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바람의 이유2021.12.03.
태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비닐봉지를 홱 빼앗아 들었다. 그대로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공용 쓰레기통에 봉지째 처박아버렸다.
“태하야?”
쓰레기통에 처박힌 떡볶이 봉지를, 시현이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 지금, 뭐 하는…….”
당황해서 더듬는 그녀를 향해, 태하는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구느냐고. 당신한테 야근한다고 거짓말을 해 놓고, 그놈이 지금쯤 호텔방에서 누구와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나 아느냐고. 다른 여자와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남자에게, 떡볶이 따위를 받고 기쁜 얼굴 하고 있을 때냐고!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그렇듯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한다고 믿어줄지도 알 수 없었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
결국 태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는 봉지를 도로 건지려 쓰레기통에 손을 뻗는 시현을 몸으로 가로막아 섰다.
“떡볶이 말고 다른 거 말해. 먹고 싶은 거 뭐든지 다 사줄 테니까.”
하지만 시현은 이미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너 미쳤어? 뭐 하는 짓이야, 멀쩡한 음식을 가지고!”
“더 좋은 것도 많은데 떡볶이 같은 거나 먹고 있지 말란 말이야.”
“떡볶이가 어디가 어때서? 맛만 있는데!”
이미 쓰레기통에 들어간 떡볶이에 끝까지 집착하는 여자가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세상에는 더 좋은 것도, 비싼 것도, 맛있는 것도 많은데 대체 왜!
“제발 정신 좀 차려.”
답답한 나머지 태하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이러니까 결혼할 사람한테 겨우 떡볶이 취급밖에 못 받고 있는 거잖아!”
순간 시현은 정지 화면 같은 표정을 했다.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해서, 그제야 태하는 말이 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더듬거리며 변명하려 했지만 시현은 이미 고개를 돌린 후였다.
“됐어.”
* 토요일 아침. 호텔 침대 위에 두 남녀가 뒤엉켜 잠들어 있었다. 간밤에 있었던 일을 증명하듯, 침대 시트는 마구 구겨져 있었다. 먼저 눈을 뜬 것은 여자 쪽이었다. 날씬한 몸 위에 가운을 걸치고, 여자는 거울 앞에 서서 긴 머리를 빗어 내렸다.
“보라야.”
머리를 빗는 보라를 뒤에서 껴안고, 우진이 목덜미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희고 가느다란 목에는 지난 화이트데이에 선물한 클로버 모양의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결혼할까?”
보라는 픽 웃으며 되물었다.
“강 대리님은 어쩌고요?”
“어차피 하는 결혼,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고 싶어. 그게 시현이한테도 예의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예의 운운하는 남자에게 웃음이 나왔다. 예의라는 걸 아는 인간이, 자기 약혼녀의 가장 친한 후배와 호텔에서 뒹굴고 있단 말이야? 보라는 우진의 팔을 기분 나쁘지 않게 살짝 풀어냈다.
“저 강 대리님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오빠. 강 대리님한테 못 할 짓 하고 싶지 않아요.”
안타까운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다. 만나주는 것도 황송하게 생각해야 할 남자가, 감히 결혼씩이나 꿈꾸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주제를 모를 수가 있을까? 외모도 그럭저럭, 키도 그럭저럭, 나이는 아홉 살이나 위인 남자. 서른다섯씩이나 먹고 결혼하면서 제대로 된 집 한 칸 마련할 능력이 없는 남자. 겨우 이백만 원짜리 목걸이 하나 사주고는 만날 때마다 어울린다는 말로 굳이 생색을 내는 남자. 심지어 침대에서조차 더럽게 매력이 없는 남자. 어디 한 군데 눈에 차는 곳이라고는 없는데도 보라가 김우진을 만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강시현의 남자이기 때문에. 강시현은 딱 사람만 보면 그다지 싫은 타입이 아니었다.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는 선배라고 생각한다. 아마 윤태하가 아니었다면 진짜 좋은 선후배 사이로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윤태하가 오래전부터 바라보는 여자가 바로 강시현이었다는 것이다. 보라는 태하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바보 같은 윤태하는 기억조차 못 하고 있지만. 당시 윤태하는 학교에서 왕자님 같은 존재였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아버지가 미국 명문가 출신의 대부호라고 했다. 그 소문을 뒷받침하듯, 태하는 아침저녁으로 운전기사가 딸린 멋진 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외모마저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의 아버지가 미국 명문가 출신인 이상, 혼혈이라는 것은 오히려 귀족의 혈통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런 태하에게 보라가 관심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윤태하가 학교의 왕자님이라면 이보라는 공주님이었으니까. 보라의 생각에 둘이 사귀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태하는 아무리 기다려도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숫기가 없는 성격인가 싶어서 보라는 특별히 먼저 자존심을 굽혀 줬다. 가정부가 만든 도시락을 제가 만든 것처럼 건넸던 것이다.
[이거,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먹어줄래?]
