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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꼬리가 길면 밟힌다 (20/181)

#20. 꼬리가 길면 밟힌다202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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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44679536.jpg“이분홍 씨, 어느 팀 소속이죠?”

새파란 불꽃이 이는 시선에, 보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차마 제 이름을 정정하지도 못하고 보라는 떨면서 대답했다.

1655194467954.jpg“개발팀입니다.”

16551944679536.jpg“원앱팀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동안 개발팀은 아주 한가한 모양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리 비우고 다른 팀 사무실에 와서 이렇게 잡담이나 하고 있는 걸 보면.”

듣는 사람이 다 민망해질 정도로 무서운 질책이었다. 보라의 작은 어깨가 벌벌 떨리는 것을 보고, 시현은 얼른 나섰다.

16551944679547.jpg“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제가 자료 좀 갖다 달라고 불렀다가 그만…… 보라 씨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그러나 태하는 시현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해서 보라를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16551944679536.jpg“당장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요. 그리고 두 번 다신 내 눈에 띄지 말도록.”

1655194467954.jpg“네, 본부장님.”

불쌍한 보라는 입술까지 하얗게 질려서 사무실에서 쫓겨났다. 시현은 태하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잡담을 오래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 건 회사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새 본부장이 무뚝뚝하고 일에 철저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까칠하게 군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는데. 보라를 쫓아내고 나서야 태하는 시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16551944679536.jpg“강시현 대리님, 사용자 로그 분석 끝났습니까? 오늘까지 제출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16551944679547.jpg“거의 정리돼가는 중입니다, 본부장님.”

16551944679536.jpg“늦더라도 오늘 내로 가져오도록 하세요. 기다릴 테니까.”

지시하고 나서, 태하는 등을 돌려 자기 사무실을 향해 가버렸다.

16551944694071.jpg“뭐야, 본부장님 왜 저렇게 급발진이야?”

미주도 놀란 얼굴로 태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현의 귀에 속삭였다. 시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51944679547.jpg“난들 알겠어.”

  *

16551944679536.jpg“……젠장.”

제 사무실로 돌아온 태하는 난폭하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그대로 소파에 털썩 앉자마자 관자놀이를 감싸 쥐었다. 어쩐지 어디서 본 얼굴 같더라니! 금요일 밤에 호텔에서 보았던 그 여자가 틀림없었다. 시현의 약혼자인 우진과 함께 있던.

1655194467954.jpg[팀장님도 참. 우리 강 대리님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바로 그 여자가 시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애교를 떠는 꼴을 보니 눈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16551944679547.jpg[보라 씨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서서 편을 들어 주는 시현을 보자 속이 뒤집혔다. 하는 꼴을 보니 꽤나 친한 사이인 모양인데, 대체 어쩌다가……. 약혼자와, 친한 후배. 시현은 그 두 사람을 꿈에도 의심하지 않는 게 뻔했다. 그걸 이용해서 그녀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태하는 손등에 핏줄이 퍼렇게 돋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는 그녀가 상처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수밖에. * 시현이 드디어 태하가 지시한 사용자 로그 분석을 끝낸 것은 늦은 저녁, 모두 퇴근하고 사무실에 혼자 남았을 때쯤이었다.

16551944679547.jpg“……뭐야.”

분석한 자료를 들여다보며 시현은 한동안 말을 잃고 있었다. 기획 초반에 자료로 넘겨받았던 저니맵은 실제 데이터와는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심혈을 기울여 개선한 기능들이, 실제로는 거의 필요가 없는 것이 태반이었다. 심지어 그것들이 저번 회의에서 태하가 지적했던 것들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데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하나하나 로그를 뒤져보고 나서야 안 걸, 태하는 그냥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알았다는 거 아닌가. 윤태하란 인간이 새삼 다시 보였다. 대단한 줄이야 진작 알았지만 실제로 보니 진짜 능력치가 안드로메다 아닌가. 원래 기획자도 아니고 개발자 출신인데. 자신이 아는 태하가 그 천재 개발자 윤태하라는 걸,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 가슴으로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것 같았다. 방금 제 손으로 만든 분석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시현은 중얼거렸다.

