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가까이 있는 사람 마음도 모르면서2021.11.23.
아침에 있었던 소동 때문에 진이 다 빠졌다. 화장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립스틱만 바르고 나섰는데도 시현은 회사에 지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 절대 이거 그냥 못 넘어간다.]
태하의 집에서 나오는 시현을 보고 한바탕 화를 냈던 우진은, 내뱉듯 말하고 가버렸다. 나중에 또 우진을 만나서 이런저런 설명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난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것도 나한테는 너무 큰 욕심이었던 걸까……. 출근하자마자 시현은 태하의 사무실로 향했다.
“본부장님 뵈러 왔습니다.”
비서에게 이야기하자 잠시 후 안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들어가시죠.”
사무실 안에 들어서는 순간 전에도 여러 번 맡았던 그 향기가 났다. 씁쓸함과 산뜻함이 적절히 섞인, 윤태하 특유의 향기. 오늘 아침에 우진과 멱살잡이라도 할 듯 싸웠던 남자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차분하고 서늘한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벌써 삭제 계획이 선 겁니까? 일주일 드린다고 한 것 같은데.”
너무나도 사무적인 말투에, 시현은 순간적으로 원래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금세 직장인 모드로 돌아가서 시현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 앱에 필요 없는 기능은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내/외부 리서치 거치고, 기능 하나하나 고민해서 선별한 겁니다.”
“리서치가 다라고 생각해요? 그럼 애플은 리서치를 안 한다는 말이 왜 있을까?”
“그건…….”
태하는 팔짱을 낀 채 빠르게 쏘아붙였다.
“유저들이 자기 마음을 다 알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 강시현 대리님도 알고 있겠죠. 그런데도 응답자들이 이거 필요하다, 저거 필요하다 하니까 이 기능도 살리고, 저 기능도 살리고 한 거 아닙니까? 내부 리서치 때도 사업부마다 문항 달리하지 않았죠? 과연 각 사업부에서 자기네 앱 기능 중에 필요 없는 게 있으니까 빼자고 했겠습니까?”
시현은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태하를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윤태하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너 이렇게 긴말도 할 줄 알았어? 정작 그 하나하나가 다 자신을 힐난하는 내용이라는 사실은 한 박자 뒤늦게 깨닫고, 시현은 얼굴을 굳혔다.
“저도 UX 기획자로 일한 지 벌써 8년차입니다.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프로젝트인 만큼 최선을 다했다. 아직 프로토타입에 불과하지만 작업 내용에 대한 자신도 어느 정도 있었다.
“기존 앱들의 사용자 저니맵은 봤습니까?”
그럼 그것도 안 보고 만들었을까 봐? 시현은 턱을 치켜들고 자신 있게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태하는 다시 물었다.
“앱 기획 단계에서 예상해서 그린 거 말고, 사용자 로그 뒤져서 실제 사용 기록을 직접 봤느냔 말입니다.”
“그것까지는…….”
말문이 막힌 시현을, 태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각 앱의 사용자 로그 보고 퍼널 분석하고, 실제 사용자 저니맵 다시 그려서 가져오세요. 기한은 이틀 후까지.”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제작하고 있는 원앱은 총 7가지 앱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일곱 가지 앱의 사용자 로그를 이틀 안에 다 뒤지라는 말씀이 맞습니까?”
확인 차 묻자 태하가 받아쳤다.
“거기다 저니맵까지. 세 번 말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자존심상 차마 못 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건 이틀 밤을 새도 모자랄 것 같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참고 시현은 등을 돌렸다. 사무실을 나가기 직전에야 겨우 본래의 용건이 떠올랐다.
“그리고 본부장님.”
뭡니까, 하듯 태하가 눈을 들어 빤히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앞으로 서로 집에 오가는 건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 약혼자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요.”
