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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똑바로 봐.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13/181)

#13. 똑바로 봐.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20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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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은 한참 동안 멍해져 있었다. 원래 옆집에는 시현처럼 혼자 살면서 직장에 다니는 젊은 여자가 살고 있었다. 마침 며칠 전에 이사를 나가길래 몇 마디 인사를 나눠서 알고는 있었다. 옆집이 비어 있다는걸. 그런데 거기 이사를 온 게 태하라니. 시현은 정신을 차렸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와 간단한 안줏거리를 사 와서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16551943349407.jpg“잠깐 들어가도 돼?”

태하는 대답 대신에 문을 열어 주었다. 현관에 들어서며 시현은 좁은 원룸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방과 같은 구조였다. 이사를 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짐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이상할 정도로 주방기구들만은 잘 갖춰져 있었다.

16551943349407.jpg“언제 이사 왔어?”

소파에 앉자 태하가 맥주 캔을 따서 건네주며 대답했다.

16551943349416.jpg“오늘 낮에.”

16551943349407.jpg“너 오늘 계속 회사에 있었잖아?”

16551943349416.jpg“짐이야 이삿짐 회사에서 옮겼지.”

16551943349407.jpg“왜 하필 내 옆집인데?”

태하가 되물었다.

16551943349416.jpg“설마 내가 옆집이 당신 집인 걸 알고 일부러 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 시현은 얼른 말을 돌렸다.

16551943349407.jpg“내 말은, 왜 굳이 월세 70만 원짜리 원룸이냐고. 너 돈도 많잖아?”

시현은 새삼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태하를 바라보았다. 만일 나에게 3천억의 재산이 있다면 절대 열 평짜리 원룸에 살지는 않을 것이다.

16551943349416.jpg“회사랑 1년 계약이잖아. 집이 너무 멀어서, 1년만 적당히 지낼 곳이 필요했어.”

하긴 회사에서 제일 가까운 원룸 중 하나이기는 했다. 그래도 우연치고는 너무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다 시현은 그쯤에서 납득하기로 했다. 우연이 아니면, 그럼 뭐겠어. 생각해 보니 태하가 옆집에 사는 게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이래저래 좋을 것 같았다. 가끔 이렇게 맥주 한잔 같이할 수도 있고, 치킨 시켰다가 남아서 버릴 걱정 안 해도 되고, 아까처럼 쓰레기 버릴 때도 도와줄 테고. 무엇보다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여자 혼자 살자니 이래저래 불안했는데, 태하가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시현은 태하와 조금 떨어져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16551943349407.jpg“기억은 언제 돌아온 거야?”

16551943349416.jpg“얼마 전에.”

태하는 정확히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생일날 밤에는 이미 기억이 돌아와 있었으니까, 아마도 그 전에 옛날 얘기를 듣고 나서 서서히 기억난 게 아닐까, 하고 시현은 생각했다.

16551943349407.jpg“어쨌든 다행이다, 기억이 돌아와서.”

16551943349416.jpg“왜?”

16551943349407.jpg“너 나 못 알아보고 막 들이댔잖아. 어찌나 식겁을 했는지.”

16551943349416.jpg“그렇게 싫었어?”

16551943349407.jpg“그럼 좋겠니?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 내가 너한테 그랬으면 넌 기분이 어땠겠어?”

16551943349416.jpg“나 같으면…….”

뭐라고 말하려다 말고, 태하는 맥주를 들어서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16551943349407.jpg“하루아침에 연락 끊겨서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뭐, 군대에서 머리라도 다쳤던 거야?”

태하는 애매하게 음, 하고 중얼거렸다.

16551943349407.jpg“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날 잊어버려?”

새삼스레 흘겨보자 태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16551943349416.jpg“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기억이 돌아와 놓고도,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거라는 건 또 무슨 말일까. 역시 나는 태하에게 있어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 같은 거였을까. 민망함을 감추느라 얼른 맥주를 마시는 시현에게, 태하가 불쑥 말했다.

16551943349416.jpg“오늘 아침엔 내가 너무 심했어.”

시현은 픽 웃었다.

16551943349407.jpg“됐어. 내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네가 그런 소리까지 했겠어.”

