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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너 왜 옆집에서 나와? (14/181)

#14. 너 왜 옆집에서 나와?202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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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년 전. 스물네 살의 시현은 발걸음도 가볍게 태하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태하가 혼자서 계속 살고 있던 반지하가 아니라, 근처에서도 제일 비싼 아파트가 있는 방향이었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태하는 놀랍게도 얼마 전에 친부를 찾았다. 이름은 레온 케네디. 한국 나이로 36세의 미국인이었다. 레온은 태하와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하루아침에 나타나서 자기가 태하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하는데도 납득할 정도였다. 태하의 외모에서 외국인 같은 느낌을 주는 부분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온 게 맞구나, 하고 시현은 생각했다. 레온은 미국계 거대 헤지펀드의 수장으로, 한국 회사에도 여럿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통역을 거쳐 아들에게 털어놓은 사정은 이랬다. 한국 나이로 스무 살 때 한국에 잠시 여행을 왔던 레온은, 동갑인 태하의 어머니를 우연히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임신한 것을 모른 채 결혼을 약속했고, 미국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부탁해서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했다. 한국에 보냈던 사람은 그녀가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만 가지고 돌아왔고, 그래서 레온은 그녀가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16551943840539.jpg[내게 자식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자신과 닮은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젊은 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레온은 그 후 한 번 결혼했었지만 몇 년 못 가서 이혼했고, 자식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태하에게 미국에 가서 함께 살자고 제의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사업을 물려받으라는 것이었다.

16551943840543.jpg[No.]

태하가 딱 잘라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레온은 한 달쯤 한국에서 지내다가 혼자 귀국했다. 그러나 결코 아들이 지금까지처럼 살게 하지는 않았다. 근처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의 초대형 평수에 새 거처를 마련하고, 비서에 운전기사, 가정부까지 고용해서 태하의 생활을 돌보게 했다. 그렇게 태하는 하루아침에 부잣집 도련님이 되었다. 덩달아 시현도 이제는 어엿한 과외선생님이 되었다. 레온은 그동안 시현이 태하를 키워 온 것을 알고, 어떻게든 그녀에게 보답을 하지 못해 안달을 했다. 처음에는 좋은 차를 선물하겠다고 했다가, 시현이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살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집을 사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시현은 딱 잘라 거절했다.

16551943840549.jpg[저 지금까지 돈 때문에 태하 키운 거 아니에요.]

태하는 그녀에게 진짜 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어린 동생을 누나가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차든 집이든 받을 이유가 없다.

16551943840539.jpg[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시현이가 우리 태하를 돌봐줬으면 좋겠는데. 아버지인 내가 자식을 맡기면서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는 없어.]

레온이 우기는 바람에 결국 시현은 타협했다. 아직 미성년자인 아들을 혼자 남겨두고 돌아가야 하는 그의 심정도 알 것 같아서였다.

16551943840549.jpg[정 그러시면 과외비만 받을게요. 딱 다른 사람들 받는 만큼만요.]

분명히 그러기로 약속해 놓고 정작 매달 들어오는 것은 웬만한 대기업 신입사원 월급에 육박하는 큰돈이었다. 한국에서는 그 정도가 시세라고 들었다고 우기며, 레온도 그 이상은 양보하지 않았다. 덕분에 돈 걱정 없이 취업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척 고마웠다. 작은어머니는 대학 등록금 외에는 단 한 푼도 주지 않아서, 대학 시절 내내 시현은 아르바이트에 쫓기다시피 살아야 했으니까. 초인종을 누르자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가정부가 얼른 달려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16551943840564.jpg“아유, 아가씨 오셨어요?”

레온이 고용한 한국인 비서가 꽤나 단단히 일러둔 모양이었다. 시현을 태하 도련님과 똑같이 대하고 모시라고. 하지만 시현은 아가씨 대접에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같이 사는 작은아버지 댁 가정부조차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아현에게는 아가씨라고 부르지만 시현은 늘 시현이었다.

16551943840564.jpg“더운데 어서 들어오세요, 아가씨. 음료는 뭘로 준비할까요?”

16551943840549.jpg“저 그냥 선생님이라고 해주세요, 아주머니. 이름 부르셔도 되고요.”