아까 출근하는 길에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태하도 무척 소중하지만 결혼할 사람만큼은 아니다. 아무리 떳떳한 사이라도, 약혼자가 불편해한다면 거리를 두는 게 맞는 거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설령 태하를 서운하게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차마 태하의 표정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시현은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돌아 나왔다. * 모두가 퇴근하고 난 어둑어둑한 사무실. 딱 한 자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물론 시현의 자리였다. 현재 시각 밤 열 시. 저녁도 삼각 김밥으로 때우고, 시현은 눈이 빠지도록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강 대리님!”
활기찬 목소리에 시현은 그제야 기지개를 펴고 의자를 빙글 돌렸다.
“야식 드시고 하실까요?”
보라가 활짝 웃으며 종이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나 야근하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
“저도 오늘 야근했거든요. 퇴근하려고 나가다가 보니까 선배님 자리에만 불이 켜져 있길래 나가서 샌드위치랑 커피 사 왔죠.”
에구, 얼굴도 예쁘고 마음 씀씀이는 더 예쁜 것. 시현은 보라의 부드러운 뺨을 꼬집어주었다.
“근데 대리님 늦게까지 뭐 하시는 거예요?”
“새 본부장님께서 기존 앱들 로그 싹 뒤져서 저니맵 새로 그려 오라신다.”
시현이 이를 갈며 대꾸했다.
“와, 너무하셨다.”
보라는 금세 알아듣고 예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친한 만큼 보라는 시현의 입맛도 잘 알았다. 샌드위치 하나를 먹어도 무슨 빵에 무슨 야채에 무슨 소스를 넣는지까지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역시나 보라가 사 온 샌드위치는 입에 딱 맞았다.
“그럼 저녁도 제대로 못 드셨겠어요.”
“대충 삼각 김밥으로 때웠지 뭐. 보라 씨 덕분에 살았다.”
볼이 미어져라 샌드위치를 먹는 시현에게, 보라가 얼른 커피에 빨대를 꽂아 건네주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살짝 시럽을 넣은 것마저도 딱 시현의 취향대로였다.
“보라 씨는 어쩜 그렇게 완벽해?”
시현은 새삼 감탄한 눈으로 보라를 바라보았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학벌도 뛰어나고, 집안도 좋은 보라는 심지어 성격마저도 좋았다. 회사에서 여신이라고까지 불리는데, 정작 궂은일에 제일 먼저 팔 걷고 나서는 건 보라였다.
[이런 건 신입이 해야죠!]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뭘 시켜도 열심히 해내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특히 사수인 시현에게는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그러니 예뻐하지 않을 수가 있나.
“완벽한 사람은 따로 있던데요?”
하지만 보라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새 본부장님 말이에요. 그 능력에 그 외모라니, 정말 사기 캐릭터 아니에요?”
예전 같으면 자랑스러운 마음에 얼른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태하의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시현은 손을 내저었다.
“본부장의 본 자도 꺼내지 마. 말만 들어도 지친다.”
단순히 힘든 일을 시켜서 얄미운 게 아니었다. 보라가 입사하기 전까지 그녀는 미래은행에서 하나뿐인 UX 디자이너였다. 지금까지 출시된 앱의 대부분이 크든 작든 시현의 손을 거쳤다. 그만큼 시현은 자신의 작업과 커리어에 대해서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태하는 지금까지 그녀가 해온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다시피 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쓸데없는 기능에 집착이라도 한다는 듯이! 시현의 마음도 모르고, 보라는 계속해서 태하의 얘기를 꺼냈다.
“너무 잘생겨서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겠더라고요. 괜히 얼굴 빨개지고, 막 긴장되고. 혹시 대리님은 안 그러세요?”
만약에 이 질문을 하루만 일찍 들었다면 어이가 없어서 웃었을 것이다. 내가 윤태하를 아홉 살 때부터 본 사람인데, 뭘 빨개지고 뭘 긴장을 해. 그런데 왠지 지금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럼 똑바로 봐.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어젯밤에, 자신도 얼굴이 빨개졌었으니까. 시현은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태하에게 거리를 두자고 얘기하기를 잘했다고. 꼭 우진 때문이 아니라도,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속마음을 감추며 시현은 보라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본부장님 몇 살인 줄이나 알아? 보라 씨랑 동갑이야. 나랑 일곱 살 차이라고.”
