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놈은 바람을 피우고 있다2021.11.30.
- 아들, 잘 있었니?
반갑게 부르는 아버지를 향해, 태하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네.”
올해 한국 나이로 마흔다섯 살인 레온은 기껏해야 삼십 대 중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에게서 ‘아들’이라고 불릴 때마다 태하는 여태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차마 아버지라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웬일로 전화를 하셨어요?”
- 이번에 서울에 있는 호텔을 하나 인수할까 하거든.
레온의 말을 듣고 태하는 내심 놀랐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한 달 전인데, 그때보다도 발음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발음과 억양만 빼면 레온의 한국어 실력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완벽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점점 완벽에 가깝게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꾸준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뜻이다.
“갑자기 호텔은 왜요?”
- 너 보러 갈 때마다 호텔 잡기도 귀찮고 해서, 아예 하나 살까 해.
조금 의아스러웠다. 레온이 한국에 오는 것은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정도인데, 그 때문에 일부러 호텔을 인수하겠다니.
- 얘기가 좀 더 진행되면 나도 직접 가서 보겠지만, 우선 네가 가서 어떤지 좀 봐주겠니?
“제가 본다고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태하는 에둘러 거절했다. 개발자인 자신이 호텔 따위에 안목이 있을 리도 없지만, 이쪽도 바쁜 마당에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 호텔 레스토랑이 아주 맛있다더라. 그러니 가서 편하게 저녁식사 하고, 하룻밤 자고 와서 느낌이 어땠는지 정도만 말해 주면 돼. 아버지가 믿을 건 아들밖에 없잖니.
이 긴말을, 레온은 한 번도 더듬지 않고 완벽하게 해냈다. 아버지가 그토록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하도 차마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할게요.”
화면 속의 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 고마워, 아들.
진심으로 기쁜 듯한 얼굴에 태하는 조금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찾은 이후로 십 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태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는 아들을, 레온은 늘 이름 대신 다정하게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태하는 원래 표현이 서투른 성격이었다. 한 번쯤 아버지라고 불러볼까, 하는 생각을 벌써 한참 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생각처럼 입 밖으로 잘 나와주지 않았다.
‘별일도 아닌데요, 아버지.’
오늘이야말로 말해볼까, 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데 레온이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 그래, 시현이하고는 아직도 연락 안 하고?
태하는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네.”
레온은 서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시현이, 보고 싶은데.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입속에서 맴돌던 아버지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 아버지는 시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자신을 빼고 그녀와 따로 만나는 일은 없었겠지. 물론 아버지가 시현에게 전혀 사심이 없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저 어릴 때부터 아들을 돌봐준 고마움 때문에 잘해주었을 뿐이었겠지. 하지만 시현은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면서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아버지가 자신을 무척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남자로서 질투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는 빨리 어른이 되어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다못해 가슴이 타들어갈 것 같았던 시절이라 더 그랬다. 레온은 태하와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다짜고짜 자신이 친아버지라고 하는데도 믿을 수밖에 없었을 만큼. 자신과 닮은 아버지 앞에서 수줍음을 타는 시현을 보면서, ‘나도 나이만 많았더라면’ 하는 생각에 더 화가 났었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좀 더 친밀한 부자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버지도, 시현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다행히 레온은 그쯤에서 시현의 이야기를 멈췄다.
- 방문 날짜를 알려주면 호텔 측에 미리 이야기해둘게. 아, 여자친구하고 같이 가도 좋고.
“혼자 갈게요.”
씁쓸하게 대꾸하자 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 이런, 아들. 아직도 솔로인 거니?
“남 말 하실 때가 아닐 텐데요?”
부루퉁하게 지적하자 레온이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태하를 낳은 어머니와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고, 그 외에는 젊을 때 한 번 결혼했다가 금세 이혼했다는 아버지는 그 후 지금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 그럼 아들, 잘 부탁한다.
* 금요일 저녁, 태하는 퇴근 후에 아버지가 비서를 통해 알려준 호텔로 향했다. 아버지는 일정을 미리 알려주면 호텔 측에 얘기하겠다고 했지만 일부러 거절했다. 공식적으로 방문한다고 하면 분명히 이것저것 신경을 쓸 테니, 일반 손님으로서 보는 게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호텔 앞에서 내려 로비로 들어서면서 태하는 조금 놀랐다. 비서가 대신 예약해서 알려주는 바람에 호텔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왔는데 건물의 규모로 보나, 로비의 화려한 샹들리에와 웅장한 조형물로 보나, 분명한 특급 호텔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호텔이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할 텐데.’
레온은 매번 호텔 잡기 귀찮아서 그런다고 반쯤 장난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가 성공한 사업가라 해도, 고작 그런 이유로 인수하기에는 너무 일이 크다.
‘혹시 한국에 와서 사업을 하시려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권해도 내가 미국에 가지 않으니까, 혹시 아버지가 오시려는 건 아닐까.
‘함께 살자고 하면 어떡하지?’
아버지가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태하는 가족이라는 게 어떤 건지조차 모르고 평생을 살아온 몸이었다. 이제 와서 아버지와 같이 살게 된다면 무척 불편할 것 같다. 괜히 복잡해지는 기분을, 태하는 얼른 고개를 저어 떨쳐버렸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데, 벌써부터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레온은 태하가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친권을 행사해서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데려갔겠지. 체크인만 해 놓고 태하는 곧바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는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평일 저녁인데도 테이블은 거의 다 차 있었다.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대부분 커플들이고 혼자 앉아 있는 것은 오로지 태하뿐이었다. 별로 남의 눈을 의식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혼자만 덩그러니 앉아 있자니 어색해졌다.
