 가지 않는 것.

16551943196633.jpg“뭐 먹고 싶은 거 있어?”

16551943196609.jpg“나 오랜만에 시푸드 파스타 먹고 싶어.”

16551943196633.jpg“좋아. 그럼 우리 지난번 거기 갈까?”

해가 점점 길어져서 퇴근 후인데도 아직 바깥은 환했다. 벚꽃이 조금씩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거리를, 모처럼 둘이서 손을 잡고 걸었다. 따스한 저녁 햇볕을 즐기며 분위기 좋은 카페 겸 식당에 마주 앉았을 때까지만 해도 시현은 기분이 좋았다. 태하의 일마저도 잠시 잊어버릴 만큼.

16551943196633.jpg“있잖아, 시현아.”

우진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낸 것은, 음식이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16551943196633.jpg“우리 결혼 비용 말이야. 혹시 네가 한 3천만 원만 더 준비할 수 없을까?”

16551943196609.jpg“3천만 원이나?”

시현이 지금까지 회사 다니면서 모은 돈은 약 1억 5천. 우진도 딱 그 정도였다. 둘이 합친 돈 3억에 전세대출 보태서 신혼집을 마련하기로 이미 다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16551943196609.jpg“웬일로 예쁜 짓을 한다 했더니, 이 얘기 하려고 그랬던 거였어?”

우진을 향해 살짝 눈을 흘기면서도 시현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가을쯤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치고, 그때까지 버는 돈은 결혼식과 신혼여행 비용으로 쓰기로 했는데. 갑자기 3천만 원이 더 필요하다니, 이리저리 계산해 봐도 답이 잘 안 나왔다.

16551943196609.jpg“근데 갑자기 왜? 요즘 전셋값 너무 올라서 그래?”

16551943196633.jpg“그게 아니고, 아무래도 우리 집에 예단은 해야 할 것 같아서.”

16551943196609.jpg“예단?”

시현은 얼굴을 굳혔다.

16551943196609.jpg“무슨 소리야. 집값 반반 하는 대신 예단 같은 거 일절 생략하기로 했잖아?”

16551943196633.jpg“아니,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형수님들은 결혼할 때 다 예단 해오셨는데 너만 빈손으로 시집오면 네 입장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 그러지.”

16551943196609.jpg“우린 경우가 다르잖아. 형들 결혼할 때는 부모님이 집값 보태주셨다며?”

16551943196633.jpg“대신 나는 형들보다 직장이 좋잖아. 형들은 둘 다 중소기업 다니니까 부모님이 도와주신 거지.”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시현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16551943196633.jpg“생각을 해봐. 우리 부모님이 아무리 좋은 분들이라도 그렇지, 아들 장가보내면서 양복 한 벌, 가방 하나 못 받으시면 며느리가 예쁘게 보이겠어?”

우진은 설득하듯 말했다.

16551943196633.jpg“어제도 너 실수한 거, 부모님이 말씀을 안 하셔서 그렇지 마음에 두고 계시더라고.”

16551943196609.jpg“실수?”

시현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미용실에까지 가서 단장하고, 양손에 선물 들고 찾아가서, 부모님부터 어린 조카들에게까지 일일이 다 인사하고, 겉절이까지 맨손으로 무쳐 가면서 상 차리는 것을 도왔는데 실수라니.

16551943196609.jpg“내가 뭘 잘못했는데?”

목소리가 절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16551943196633.jpg“너 어제 밥 먹기 전에 부모님 앞에 숟가락 안 놔드렸잖아. 그것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좀 걱정하시더라고, 친척집에서 자라 그런지 가정교육이 잘 안 된 거 같다고.”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타이르는 것 같은 태도로, 우진은 말했다.

16551943196633.jpg“처음이라 긴장해서 그랬나 보다고, 내가 잘 얘기하겠다고 말씀은 드렸어. 그래도 영 마음에 걸리시는 눈치여서 내가 예단 문제부터 다시 생각해본 거야. 이왕이면 너도 예쁨받는 며느리가 되는 게 좋잖아. 안 그래?”

