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주 오래된 인연2021.11.26.
시현은 밤새 사용자 로그를 뒤지다 새벽녘에 쓰러지듯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모두가 출근한 후에야 겨우 눈을 떴지만,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안 되겠다, 시현 씨. 가서 커피 수혈하고 오자.”
미주의 손에 끌려가서 아메리카노를 자그마치 스리 샷으로 마시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커피 타임을 가지는 김에, 시현은 미주에게 예단에 대해 상담했다.
“그럼 예단 해 가야지 뭐.”
사정을 듣고 난 미주가 말했다.
“웬일이야? 그걸 왜 하냐고 펄쩍 뛸 줄 알았더니.”
의외의 대답에 시현은 의아하게 미주를 쳐다보았다. 미주는 경우가 바르고 성격이 과격한 데가 있어서,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억울하기야 억울하지. 근데 우리 언니들 보니까 그렇더라고. 결혼을 안 할 거면 모를까, 할 거면 웬만하면 시댁에서 원하는 대로 해 가는 게 이래저래 편해. 안 그러면 결혼 후까지 계속 말 나오거든. 우리 큰언니, 시어머니가 밍크코트 해달라는 거 안 해 갔더니 결혼한 지 십 년 됐는데도 여태 겨울만 되면 뼈가 시리네 어쩌네 하면서 트집을 잡는다잖아!”
마치 한풀이하듯 얘기를 풀어내다, 미주가 검지를 척 세웠다.
“게다가 그거, 절대 자기 남친 혼자 생각 아니야. 그쪽 부모가 얘기 꺼낸 거지. 그러니까 금액까지 딱 못 박아놓고 얘기하는 거 아니겠어?”
“그런가?”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웬만하면 부르는 대로 해 가는 게 좋아. 어차피 예단비 보내면 봉채비로 반은 돌아오니까, 결국 천오백만 원 정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못할 금액도 아니잖아?”
듣고 보니 미주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고민이 해결된 것 같이 기분이 상쾌해졌다.
“조언 고마워, 미주 씨. 미주 씨 말이 맞는 거 같아.”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예단 해가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시현은 뒤늦게 생각했다. 말마따나 결혼을 안 할 거면 모르지만, 할 거라면 최대한 시부모 되실 분들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이쪽도 마음이 편하니까. 게다가 어제 아침에 태하 일 때문에 우진과 대판 싸우기까지 한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랬다. 단단히 화가 났는지, 우진은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여태 전화는커녕 메시지 한 통이 없었다. 예단을 하겠다고 말하면 우진도 마음이 좀 풀리지 않을까. 태하와의 일은 정말 우진의 오해일 뿐이고, 사실 예단을 하는 것도 끝내 납득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현은 무엇보다 잡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현재 시현이 바라는 건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부디 별탈 없이 무사히 결혼할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억울함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어디 가서 3천만 원을 구하지?”
솔직히 봉채비를 제대로 돌려줄지도 의문이었지만, 돌려받는다 해도 일단 3천만 원이란 큰돈을 먼저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는 시현에게, 미주가 팁을 주었다.
“정 안 되면 퇴직금 담보대출이라도 받으면 되지, 뭐. 회사에서 해주는 거 있잖아.”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퇴직금까지 건드려 가면서 결혼이란 걸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짧은 순간 뇌리를 스쳐갔지만 시현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원래 결혼 전에는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것뿐이다. * 잠이 부족한 나머지 하루 종일 시현은 반쯤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이 몽롱한 상태였다. 오후에도 또 커피를 뽑아서 돌아오는 시현에게, 마침 복도를 지나던 태하가 스치듯 짧게 말했다.
“저니맵은 됐고, 일단 사용자 로그 분석한 것만 다음 주 월요일까지 제출하세요.”
자기가 시켜놓고 생각해도 이틀은 좀 너무했다 싶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뻗고 싶은 걸 꾹 참고 시현은 우진의 회사로 향했다.
- 나 지금 오빠 회사 앞이야. 잠깐 봐.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도 십 분이나 지난 후에야 우진은 겨우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나 바빠, 빨리 얘기해.”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아직도 화났어?”
시현은 한숨을 짓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너무 그러지 마. 태하한테는 어제 내가 잘 얘기했어. 오빠 신경 쓰이니까, 앞으론 서로 집에 오가고 그런 거 하지 말자고.”
우진은 벌컥 성질을 냈다.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자식을 왜 신경 써?”