사실은 아까 저녁 무렵까지만 해도 화가 났는데, 우진에게 수저니 예단이니 하는 소리를 듣고 나니 이제는 이해가 갔다. 태하가 버리라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 같아도 태하가 결혼할 여자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면 그 결혼 엎으라고 할 것 같다.

16551943349407.jpg“그래도 우진 오빠, 좋은 사람이야.”

시현은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16551943349407.jpg“시댁 어른들도 나쁜 분들은 아닌 것 같았어. 그냥 어차피 한 식구 될 거니까 편하게 생각하신 모양이야.”

그러나 태하는 금세 화난 얼굴을 했다.

16551943349416.jpg“내 아버지 같았으면 절대 당신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걸.”

시현은 할 말이 없어졌다.

16551943349407.jpg“왜 갑자기 여기서 치트 키를 꺼내고 그래?”

그러고 보니 태하의 아버지를 깜빡하고 있었다. 레온 케네디. 태하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찾은, 그의 친아버지였다. 진작 아버지한테 나에 대해서 물어보라고 할걸, 하고 생각하며 시현은 물었다.

16551943349407.jpg“그동안 레온 아저씨가 내 얘기 안 하셨어?”

16551943349416.jpg“안 했는데.”

태하가 딱 잘라 대답하는 바람에 시현은 약간 서운해졌다. 아저씨, 나를 그렇게 예뻐하셨는데.

16551943349407.jpg“잘 지내시고?”

16551943349416.jpg“뱀파이어라도 되는지, 늙지도 않아.”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하는 바람에 시현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16551943349407.jpg“여전히 멋지다는 거네?”

미국인인 레온은 아들을 찾고 나서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한국을 방문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태하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니까, 벌써 7년 전이다. 그럼 올해 아저씨가 마흔다섯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태하가 불쑥 물었다.

16551943349416.jpg“설마 여태 우리 아버지 좋아하는 거야?”

하마터면 시현은 입에 머금은 맥주를 뿜을 뻔했다.

16551943349407.jpg“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다!”

16551943349416.jpg“얼굴 빨개진 거나 어떻게 하고 말해.”

태하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레온을 처음 만난 것은 시현이 스물네 살 때였다. 당시 아직 30대 중반이었던 레온을 처음 본 순간 시현은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세상에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또 있을까?

16551943349416.jpg“당신이 나 몰래 따로 아버지랑 자주 만났던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그게 그런 게 아닌데……. 레온과 약속한 게 있어서 차마 사실대로 말도 못 하고, 시현은 또다시 맥주 캔을 들었다. 어느덧 캔이 비어 있어서 새 캔을 집어 드는데, 태하가 빼앗아갔다.

16551943349416.jpg“손, 아직 아프잖아.”

아까 빨개진 손을 보고도 손이 이게 뭐냐며 타박을 하던 우진이 떠올라서 시현은 한숨이 나왔다. 캔을 따서 돌려주며, 태하는 조용히 물었다.

16551943349416.jpg“원래 술 잘 못 마셨잖아. 언제부터 그렇게 늘었어?”

16551943349407.jpg“나 서른 되면서 집에서 독립했거든. 혼자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

사실 혼자 살아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작은어머니는 빨리 결혼하라고 들들 볶고, 우진은 아직 결혼은 너무 이르지 않느냐며 미적지근하게만 나오고. 그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술이 점점 늘었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시현은 방긋방긋 웃으며 물었다.

16551943349407.jpg“근데 소원은 언제 들어줘?”

16551943349416.jpg“무슨 소원?”

16551943349407.jpg“너 어렸을 때 그랬잖아. 내가 생일날 소원 빌면, 네가 커서 들어주겠다고. 설마 이제 와서 그것만 기억 안 난다고 할 건 아니지?”

태하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16551943349416.jpg“말해봐. 뭐든지.”

16551943349407.jpg“너 그러다 내가 진짜로 뭐든지 말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태하가 짙은 눈썹을 까딱했다. 어디 말해보라는 듯이.

16551943349407.jpg“오, 완전 로또 맞은 기분인데?”

뭐가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 시현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을 말했다.