하지만 얼마나 단단히 주의를 받았는지, 가정부는 몇 번을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16551943840564.jpg“잠깐 앉아 계세요, 아가씨. 태하 도련님 곧 오실 시간 됐어요.”

작은아버지 댁의 제 방보다 족히 너덧 배는 넓은 태하의 방을 둘러보며 시현은 새삼스레 생각했다. 사람 인생, 참 모르는 거구나. 태하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현은 시간을 때울 셈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격렬한 음악과 함께 젊은 남자들이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며 화면 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일명 ‘짐승돌’로 불리며 인기 최정상에 있는 남성 아이돌 그룹의 퍼포먼스였다. 한창 빠져들어서 보고 있는데, 문득 손이 허전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교복 차림의 태하가 휴대폰을 빼앗아가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 그러나 태하는 이미 소년이라고 부르기 어색할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키는 180센티미터가 넘었고, 어깨와 가슴이 함께 넓어지면서 골격도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훌륭한 체격을 가진 그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외모나 체격으로는 이미 성인을 압도하면서도, 곳곳에 아직 소년 특유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남자다운 느낌을 주는 턱에는 아직 수염 자국이 눈에 띄지 않았고, 새하얀 교복 옷깃 위로 드러난 목선은 어딘가 가녀린 느낌이 들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 딱 그 시기에만 가질 수 있는 덧없는 아름다움이었다. 태하는 휴대폰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물었다.

16551943840543.jpg“이런 거 좋아했어?”

딱히 놀리거나 탓하는 듯한 뉘앙스는 없었지만, 괜히 민망한 나머지 시현은 태하의 손에서 휴대폰을 홱 빼앗았다.

16551943840549.jpg“당연하지. 길 가는 여자들 잡고 물어봐, 누가 싫어하나.”

늘씬한 자작나무 같은 제 몸을 힐끗 내려다보며, 태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16551943840543.jpg“……그런가.”

  *

16551943854216.jpg“그런데 왜 똑바로 못 쳐다봐?”

태하가 샤워 가운 자락을 양쪽으로 벌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눈부신 몸이 드러났다.

16551943854216.jpg“똑바로 봐.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거침없는 도발에, 시현은 욱하는 것을 느꼈다. 뭐, 보라면 못 볼 줄 알고? 어릴 때도 목욕까지는 시켜준 적 없지만, 머리라면 여러 번 감겨주었다. 자연히 벗은 상체 정도는 수도 없이 보았다. 시현은 자신 있게 웃으며 태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16551943840549.jpg“어디, 우리 태하 많이 컸나 볼까?”

태하가 보란 듯이 가슴을 활짝 폈다.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이었다. 잘 발달된 흉근과, 선명하게 모양이 잡힌 복근이 샤워 가운 사이로 제 존재를 주장했다.

16551943840549.jpg“오, 윤태하. 몸 장난 아닌데?”

태하의 몸을 빤히 쳐다보며, 시현은 입술을 모아 살짝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가슴에 슬쩍 대보기까지 했다.

16551943854216.jpg“그게 다야?”

뻔뻔스러운 시현의 반응이 못마땅하다는 듯, 태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16551943840549.jpg“그럼 뭐, 빨래라도 가져와서 할까?”

벌어진 샤워 가운 자락을 꼭꼭 여며 주고 나서, 시현은 살짝 태하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16551943840549.jpg“구경 잘했어. 근데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난 잔근육이 좋거든.”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이고, 시현은 새삼스럽게 태하를 흘겨 보았다.

16551943840549.jpg“그나저나 너. 우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16551943854216.jpg“당신 늘 같은 비밀번호 썼잖아, 옛날부터.”

16551943840549.jpg“아무리 그래도 다음부턴 초인종 누르고 들어와라.”

하지만 태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려 그대로 시현의 집을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시현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16551943840549.jpg“……뭐야, 쟤.”

심장이 입 밖으로 뛰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기억 속에 있는 어린아이의 몸이 아니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보았던 늘씬한 몸도 아니었다. 완벽하게 아름답고 강한, 남자의 몸이었다.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느라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다. 입안에 도는 물기를 꿀꺽 삼키고 싶은 것을 참느라 턱이 다 아팠다. 아무렇지 않은 척, 뻔뻔한 척 연기하느라 숨이 가빴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 비해 몰라보게 체격이 좋아진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탄력 있는 근육의 감촉이 손끝에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얼마 전에 배를 문질러 줬던 게 거짓말 같았다. 저런 몸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만질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하를 상대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달아오른 얼굴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16551943840549.jpg“미쳤나 봐, 강시현…….”

