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몇 살이 돼도, 나한테는 그냥 아홉 살 애라고 (15/181)

#15. 몇 살이 돼도, 나한테는 그냥 아홉 살 애라고.2021.11.19.

꽃다발을 든 우진이, 시현의 집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16551943967809.jpg“뭐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우진이 놀란 얼굴로 꽃다발을 든 손을 떨어뜨렸다.

16551943967809.jpg“너 왜 옆집에서 나와?”

바라보는 눈길에 이미 짙은 의혹이 어려 있었다. 마치 아내가 바람피운 현장을 잡은 남편 같은 눈빛이었다. 시현은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상황을.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만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등 뒤에서 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51943967817.jpg“우두커니 서서 뭐 해? 빨리 가서 출근 준비하라니까.”

태하를 발견한 우진의 눈이 커다래지는 것을 보고, 시현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16551943967809.jpg“뭐야, 이 자식은 또 왜 거기서 나와?”

우진은 시현의 등 뒤에 선 태하를 노려보며 물었다.

16551943967809.jpg“강시현. 너 설마 이 자식이랑 바람났냐? 그런 거야?”

16551943967831.jpg“그런 거 아니야!”

시현은 황급히 외쳤지만, 우진의 사나운 표정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16551943967809.jpg“그럼 이 자식이 왜 옆집에 사는데? 넌 또 왜 잠옷 바람으로 거기서 나오고!”

그제야 시현은 자신이 여태 잘 때 입는 편한 옷차림인 것을 깨달았다. 이건 오해를 안 하는 쪽이 이상하다.

16551943967831.jpg“내가 다 설명할게, 오빠.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시현은 얼른 제집을 향해서 우진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우진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태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16551943967809.jpg“그렇지 않아도 처음부터 거슬렸어. 야, 이 새끼야.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뭔데 남의 약혼녀한테 집적거리냐고!”

16551943967817.jpg“들었을 텐데? 내가 뭐 하는 놈인지는.”

태하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16551943967817.jpg“회사에서 과장이랬나? 쉽지 않겠네, 사회생활이.”

지난번에 우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셈이었다.

16551943967809.jpg“이 새끼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우진은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으로 태하를 노려보았다. 6년이나 사귄 시현조차 처음 볼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다.

16551943967809.jpg“너 이 새끼, 돈 좀 있다고 아주 사람이 우습게 보이지? 어?”

16551943967831.jpg“무슨 소리야. 태하가 언제 오빠를 우습게 봤다고 그래? 그런 거 아니야.”

시현은 어떻게든 말리려 애를 썼다.

16551943967831.jpg“그만해, 오빠. 응? 글쎄 들어가서 나랑 얘기하자니까…….”

안간힘을 다해 팔을 끌어당기는 시현을, 우진이 고함을 치며 뿌리쳤다.

16551943967809.jpg“이거 놔!”

난폭하게 뿌리쳐지는 바람에 시현은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고 크게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시현을, 태하가 얼른 한팔로 안아서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16551943967817.jpg“괜찮아?”

16551943982757.jpg

  시현은 황급히 태하에게서 떨어졌지만, 이미 우진은 눈이 확 돌아간 뒤였다.

16551943967809.jpg“이것들이 지금, 내 앞에서 뭐 하는……!”

16551943967817.jpg“어지간히 자신이 없으신 모양이네.”

태하가 비웃듯 중얼거린 말에, 우진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16551943967809.jpg“뭐?”

16551943967817.jpg“자기 여자를 그렇게 못 믿나?”

주먹싸움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저히 그것까지는 볼 수가 없어서, 시현은 이번엔 태하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16551943967831.jpg“하지 마, 태하야. 너 얼른 집에 들어가.”

그러나 태하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16551943967831.jpg“너 이러는 거 나한테 하나도 도움 안 돼. 들어가라고, 제발 좀!”

강제로 태하의 가슴팍을 밀쳐서 집안에 밀어 넣고, 현관문을 쾅 닫고 나서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51943967831.jpg“들어가서 얘기하자, 오빠.”

  *

16551943967809.jpg“에이 썅!”

