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 여자, 언제부터 만났어?2021.12.10.
“부장님도 결혼 20주년 축하드립니다. 사모님께 멋진 선물도 하시고, 부러워요.”
“음? 무슨 선물?”
상대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우리 와이프하고는 결혼한 지 이제 15년밖에 안 됐는데……?”
시현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분이 아니라 다른 부장님 얘기였나? 그러나 우진의 말을 다시 떠올려 봐도 분명히 눈앞에 있는 이 사람 이야기였다.
[우리 부장님 심부름 간 거였는데. 결혼 20주년이라고, 사모님한테 선물하신다고 해서.]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시현은 얼른 억지로 웃어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부장님. 다른 분과 헷갈린 것 같아요.”
“거 김 과장도 참. 팀에 부장이라곤 나 하난데, 누구랑 헷갈렸길래, 하하.”
“아니에요.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시라고, 나중에 우진과 함께 인사드리겠다고 의례적인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 시현은 상대와 헤어졌다. 몇 걸음 걷다가 시현은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길 한복판에,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밑에 대리나 사원도 여럿 있을 텐데, 왜 하필 과장씩이나 되는 사람한테 심부름을 시켰을까? 게다가 그런 개인적인 심부름을, 휴일에? 백화점에서 목걸이를 샀다는 것은 우진도 시인했으니까, 산 것만은 확실한데……. 문득 싸늘한 것이 가슴께를 스쳐갔다.
‘설마 다른 여자가 있는 거야?’
여태 시현은 우진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둘 다 바쁜 직장인이어서, 일과 연애를 병행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다리를 걸치려 해도 시간이 없을 거였고, 무엇보다 우진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일단 그쪽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자 수상한 점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우진은 언젠가부터 계속 일이 바쁘다며 심지어 주말에까지 출근한다고 했었다.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야근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하기도 했다. 시현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중에도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잠깐 자리를 비울 때도 꼭 휴대폰을 챙겨서 갔던 것 같기도……. 거기까지 생각하다 시현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말도 안 돼. 우진이 자신을 속일 리가 없다.
‘마음이 떠난 사람이 결혼 진행 따위를 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다른 부장님 얘기였을 거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우진은 부서를 두 번인가 옮긴 적이 있으니까, 예전 부서에 있던 상사를 ‘우리 부장님’이라고 말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잘한다, 강시현. 회사 일 때문에 가뜩이나 힘든 사람을, 의심까지 하고 있고.’
애써 잡념을 떨쳐 버리고 시현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녀의 옆을, 차들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줄지어 스쳐지나갔다. * 상가 모퉁이에 있는 작은 가게, ‘엄마손 카레’는 아홉 시면 어김없이 문을 닫는다. 하지만 오늘은 ‘close’ 표시를 달아두고도 밤 열 시가 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안에서는 두 여자가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있잖아요, 이모.”
소주잔을 홀짝 비우고 내려놓으며, 시현은 중얼거렸다.
“남들 다 하는 결혼, 저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시현의 빈 잔을 채워주며 수연이 살며시 눈을 흘겼다.
“얘가 정말. 사십이 훌쩍 넘도록 시집 못 간 사람 앞에서 별말을 다 한다.”
“이모도 결혼을 못 한 건 아닐 거 아녜요. 안 한 거지.”
수연은 아직도 젊고 아름다웠다. 여태 혼자인 게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좋다는 남자가 없었을 리 없다고 시현은 확신했다. 어릴 때 7년 동안이나 서로 의지하고 지냈던 사이여서일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났는데도 수연과는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건 수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서른이 넘은 시현을, 수연은 마치 어릴 때 그대로인 것처럼 대했다. 퇴근하고 가게에 들르면 ‘아유, 우리 시현이 배고프겠다.’ 하며 얼른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앞에 놓아주곤 했다. 그런데도 결혼할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수연에게조차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입 밖으로 내버리면 자칫 진짜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시현은 어떻게든 우진을 믿으려 애썼다. 절대 바람은 아닐 것이다. 단지 우진이 요즘 자신에게 소홀해진 게 느껴져서, 섭섭함이 쌓이다 보니 그런 생각까지 드는 것뿐이다.
“원래 다 그런 거겠죠? 아무리 뜨겁게 사랑했던 사이도 세월이 지나면 무뎌지고,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소홀해지기도 하고…….”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우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고. 원래 시간이 지나면 다 그렇게 변해가는 거라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시현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글쎄,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수연이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중얼거렸다.
“난 지금도 그 사람을 떠올리면 여태 처음 만난 순간처럼 가슴이 뛰거든.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럴 것 같아.”