시현이 새빨개진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 씁쓸하게 돌아온 태하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으며 중얼거렸다.

16551943854216.jpg“그새 취향이 변했나?”

분명히 옛날에는 짐승돌인가 뭔가가 좋다고 했었는데.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은 공부하고 앱 개발하느라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군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몸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일이 아무리 바빠도 운동만은 목숨 걸고 하면서 여태 유지해온 몸인데……. 시현은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16551943840549.jpg[구경 잘했어. 근데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난 잔근육이 좋거든.]

변덕스러운 여자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뛰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단순히 손끝으로 살짝 만진 것. 그게 전부인데. 그 순간, 태하는 온몸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시현의 손이 닿은 가슴께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한 피는 얼마 안 가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태하는 한숨을 쉬고 일어나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나가서 한바탕 조깅이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 밤은 잠들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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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날 아침, 시현을 깨운 것은 초인종 소리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니 일곱 시였다. 아직 삼십 분은 더 잘 수 있는데…….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현관문을 여니 태하가 서 있었다. 얼굴을 보는 순간 어제 일이 떠올라서 잠이 반쯤 달아났다.

16551943840549.jpg“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또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아서 일부러 하품을 하며 묻자 앞치마를 한 태하가 대꾸했다.

16551943854216.jpg“와서 아침 먹어.”

16551943840549.jpg“아침?”

16551943854216.jpg“아침 굶고 다니잖아. 와서 밥 먹고 회사 가라고.”

그 말만 하고 태하는 도로 가버렸다. 시현은 대충 세수를 하고 옆집으로 향했다. 작은 테이블 위에 이미 정갈하게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갓 지어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달걀찜. 제일 좋아하는 명란젓까지 놓인 걸 보고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먹어 보고 시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16551943840549.jpg“뭐야. 너 언제부터 장금이 됐어?”

16551943854216.jpg“괜찮으면 매일 와서 먹어. 난 아침 꼭 챙겨 먹으니까.”

16551943840549.jpg“됐어. 사람이 염치가 있지 어떻게 맨날 얻어먹니? 뻔뻔하게.”

16551943854216.jpg“당신이 나한테 밥 해준 게 대체 몇 년 동안인 줄 알아?”

명란젓을 시현의 밥 위에 얹어 주며, 태하는 잘라 말했다.

16551943854216.jpg“강시현, 얼마든지 나한테 뻔뻔해져도 되는 사람이야.”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16551943881714.jpg[넌 어쩌면 그렇게 돈 달란 소리를 뻔뻔하게 잘도 하니?]

16551943881714.jpg[전액장학금 포기하고 좋은 학교 가겠다고? 등록금은 물론 내가 내고? 참 뻔뻔하기도 하다, 너는.]

시현이 어릴 때부터 작은어머니는 뻔뻔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얼마든지 뻔뻔해져도 된다니,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괜히 울컥해서 시현은 일부러 더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뜨거운 밥에 살짝 익은 명란젓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16551943840549.jpg“잘 먹었어, 태하야. 설거지는 내가 할게.”

그릇을 들고 일어서려는 시현을, 태하가 손짓으로 막았다.

16551943854216.jpg“됐으니까 가서 출근 준비하고 나와. 화장하려면 시간 걸리잖아.”

16551943840549.jpg“응?”

16551943854216.jpg“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카풀 해준다고.”

아침밥을 차려준 것도 모자라서 차까지 태워주겠다니. 염치가 없어서 사양하려다, 아까 태하가 한 말이 떠올라서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얼마든지 뻔뻔해져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16551943840549.jpg“그럼 나 얼른 준비하고 나올게.”

서둘러 태하의 집을 나오던 시현은, 문득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꽃다발을 든 우진이, 시현의 집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16551943895341.jpg“뭐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우진이 놀란 얼굴로 꽃다발을 든 손을 떨어뜨렸다.

16551943895341.jpg“너 왜 옆집에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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