시현의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우진은 욕설을 하며 꽃다발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새빨간 장미 꽃잎이 방바닥에 우수수 흩어졌다. 아침부터 대체 웬 꽃인가, 하고 생각해 보니 어제저녁에 같이 식사하다가 예단 운운하는 걸 듣고 화가 나서 중간에 뛰쳐나왔던 게 그제야 기억났다.

16551943967831.jpg‘내 기분 풀어주려고 온 거구나.’

미안한 마음에 시현은 꽃다발을 주워들어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았다.

16551943967809.jpg“어쩐지 하필이면 너희 회사에 왔다고 할 때부터 내가 기분이 영 이상했어. 결국 이런 거였냐? 응?”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는 우진을 진정시키듯, 시현은 차분하게 말했다.

16551943967831.jpg“우리 회사에 온 거야 윗분들이 결정하신 거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그리고 나도 옆집에 이사 온 줄은 미처 몰랐어. 어젯밤에 안 거야.”

16551943967809.jpg“그러니까 우연히 너희 회사에 왔고, 옆집에도 우연히 와서 살게 됐다?”

16551943967831.jpg“태하 우리 회사에 1년 계약으로 왔다고 했잖아. 집이랑 회사가 너무 멀어서, 1년만 지낼 곳을 찾다가 이사 온 게 여기래. 알잖아, 회사 근처에 원룸 몇 개 없는 거.”

16551943967809.jpg“넌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51943967831.jpg“사실인 걸 어떡해.”

16551943967809.jpg“그럼 아침부터 저 자식 집에서 나오는 이유는 뭔데?”

16551943967831.jpg“아침밥 먹는 김에 숟가락 하나 더 놨다고 부르더라. 그래서 같이 아침 먹은 것뿐이야.”

16551943967809.jpg“야, 강시현.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우진이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16551943967809.jpg“그렇게 돈 많고 잘난 새끼가, 제 회사 놔두고 하필 그 많은 회사 중에 너희 회사 본부장으로 와서. 서울 하늘 아래 그 많고 많은 집 중에 하필이면 네 옆집으로 이사를 와서. 손수 아침밥까지 해 바치는데, 그래도 이게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16551943967831.jpg“그럼 대체 무슨 사이일 것 같은데?”

조금도 이해할 생각이 없는 우진이, 시현도 답답했다.

16551943967831.jpg“내가 태하 얘기 수도 없이 했었잖아. 나 쟤 아홉 살 때부터 봤어. 내 손으로 가나다라 가르치고, 내 손으로 이 닦이고 머리 감겨주면서 키운 애라고.”

16551943967809.jpg“저게 어떻게 애야!”

우진이 기어이 폭발하듯 소리쳤다.

16551943967809.jpg“눈이 있으면 똑바로 뜨고 봐! 대체 저 새끼가 어딜 봐서 애냐고!”

내 눈에는 그렇다고 대꾸하려다,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6551943967817.jpg[똑바로 봐.]

도발하듯 바라보던 눈빛.

16551943967817.jpg[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샤워 가운 자락 안으로 들여다보이던, 눈부신 남자의 몸. 어린애를 상대로 얼굴을 붉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어쩌면 나 역시, 태하를 아이로만 보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만 자신이 당혹스러워서, 시현은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16551943967831.jpg“애야, 내 눈에는.”

우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시현은 다시 한번 말했다.

16551943967831.jpg“몇 살이 돼도, 나한테는 그냥 아홉 살 애라고.”

  *

16551943967809.jpg“결국 이런 거였냐? 응?”

방음이라고는 전혀 되지 않는 원룸의 얇은 벽 너머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태하는 출근 준비를 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혹시나 폭력 사태로 번지면, 당장 달려가서 때려눕힐 생각이었다. 우진은 잔뜩 흥분해 있었고, 시현은 모든 게 우연이라고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설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우연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강시현뿐이다.

16551943967809.jpg“그렇게 돈 많고 잘난 새끼가, 제 회사 놔두고 하필 그 많은 회사 중에 너희 회사 본부장으로 와서. 서울 하늘 아래 그 많고 많은 집 중에 하필이면 네 집 옆으로 이사를 와서. 손수 아침밥까지 해 바치는데, 그래도 이게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며 태하는 피식 웃었다.