16551944679547.jpg“인간미 1도 없는 자식.”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분은 왠지 상쾌했다.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본부장실로 향했다. 비서는 먼저 퇴근시켰는지 보이지 않아서, 직접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16551944679547.jpg“본부장님, 강시현입니다.”

16551944679536.jpg“들어오세요.”

태하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시현을 바라보았다.

16551944679547.jpg“퍼널 분석 결과 가져왔습니다.”

시현은 프린트한 문서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시현이 내민 종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태하는 시현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마치 결과 따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16551944679536.jpg“분석해보니까 좀 알겠습니까?”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6551944679547.jpg“네.”

16551944679536.jpg“이제 뭘 버려야 할지 감이 잡힌단 말이죠?”

16551944679547.jpg“그렇습니다.”

16551944679536.jpg“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군요.”

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메모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정확하게 휙 던져 넣고, 그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다가왔다.

16551944679536.jpg“필요 없는 것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넣고,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는 것.”

시현은 순순히 수긍했다.

16551944679547.jpg“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태하가 무슨 말을 했던 건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역시 버려야 할 것은 깔끔하게 버리는 게 옳았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4679536.jpg“그건 그렇고, 할 얘기가 있습니다.”

말투는 아까보다 부드러웠지만, 표정은 어딘가 긴장한 것 같았다.

16551944679536.jpg“이건 사적인 용건이니까, 혹시 괜찮다면 밖에 나가서…….”

16551944679547.jpg“그전에 먼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시현은 그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아직 공적인 용무가 끝나지 않았다.

16551944679536.jpg“뭡니까?”

16551944679547.jpg“제가 회사에서 퇴직금 담보대출을 좀 받을까 해서요. 부서장 인가가 필요해서 팀장님께 여쭤보니 본부장님께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태하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16551944679536.jpg“담보대출이 갑자기 왜 필요합니까?”

16551944679547.jpg“사정이 생겼습니다.”

16551944679536.jpg“그러니까 무슨 사정?”

사유를 말하지 않으면 안 해 줄 기세였다. 잠시 망설이다 시현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16551944679547.jpg“이건 사적인 얘기니까 그냥 편하게 말할게.”

짧게 한숨을 쉬고, 시현은 말했다.

16551944679547.jpg“시부모님 되실 분들이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 봐.”

태하는 대단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16551944679536.jpg“그래서?”

16551944679547.jpg“그래서 예단이라도 좀 해가야 할 것 같은데, 가진 돈은 다 전세금으로 넣기로 해서 여윳돈이 하나도 없거든.”

16551944679536.jpg“예단?”

16551944679547.jpg“여자가 결혼할 때 시댁에 드리는 선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16551944679536.jpg“그렇게까지 결혼을 해야 해?”

태하는 날카롭게 물었다.

16551944679536.jpg“맨손으로 고춧가루나 만지게 만드는 사람들한테, 예쁘게 봐달라고 선물까지 바쳐가면서?”

시현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16551944679547.jpg“나도 속상해. 근데 결혼을 안 할 거면 모를까, 할 거면 해가는 게 좋다고 다들 그러잖아.”

태하가 팔짱을 낀 채 시현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한심하다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그가 그렇게 쳐다봐서일까, 아니면 자격지심일까.

16551944679536.jpg“미처 몰랐네. 강시현이 이렇게 결혼에 목매다는 여자였는지.”

시현은 그만 울컥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해도, 태하만은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16551944679547.jpg“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시현은 호소하듯 말했다.

16551944679547.jpg“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잖아. 다 봤잖아, 어릴 때부터.”

16551944679536.jpg“…….”