“맞아. 오빠 신경 쓸 필요 하나도 없어. 말했잖아, 나한텐 그냥 애라고.”
시현은 어떻게든 우진을 달래려 노력했다.
“그리고 예단 말인데, 오빠 말대로 해갈까 해.”
그제야 우진은 귀가 번쩍 띄는 모양이었다. 여태 외면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시현을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는 것이었다.
“진짜?”
“응. 나도 생각해봤는데, 할 건 해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돈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
제 뜻대로 된 것이 기꺼웠는지, 우진은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이 싱글벙글거렸다.
“현금예단 이천만 원 하고, 남은 천만 원으론 우리 아버지 양복하고 엄마 명품가방 하나 해드리면 될 것 같아. 괜찮지?”
“그렇게 하자.”
대답하면서도 시현은 입맛이 씁쓸했다. 이 남자는 내가 평생 명품가방 따위 가져본 적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잠깐만 기다려, 나 금세 정리하고 내려올게. 같이 저녁 먹자.”
서두르는 우진을, 시현이 제지했다.
“아냐. 나 어제 일이 너무 많아서 회사에서 밤 새웠거든. 오늘은 집에 가서 일찍 자고 싶어.”
“그럴래? 하긴 되게 피곤해 보인다.”
우진은 다정하게 시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얼른 들어가서 푹 자, 전화 안 할게.”
그 손길이 새삼스럽게 낯설고 거북하게 느껴져서, 시현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나중에 봐, 오빠.”
시현은 우진과 헤어져 지친 몸을 버스에 실었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데, 마침 퇴근시간이라 버스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우진의 회사부터 집까지는 겨우 네 정거장 거리였지만 그조차도 서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택시를 탈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하며 시현은 손잡이에 매달려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여기 앉으세요.”
상냥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안쓰러운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시현은 손을 저었다. 피곤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일 텐데 자리 양보까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앉아요. 난 어차피 조금 있으면 내리니까.”
“저도 금세 내려요.”
“그럼 내릴 때까지라도 앉아서 가세요.”
여성은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드러운 권유에 못 이겨 시현은 결국 호의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은 시현은, 곁에 서 있는 여성의 얼굴을 몰래 힐끔거렸다. 얼굴이 눈에 익어서였다. 상냥한 눈매와 단정한 입술, 부드러운 목소리까지도 기억 속의 누군가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물어볼까, 말까. 속으로 고민하는 사이에 버스는 내려야 할 정거장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여성은 시현과 같은 정거장에서 내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인사를 건네고 나서, 결국 시현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죄송하지만 혹시 옛날에 강재호 씨라는 분 댁에서 일하지 않으셨나요?”
“네?”
“아성식품 강 사장님이요.”
상대가 움찔 놀라며 새삼 시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고운 얼굴에 서서히 놀라움이 번졌다.
“그럼 혹시…… 시현이?”
시현은 상대의 손을 덥석 잡고 울먹였다.
“네. 저 시현이에요, 이모! 강 사장 댁 조카, 강시현이요.”
“세상에.”
그제야 상대의 눈에도 눈물이 어렸다.
“시현아!”
버스정거장에서 얼싸안고 눈물을 터뜨리는 두 여자를,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
“이모, 안 가면 안 돼요?”
중학교 3학년인 시현은 수연의 손을 붙잡고 울먹였다. 수연은 시현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작은아버지 댁에서 일한 입주가정부였다. 시현과 한 방을 쓰면서 지낸 세월이 어언 7년. 수연은 시현에게 엄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설거지는 이모가 할 테니까 얼른 들어가.]
가정부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어린 시현을, 수연은 늘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시현이 첫 생리를 했을 때 생리대를 사다주며 토닥여 준 것도, 처음으로 브래지어가 필요하게 됐을 때 챙겨준 것도 수연이었다. 그런 수연이 하루아침에 쫓겨나게 되었다. 이유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단지 작은어머니가 펄펄 뛰며 고함을 지르는 것을 들었을 뿐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여자를 여태 내 집에 뒀다니. 우리 아현이 알기 전에 썩 내 집에서 나가!]
“안 가고 싶은데, 이모도 어쩔 수가 없어.”
수연은 눈물을 글썽였다.
“이거 받아, 시현아.”
꽤 두툼한 돈뭉치를 꺼내는 수연을 보고, 시현은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수연이 마지막 월급조차 못 받고 쫓겨나는 길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너 작은엄마한테 생리대값 달라고 얘기 못 하잖아. 이거면 꽤 오래 쓸 수 있을 거야.”