16551943967817.jpg‘그래도 저 인간이 강시현보다는 눈치가 좀 있군.’

그렇지 않아도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아까 우진이 시현을 있는 힘껏 뿌리치는 꼴을 보고 결심이 더욱더 굳어졌다.

16551943967809.jpg[이거 놔!]

저 김우진이라는 놈은 강시현을 조금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세상에 어떤 놈이 제 여자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패대기칠까. 그래서 태하는 방금 있었던 소동이 딱히 나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상대가 그런대로 괜찮은 놈이었다면 조금 미안할 뻔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별로 아닌가.

16551943967809.jpg“저게 어떻게 애야!”

우진이 고함을 지르는 것을, 태하는 심지어 즐거운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16551943967809.jpg“눈이 있으면 똑바로 뜨고 봐! 대체 저 새끼가 어딜 봐서 애냐고!”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다. 그렇지, 잘한다.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시현의 말에, 태하는 넥타이를 매던 손을 멈췄다.

16551943967831.jpg“애야, 내 눈에는.”

시현은 딱 잘라 말했다.

16551943967831.jpg“몇 살이 돼도, 나한테는 그냥 아홉 살 애라고.”

  *

16551943967809.jpg“일단 지금은 회사 가야 하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해. 나, 절대 이거 그냥 못 넘어간다.”

우진은 내뱉듯이 말하고 씩씩거리며 시현의 집을 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더 성질을 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출근해야 할 시간이었다.

16551943967809.jpg“저 새끼가 어린애라고?”

닫혀 있는 태하의 집 현관문을 노려보며, 우진은 중얼거렸다. 시현이 귀가 닳도록 얘기를 하기는 했었다. 별로 관심이 없어서 늘 흘려듣기는 했지만. 개중에 기억에 남는 건,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에 저 자식 때문에 크게 다툰 일이었다. 스무 살 되자마자 군대 간 후로 몇 년째 연락이 안 돼서 걱정이라고 하길래, 별생각 없이 대꾸했었다.

16551943967809.jpg[군대에서 사고 나서 죽은 거 아냐? 가끔 있거든, 그런 일.]

16551943967831.jpg[오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때 시현이 얼마나 심하게 화를 냈는지, 화를 풀어 주느라 진땀을 뺐다. 어쨌든 시현이 어릴 때부터 키우다시피 돌봐준 애라고 하니까, 그냥 새파랗게 어린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실제로 본 녀석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키는 자신보다도 훨씬 컸고, 어깨는 비교도 안 되게 넓었다. 얼굴도 외국 잡지에 나오는 모델같이 생겨서는, 심지어 본부장이라고 해서 더욱더 배알이 뒤틀렸다. 싸우기도 전에 진 느낌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는 서른다섯인데 놈은 스물여섯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패배한 느낌이었다. 시현이 그놈에게 진짜로 아무 사심이 없다는 건 알겠다. 고지식한 여자는, 거짓말도 의심도 도통 할 줄 몰랐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도 여태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거겠지. 하지만 놈은 그렇지 않다는 게 너무나 명백했다. 어느 미친놈이 관심도 없는 여자 옆집에 일부러 이사를 와서 아침밥까지 차려주고 있겠느냔 말이다.

16551943967809.jpg“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제법인데? 강시현.”

우진은 입술을 비뚤어뜨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어쩔 줄을 몰랐다. 정작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건 자신이면서, 저보다 훨씬 나은 남자가 시현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초조하고 기분이 나빴다. 어떻게 해야 이 더러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잠시 고민하던 우진은, 내려와서 원룸 건물 앞에 세워 놓은 차에 타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에 뜨는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 상했던 자존심이 거짓말처럼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16551943967809.jpg“어, 보라야.”

아까까지 시현을 향해 실컷 고함을 쳤던 입술에서, 다른 사람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16551943967809.jpg“금요일 저녁에 시간 어때? 우리 좋은 데서 데이트하자.”

16551944049887.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