그러나 놀랍게도 태하는 보라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치워.]
도시락은 그대로 면전에서 거절당했다.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었다.
‘대체 네가 얼마나 잘났길래 감히 나한테 이래?’
따질 생각으로 하교 후에 태하의 뒤를 무작정 따라갔다가, 보라는 보았다. 태하가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를 만나서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을. 아마 과외 선생 같았다. 날씬하고 예쁘장하기는 했지만 눈에 확 띄는 미인은 아니었다. 수수한 인상에 차림새도 극히 평범했다. 그 평범한 여자의 얼굴에서, 윤태하는 수업하는 내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보라는 그 여자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강시현이라고 해요. 이 회사에 UX 디자이너는 나하고 이보라 씨 둘뿐이니까, 앞으로 우리 잘해봐요.]
2년 전 입사한 회사에서 우연히 그 여자를 다시 만났을 때, 보라는 결심했다. 이 여자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주겠다고. 시현과 친하게 지내면서 자연히 우진과도 몇 번 마주치게 되었다. 유혹하려고 대단히 뭘 한 것도 없었다. 그저 시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살짝 한 번 웃어준 것뿐인데, 강시현의 남자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넘어왔다. 사실은 결혼을 깨뜨릴 때까지는 계속 만날 생각이었는데, 얼마 전에 보라는 계획을 수정했다. 윤태하가 회사에 나타났기 때문에. 윤태하가 아직도 강시현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안 순간, 김우진은 효용 가치를 잃었다. 만약에 강시현의 결혼을 깨뜨렸다가 자칫 윤태하랑 잘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러니까 보라는 더 이상 둘의 결혼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김우진 따위는 강시현과 결혼하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지만, 누구도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강 대리님 정말 좋은 사람이잖아요. 저보다 오빠랑 훨씬 잘 어울리고요.”
보라는 슬픈 눈으로 거울에 비친 우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오빠, 우리 여기까지만 해요.”
물론 그렇다고 강시현이 행복하게 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마지막까지 보라는 우물에 살짝 독을 타기로 했다. 옷을 챙겨 입고 나서, 보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있잖아요. 만약에 우리가…… 좀 더 빨리 만났으면 어땠을까요?”
“보라야!”
우진은 슬프고 안타까운 눈으로 보라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세기의 사랑을 하는 비련의 남주인공이라도 된 표정이었다. 그래 봐야 그 면상에 어울리지도 않지만. 차마 봐줄 수가 없어서, 보라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깨물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행복하세요, 오빠.”
방을 나오며 보라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마음은 나에게 남긴 채 껍데기만 강시현에게 갈 것이다. 신혼 첫날 밤, 침대 위에서 강시현을 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나를 떠올리겠지. 입속으로 살짝 휘파람을 불며 호텔 복도를 걷는 보라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났지만,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태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다. 그렇게 행동한 데는 분명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이러니까 결혼할 사람한테 겨우 떡볶이 취급밖에 못 받고 있는 거잖아!]
시현도 한참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우진이 처음처럼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뭐든지 처음 같을 순 없는 거니까, 하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면 뭐든 익숙해지는 거라고, 무뎌지는 거라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애써 외면해오던 것을, 정면으로 눈앞에 들이 밀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태하 눈에도 내가 대접받지 못하는 여자로 보인다는 거구나.’
시현은 복잡한 마음으로 주말을 보냈다. 우진은 금요일에 약속을 깨고 떡볶이를 사다주고 나서는, 바쁜지 주말 내내 연락이 없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서도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오늘까지가 태하가 주문한 작업의 제출 기한이라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만 딴생각이 들었다.
“대리님!”
“어, 보라 씨.”
마침 보라가 와서 부르는 바람에, 시현은 그제야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어차피 집중도 잘 안 되는 마당에 보라가 와 주니 반가웠다.
“웬일로 왔어?”
“저야 당연히 대리님 뵈러 왔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보라는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이보라 씨 아냐?”
“여신님이 우리 사무실엔 웬일이야?”
원앱팀은 원래가 개발팀 인원들이 대부분이어서 모두들 보라를 반가워했다. 싹싹하고 밝은 데다 예쁘기까지 한 보라는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저 강 대리님 뵈러 왔어요.”
보라의 말에 팀장이 짐짓 서운한 얼굴을 했다.
“가끔 우리도 좀 보러 오고 그래. 강시현이 저 화상 저거 뭐 볼 거 있다고.”
“팀장님도 참. 우리 강 대리님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보라가 예쁘게 눈을 흘기며 시현의 허리를 살짝 안았을 때였다.
“뭣들 하는 겁니까, 업무시간 중에?”
차디찬 목소리가 날아와서 모두들 찔끔하며 돌아보았다. 언제 왔을까. 윤태하 본부장이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태하의 시선은 보라를 똑바로 향해 있었다.
“이분홍 씨, 어느 팀 소속이죠?”
새파란 불꽃이 이는 시선에, 보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