뒤로 감춘 시현의 손을 끌어다가, 수연은 강제로 돈을 쥐여주었다.
“자리 잡거든 이모가 꼭 연락할게. 그때까지 공부 열심히 하고, 응?”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는 시현을 꼭 끌어안고, 수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견뎌야 해, 시현아. 이모도 견딜게.”
* 길을 걸으면서도 두 여자는 서로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자리 잡으면 연락한다고 해놓고 왜 안 했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여러 번 전화했었는데 안 바꿔 주더라. 집으로 찾아도 갔는데, 네 얼굴도 못 보고 사모님한테 쫓겨났어.”
시현은 놀랐다. 여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일자리 구하는 게 쉽지 않아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그만 전화번호 적은 쪽지도 잃어버렸어. 정말 미안해, 시현아.”
여태 훌쩍이는 시현의 손을, 수연이 꼭 잡아주었다. 수연은 현재 혼자서 작은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다. 심지어 위치는 시현이 사는 원룸 바로 근처였다. 오늘은 마침 쉬는 날이라고 하면서도 수연은 자기 식당으로 시현을 데려갔다. ‘엄마손 카레’라는 깔끔한 노란색 간판의 작은 가게였다. 잠긴 식당 문을 여는 수연에게, 시현이 말했다.
“쉬는 날인데 괜히 제가 귀찮게 해드리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우리 시현이 내 손으로 밥 한 끼 해 먹여야지.”
테이블이 네 개, 그리고 조리실과 마주한 위치에 기다란 바가 설치된 작은 가게였다. 유리벽 안의 테이블마다 예쁜 전등이 달려 있고, 새하얀 커튼이 달린 창가에 작은 화분이 조르르 놓여 있는 것이, 식당이라기보다는 마치 카페 같은 느낌이 났다. 가게 안은 얼마 안 가 맛있는 카레 냄새로 꽉 찼다.
“시현이 지금도 새우튀김 좋아하니?”
“그걸 여태 기억하고 계셨어요?”
“그럼.”
새하얀 머릿수건을 두른 수연이, 튀김옷을 입힌 새우를 끓는 기름 안에 넣으며 웃었다. 이모는 여태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아까 그렇게 울어 놓고, 시현은 또다시 코끝이 시큰해졌다. 잠시 후 수연은 바에 앉아 있는 시현의 앞에 카레 접시를 내려놓았다. 먹음직스러운 카레 위에, 갓 튀긴 새우가 다섯 마리나 올라앉아 있었다.
“와, 맛있겠다. 근데 이건 너무 많아요.”
“우리 시현이는 한창 나이인데 많이 먹어야지.”
벌써 서른셋인 자신을 여태 아이 취급하는 수연이 우스워서 시현은 웃었다.
“잠깐만요. 제가 올해 서른셋이니까 이모가…….”
“시현이랑 나랑 띠가 같잖아. 열두 살 위니까 마흔다섯이지.”
시현은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그러면 입주가정부로 들어왔을 때는 스물둘, 헤어질 때도 겨우 스물아홉밖에 안 됐던 것이다. 그때는 시현도 어려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말 젊디젊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남의 집 입주가정부 노릇을 했다니. 수연의 인생도 평탄하지는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모는 진짜 젊어 보이세요. 겉으로 보기엔 마흔도 안 돼 보여요.”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곱게 묶은 긴 머리에 가느다란 몸매, 갸름한 얼굴. 웃을 때 눈가에 고운 주름이 보이는 것만 빼면 정말로 수연은 30대 중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옷만 좀 더 젊은 스타일로 입으면 더 어리게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얘는. 젊어 보인다는 말 들으니까 진짜 늙은 것 같잖아?”
곱게 눈을 흘기며 웃는 수연에게, 시현은 물었다.
“이모, 결혼 안 했죠?”
“응.”
역시나, 하고 시현은 생각했다. 사십 대 중반에 들어섰는데도 여태 중년 여성 특유의 느낌이 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근데 왜 가게 이름은 엄마손 카레예요?”
수연의 고운 얼굴에 잠시 그늘이 졌다.
“……그냥. 나도 언젠가는 엄마라고 한 번만 불려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영상 통화인 것을 알고, 태하는 짧게 한숨을 쉬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영상통화가 연결되며, 태하와 닮은 얼굴을 한 남자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갈색 머리에 같은 색깔의 눈동자를 가진 미남은 바로 태하의 친아버지, 레온 케네디였다.
- 아들, 잘 있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