‘같이 올걸 그랬나.’
자연스럽게 태하는 시현을 떠올렸다. 사실대로 사정을 얘기하고 부탁하면 저녁식사쯤은 같이 해줬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생각하다 그만 씁쓸해졌다.
[죄송하지만 앞으로 서로 집에 오가는 건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 약혼자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요.]
아, 참. 거리 두자고 했었지. 잠시 후 예쁜 전용 접시에 담긴 아뮤즈 부쉬가 나오면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나오는 요리마다 하나하나 맛이 훌륭해서 더욱더 시현의 생각이 간절해졌다. 아버지의 부탁을 떠올리며 태하는 어떻게든 평가자의 시선으로 식사를 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태 컴퓨터만 끼고 살아온 그로서는 도저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맛은 훌륭하고, 서비스는 친절하고, 분위기마저 나무랄 데가 없다. 태하는 문득 깨달았다.
[호텔 레스토랑이 아주 맛있다더라.]
어떤지 좀 봐달라는 건 핑계고, 아버지는 그냥 자신에게 맛있는 밥 한 끼 먹여주고 싶었던 거라는 사실을. 쓴웃음이 나왔다. 레온은 자신과 달리 무뚝뚝한 편은 아닌데도, 표현이 서투른 점은 마찬가지라는 게 느껴져서였다.
‘아버지를 닮은 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태하는 식사를 계속했다. 혼자 앉아 식사하자니 어색한데, 그렇다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식사할 만한 분위기도 아니다 보니 저절로 여기저기 시선이 갔다. 그러다 대각선에 있는 창가 자리에 앉은 커플을 보고, 태하는 저도 모르게 가리비 구이를 자르던 손을 멈췄다. 이쪽을 향해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이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음?’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아도 틀림없었다. 바로 며칠 전에 본 얼굴이었다. 김우진. 강시현의 약혼자. 태하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김우진은 마주 앉은 여자를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
“샴페인 한 병 더 할까?”
이거 놓으라며 시현을 매섭게 내동댕이칠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여자는……. 이쪽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시현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남녀가 둘이서 식사를 하고 있다고 해서 꼭 특별한 사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데 금요일 저녁에 이런 고급 식당에서 샴페인까지 마셔 가며 식사를 할 것 같지도 않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태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강시현을 연인으로 두고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세상에 그런 멍청한 놈이 존재할 리가 있나. 그러나 두 남녀는 언뜻 보기에도 친밀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김우진은 시종일관 기분이 좋아 보였고, 간간이 여자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저 남자가 시현의 약혼자라는 것을 몰랐다면 당연히 연인 사이로 보았을 것이다. 식사 내내 태하는 온 신경을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맛도 느끼지 못한 채 대충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무작정 기다렸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드디어 저쪽도 식사를 마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마침 태하가 앉아 있는 테이블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잘 먹었어요, 오빠.”
애교스럽게 말하는 여자를, 태하는 슬쩍 냅킨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올려다보았다.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이쪽도 얼굴이 낯설지 않은 것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먼저 나가고 나서 태하는 잠시 후 뒤를 따라 식당을 나왔다. 저만치에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뒷모습이 보여서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역시나, 그랬던 것이다. 곧 결혼한다고, 팀원들 앞에서 환한 얼굴로 이야기하던 시현의 표정이 떠올라서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만약에 그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우진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싶은 것을 참느라, 태하는 이까지 악물고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이 숙박객 전용 카드키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태하는 돌아섰다. 그대로 리셉션으로 향해서 아까 받은 카드키를 내밀었다.
“사정이 생겨서, 지금 바로 체크아웃 부탁합니다.”
차마 저들과 같은 건물에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태하는 호텔 숙박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하필이면 시현을 딱 마주쳐버렸다.
“어, 태하야. 이제 퇴근했어?”
차마 시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태하는 시선을 돌려 외면했다. 그런데도 시현은 또다시 살갑게 물었다.
“저녁은 먹었고?”
“앞으로 나하고 서로 모른 척하자고 하지 않았나?”
그따위 쓰레기 같은 약혼자 놈 때문에 서로 왕래도 하지 말자는 소리를 들은 걸 생각하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서, 그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에이, 왜 그래. 우진 오빠가 괜히 오해할 수 있으니까 서로 집까진 오가지 말자고 한 거지, 얘기도 하지 말자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어떤 사인데.”
시현은 어떻게든 태하를 달래려고 했다.
“떡볶이, 나 혼자 먹긴 너무 많아서 그런데. 좀 나눠줄까?”
시현이 아이를 꾀듯 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지금 떡볶이나 먹고 있을 땐가, 싶어서 태하는 또다시 퉁명스럽게 물었다.
“웬 떡볶이야?”
“오늘 원래 오빠랑 저녁 먹기로 했는데, 갑자기 야근을 하게 됐대. 미안하다고 아까 퇴근하는 길에 일부러 사다주고 가더라.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 다정하다니까.”
자랑하듯 말하는 시현을, 태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다른 여자와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샴페인을 마시는 주제에, 결혼할 여자한테 사다 준다는 게 겨우 떡볶이라니. 그런데도 이 여자는, 그런 남자가 다정하다고……! 태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비닐봉지를 홱 빼앗아 들었다. 그대로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공용 쓰레기통에 봉지째 처박아버렸다.
“태하야?”
쓰레기통에 처박힌 떡볶이 봉지를, 시현이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