“일곱 살 차이가 뭐 어때서요? 요즘은 여자가 열 살도 넘게 더 많은 커플들도 TV에 잘만 나오는데.”
“그건 연예인이고!”
그러나 보라는 왠지 끈질겼다. 시현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다짐하듯 묻는 것이었다.
“그럼 대리님은 본부장님한테 아무 관심 없으시다, 이거죠?”
이쯤 되자 얘가 뭘 알고 이러나, 싶었다. 조금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현에게, 보라는 금세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하긴 대리님은 곧 결혼도 하시는데. 그냥 본부장님이 너무 잘생기셨길래 농담 좀 해봤어요, 헤헤.”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렇지. 엮을 데다 엮어라, 좀.”
살짝 흘겨보다 문득 보라가 하고 있는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보라 씨, 목걸이 예쁜 거 했네?”
전에 시현이 프러포즈 받는 줄 알고 김칫국을 한 사발이나 마셨던 바로 그 브랜드의 목걸이였다. 클로버 모양의 작은 핑크색 펜던트가 희고 가느다란 보라의 목에 잘 어울렸다.
“아, 이거요?”
보라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봄이고 해서 큰맘 먹고 하나 질렀어요. 나에게 주는 선물로. 어때요?”
“너무 잘 어울린다. 나는 여태 그런 거 하나 살 생각을 못 하고 뭐 했나 몰라.”
이제 와서 시현은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나도 가끔은 비싸도 좋은 거 하나씩 사고 그럴걸, 바보같이 괜히 제일 젊고 예쁠 때부터 결혼자금 모은답시고 짠순이 노릇을 했구나. 스스로에게 비싼 선물을 할 줄도 아는 보라가 부럽고 멋있게 느껴졌다.
“근데요, 대리님.”
갑자기 보라가 화제를 바꿨다.
“혹시 원앱팀에 인원 모자라지 않아요?”
“그건 왜?”
“저도 들어오고 싶어서요. 대리님 안 계시니까 일도 재미가 없고…….”
시현은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리야. 나 야근하는 거 보면 모르겠어? 오라고 해도 도망쳐야 할 판에.”
“그래도 저 대리님이랑 같이 일하고 싶단 말이에요.”
보라는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혹시 사람 모자라면 저도 꼭 불러주세요, 네?”
* 아침 일곱 시 반. 가장 먼저 출근하던 태하는.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시현을 보고 흠칫 걸음을 멈췄다. 야근도 모자라 아예 밤을 새운 모양이다.
‘며칠 더 줄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최소한 일주일은 줬어야 하는 일을 이틀로 딱 못 박은 것은, 사실 심술을 부린 거였다.
[애야, 내 눈에는.]
시현의 단호한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아서, 그래서 화가 났다.
[몇 살이 돼도, 나한테는 그냥 아홉 살 애라고.]
심지어 그녀는 어제 아침에, 서로 집에 오가는 건 그만두기로 하자고 딱 잘라 선언했다. 그 잘난 약혼자란 놈 때문에. 태하는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다가갔다. 시현이 쓰는 모니터 옆에 메모지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일정과 여기저기서 온 요청 사항 등이 적힌 메모지 중에, 조금 오래된 듯한 메모 하나가 눈에 띄었다. - 유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UX 디자이너로서 그녀가 늘 마음속에 새기는 다짐인 모양이다. 잠든 시현을 보고, 태하는 픽 웃으며 속으로 뇌까렸다. ……가까이 있는 사람 마음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으음.”
잠결에 추웠는지, 시현이 어깨를 한껏 움츠리며 조금 몸을 떨었다. 태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담요를 주워 시현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
소리 없는 한숨이 썰렁한 사무실 안에 내려앉았다.
*
“세상에, 윤태하.”
시현의 어깨 위에 담요를 덮어 주는 태하의 모습을 보고, 보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한테서 여태 미련을 못 버렸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