시현은 말문이 턱 막혀서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예의를 차리느라 그의 부모님은 물론 작은 형수까지도 식사를 시작하는 걸 확인한 후에야 겨우 수저를 들었는데, 이제는 그 수저를 내 손으로 직접 놓아드리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고?

16551943196609.jpg“오빠 못 봤어? 나 그때 쟁반 들고 계속 주방에서 이것저것 가져오느라 정신도 없었어. 수저 놓아 드릴 겨를조차 없었다고.”

하다못해 물컵까지 챙기느라 맨 마지막에야 와서 겨우 앉았는데 무슨 수저 타령일까.

16551943196633.jpg“아니, 그래도 수저는 당연히 아랫사람이 놓아드리는 게 기본 예의지. 네가 안 하니까 작은형수님이 하셨는데, 부모님 입장에서 얼마나 보기가 민망하셨겠어?”

시현은 새삼스레 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정말로 내가 6년을 만난, 그 사람이 맞나. 수저가 대체 뭐 그리 대단한 물건이라고, 아니 대단한 거라도 쳐도 가정교육까지 운운할 일인가. 뒤에서 트집을 잡은 예비 시부모보다도 우진에게 더 화가 났다. 혹 부모님이 지적하셨더라도 자기가 내 편 들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최소한 나한테 말을 전하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심지어 그 말을 듣고 예정에도 없던 예단 운운까지 하다니.

16551943196609.jpg“…….”

목 안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고, 시현은 말없이 두 손을 내보였다. 어제 태하가 연고를 꼼꼼히 발라 준 덕분에 이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직도 눈에 띄게 빨개져 있었다. 우진은 뭔가, 하는 표정으로 시현의 손을 들여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16551943196633.jpg“또 손이 이 모양이네. 내가 사준 핸드크림 안 발라?”

그러더니 핀잔까지 주었다.

16551943196633.jpg“아가씨 손이 이게 뭐야, 아줌마처럼. 나야 상관없지만 이제 결혼식 하려면 네일도 하고 그래야 할 텐데 신경 써서 관리를 좀 해야지.”

시현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16551943196609.jpg“나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볼게.”

시현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1943196633.jpg“왜 그래?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우진이 놀라서 따라 일어났지만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식당을 나와버렸다. 그새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해가 지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얇은 트렌치코트 사이로 찬바람이 사정없이 새어 들어왔다.

16551943196616.jpg[한 번쯤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시죠.]

왜 이 순간, 아침 회의 때 들었던 태하의 말이 떠오르는 걸까.

16551943196616.jpg[버려야 하는데도 못 버리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버린다…… 우진을? 여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에게 깜짝 놀라, 시현은 황급히 옷깃을 여미고 걸음을 재촉했다. * 시현은 몸도 마음도 지쳐서 집에 돌아왔다.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오늘이 쓰레기 내놓는 날이었다. 지난주에도 바빠서 놓치는 바람에 벌써 쓰레기가 한가득인데 일주일을 또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시현은 무거운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나와서 낑낑거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뒤에서 손이 뻗어 오더니 대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었다. 커다란 남자의 손이었다.

16551943196609.jpg“고맙습니다.”

인사하는데 상대는 시현의 쓰레기봉투까지 빼앗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16551943196609.jpg“어,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는데…….”

놀라서 사양하다 뒤늦게 상대의 얼굴을 보고, 시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16551943196609.jpg“태하야?”

놀라서 쳐다보는 가운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태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쓰레기를 지정된 장소에 갖다 놓고 도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16551943196609.jpg“뭐야? 너 우리 집 어떻게 알았어?”

그러나 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시현이 사는 층에 멈추자 그대로 성큼성큼 내리는 것이었다.

16551943196609.jpg“글쎄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느냐니까…….”

옆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여는 태하를 보고, 시현은 숨을 멈췄다. 그제야 태하는 시현을 쳐다보고 말했다.

16551943196616.jpg“우리 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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