16551944679547.jpg“난 평생 내 자리라는 걸 가져보지 못했어. 아현이가 자기 부모랑 가족여행 갈 때 나는 가정부 아줌마랑 집 지켰고, 하다못해 치킨을 시켜도 한 조각 얻어먹어본 적이 없었어. 그래서 언젠가는 꼭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서, 어엿한 내 가정이란 걸 가져보고 싶었어.”

말을 토해내듯 빠르게 뱉어내다,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바람에 말문이 턱 막혔다. 울음을 삼키느라 이를 악물고, 시현은 물었다.

16551944679547.jpg“서른셋이면 그럴 때도 됐잖아.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니?”

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든 깊은 눈동자로,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편을 들어주지 않는 태하가 서운해서 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언제든, 무슨 일이든 네 편이 될 텐데. 왜 너는……! 따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시현은 등을 돌렸다.

16551944679536.jpg“잠깐, 내 말 듣고 가.”

그제야 태하가 팔을 붙잡았지만 시현은 힘주어 팔을 빼냈다.

16551944679547.jpg“나중에 얘기하자.”

시현은 그대로 돌아보지도 않은 채 태하의 사무실을 나왔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울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누나가 돼서, 동생 앞에서 우는 건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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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사를 나와 버스정거장으로 향하며 시현은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가 툭 치면 그냥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무슨 일인지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계속 통화 중이라는 응답만이 돌아왔다. 그래도 꼭 지금 당장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시현은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16551944749831.jpg- 어, 시현아.

다섯 번이나 전화를 한 끝에야 우진은 겨우 전화를 받았다.

16551944679547.jpg“계속 통화 중이던데, 무슨 일 있어?”

16551944749831.jpg- 일은 무슨. 저기 그…… 거래처랑 통화했지.

퇴근시간 한참 지났는데 웬 거래처일까. 시현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진이 물었다.

16551944749831.jpg- 근데 웬일이야?

웬일이냐는 물음에 시현은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 원래는 ‘있잖아, 우리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지?’ 하고 묻고 싶었다. 며칠 전에 태하 때문에 싸운 건 이미 화해했고, 원하는 대로 예단도 해가기로 했으니까. ‘당연하지,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어?’ 하는 말을 우진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그런데 웬일이냐는 질문을 받고 보니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일이 있어야 통화하는 사이였던가, 우리가. 결국 시현은 원래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16551944679547.jpg“오빠 혹시 내일 시간 되나 해서. 작은아버지 댁에 인사…….”

갑자기 우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16551944749831.jpg- 어, 시현아. 나 지금 전화 들어온다. 미안, 내가 금방 다시 전화할게!

그렇게 말하자마자 전화가 뚝 끊겼다.

16551944679547.jpg“…….”

끊겨버린 전화기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자니 씁쓸함이 밀려왔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왜 자꾸만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걸까. 길게 한숨을 쉬고 다시 버스정거장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문득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16551944764196.jpg“아니, 이게 누구야?”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남자가 시현을 향해 반갑게 다가왔다.

16551944764196.jpg“김우진 과장 예비 사모님 아니신가?”

시현은 금세 상대를 알아보았다. 바로 우진과 같은 부서의 직속 상사였다. 회식 때 우진이 너무 취해서 데리러 갔다가, 그의 동료들을 마주쳐서 인사를 한 적이 있어서 얼굴이 기억이 났다. 우진의 회사와는 워낙 가까우니 길에서 마주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16551944679547.jpg“안녕하세요, 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현은 얼른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16551944764196.jpg“곧 결혼한다지? 축하해요. 우리 김 과장이 참 복이 많아.”

16551944679547.jpg“감사합니다.”

대답하다 시현은 문득 떠올렸다. 얼마 전에 우진이 부장님 심부름으로 목걸이를 사러 백화점에 갔었던 일을.

16551944679547.jpg“부장님도 결혼 20주년 축하드립니다. 사모님께 멋진 선물도 하시고, 부러워요.”

16551944764196.jpg“음? 무슨 선물?”

상대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16551944764196.jpg“그리고 우리 와이프하고는 결혼한 지 이제 15년밖에 안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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