16551943349407.jpg“그럼 나 차 사줘.”

16551943349416.jpg“사줄게.”

태하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3349407.jpg“아니, 차 말고 집 사주라. 펜트하우스 같은 거. 드라마에 나오는 거 있잖아?”

16551943349416.jpg“사줄게.”

분명 이쪽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하나 다 진심이다. 농담을 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시현은 뒤늦게 깨달았다. 태하가 엄청난 부자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물론 태하가 아무리 큰 부자가 되었다 해도 시현은 그 덕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렇게 성공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주위에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자신까지 그중 하나가 될 순 없다. 시현은 얼른 웃음을 터뜨리며 말실수를 수습하려고 했다.

16551943349407.jpg“취소, 취소. 우리 사이에 물질적인 게 뭐가 중요하니? 마음이 중요하지.”

16551943349416.jpg“마음이 필요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태하는 시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16551943349416.jpg“그럼 줄게.”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얘는, 왜 자꾸만 이런 소리를……. 마치 반응을 기다리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서 시현은 일부러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16551943349407.jpg“나 오늘 많이 피곤했나 봐. 벌써 졸리네.”

시현은 몸을 일으켰다.

16551943349407.jpg“이만 가서 잘게. 내일 아침에 회사에서 보자.”

갑자기 태하가 손목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자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16551943349416.jpg“사람들이 다들 궁금해하던데.”

시현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태하는 그린 것 같은 입술을 움직였다.

16551943349416.jpg“내가 왜 이 회사에 왔는지.”

짙은 갈색 눈동자 안에 제 얼굴이 비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16551943349416.jpg“……당신은 궁금하지 않아?”

사실 궁금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자기 회사 일만 해도 바쁠 텐데, 아무리 구원투수 격으로 잠시 온 거라고 해도 왜 굳이 남의 회사에 왔을까. IT 회사도 아닌 미래은행에.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왜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현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6551943349407.jpg“늦었다. 이만 가볼게.”

  * 태하의 집에서 나온 시현은 제집으로 돌아왔다. 원룸 건물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도 방음이 형편없다. 심할 때는 옆집이 조명을 켜고 끄는 스위치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16551943349407.jpg“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침대로 향하던 시현은 문득 얼어붙었다. 새까맣고 조그만 무언가가 스르르 탁자 밑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시현은 비명을 질렀다.

16551943349407.jpg“꺅!”

그로부터 30초나 지났을까. 삑삑삑삑, 급하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이어 태하가 뛰쳐 들어왔다.

16551943349416.jpg“왜 그래? 무슨 일이야?”

시현은 달려가서 태하의 등 뒤에 숨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있다면 다리 여럿 달린 종류였다. 좀비도 귀신도 무섭지 않지만, 벌레만은 죽도록 무서웠다.

16551943349407.jpg“거, 거, 거……!”

시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탁자 밑을 가리켰다.

16551943349416.jpg“거미.”

태하는 곧바로 알아듣고 처리에 나섰다. 티슈로 조심스럽게 거미를 감싸 들어서 창밖에 놓아주는 것을 보고 시현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6551943349407.jpg“고마워.”

뒤늦게 시현은 흠칫 놀랐다. 태하가 샤워 가운 차림이었던 것이다. 머리는 젖어 있고, 심지어 샤워 가운의 앞섶은 크게 벌어져서 맨가슴이 다 들여다보였다. 시현은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타박했다.

16551943349407.jpg“너 옷이 그게 뭐야?”

16551943349416.jpg“무슨 소리야, 비명 지르길래 샤워하다 말고 뛰어와 줬더니.”

16551943349407.jpg“그래도 옷은 좀 챙겨 입고 와야지!”

그러니 태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16551943349416.jpg“남자도 아니라며? 나는.”

16551943349407.jpg“아니지. 당연히!”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대꾸하는 시현을 향해, 태하가 성큼 다가섰다.

16551943349416.jpg“그런데 왜 똑바로 못 쳐다봐?”

태하가 샤워 가운 자락을 양쪽으로 벌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눈부신 몸이 드러났다.

16551943349416.jpg“똑바로 봐.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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