시현은 놀라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모도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요?”
“그럼. 나라고 젊었을 때 연애 한번 못 해봤을까 봐?”
“어떤 사람이었어요? 왜 헤어졌는데요?”
수연은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오래 함께하다 보면 그야 익숙해질 수는 있겠지. 편안해질 수도 있고. 하지만 소홀함을 느낄 정도라면 그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수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시현에게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6년은 사람이 변해버릴 정도로 긴 세월이 아니야.”
애정이 담긴 눈으로, 수연은 시현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앞으로 몇십 년을 함께해야 할 사람이잖아. 시현이가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난.”
* 수연의 가게를 나와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시현은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저녁 무렵에 급히 전화를 끊으며 ‘내가 금방 다시 전화할게’ 했던 남자는 여태 아무 연락도 없었다.
- 어, 시현아.
우진이 전화를 받자마자 시현은 용건을 말했다.
“내일 저녁에 좀 보자, 오빠. 할 얘기 있어.”
- 미안해, 내일은 내가 일이 좀…….
매번 되풀이되는 뻔한 핑계를, 시현은 단칼에 잘라냈다.
“시간 많이 뺏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 나와. 퇴근 후에 내가 그쪽으로 가서 전화할게.”
할 말을 하자마자 전화를 끊고, 시현은 심호흡을 했다. 그래. 진실이 어느 쪽이든, 빨리 아는 것이 낫다. *
[우리 여기까지만 해요.]
고급 호텔에서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날벼락처럼 보라에게 이별 선언을 당한 우진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강 대리님한테 못 할 짓 하고 싶지 않아요.]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시현 때문이라는 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만약에 우리가…… 좀 더 빨리 만났으면 어땠을까요?]
쓸쓸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보라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이제는 시현이 귀찮은 방해꾼처럼 느껴졌다.
‘강시현, 너만 아니었으면!’
당분간 꼴도 보기 싫어서 만나자는 말에 바쁘다고 핑계를 댔는데, 웬일인지 시현은 오늘은 꼭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회사 앞까지 왔다. 어쩔 수 없이 우진은 퇴근 후에 시현을 만났다. 늘 보는 수수한 슬랙스 차림에 짜증부터 났다. 날도 화창한 봄날인데 좀 밝은색으로, 상큼하게 스커트도 좀 입고 그러면 얼마나 좋은가. 보라처럼. 가는 길에 시현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왔다. 거친 손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보라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손과 확 비교돼서 또다시 짜증이 치밀었다. 어쩜 이렇게 이보라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까.
“어유, 벌써 날이 더워지네.”
우진은 핑계를 대서 은근히 시현의 손을 놓아버렸다. 내키지 않는 것을 참고 카페에 마주 앉았는데 앉자마자 한다는 말이 또 재촉이었다.
“이제 오빠가 우리 작은아버지 댁에 인사드릴 차례잖아. 날짜는 언제가 좋겠어?”
그놈의 결혼 타령! 짜증이 치밀어서, 우진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부모도 아닌데 꼭 인사까지 드려야 해?”
시현이 입을 꾹 다문 채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우진은 그제야 실언을 했음을 깨닫고 얼른 수습했다.
“아니, 너 어릴 때부터 가정부 취급했다며, 그 사람들이. 그런데 내가 찾아뵙고 인사를 하고 싶겠어? 얼굴만 봐도 화날 것 같아서 그래.”
“어쨌든 보육원에 안 보내고 키워주신 건 사실이잖아. 대학교 등록금도 대주셨고. 그러니까 결혼 전에 인사는 드려야지.”
“좀 있어봐. 요즘 일이 바빠서 도통 시간이 안 나.”
물론 꿍꿍이는 다른 데 있었다. 우진은 아무래도 보라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결혼식은 최대한 미루고, 그사이에 어떻게든 보라를 설득해서 갈아타는 게…….
“오빠, 혹시 나랑 결혼하기 싫어?”
시현이 불쑥 물었다.
“그런 거면 지금이라도 얘기하고.”
우진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쩐지 오늘은 처음부터 좀 기색이 평소랑 다르더니만. 미련한 곰인 줄만 알았는데 뭔가 눈치를 챘나? 물론 강시현이 아닌 이보라와 결혼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어리고, 예쁘고, 집안까지 좋은 여자 아닌가. 하지만 강시현과 달리 이보라는 잡은 토끼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이별선언 후, 보라는 그가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고 있었다. 만약에 이런 상황에서 시현을 차고 보라에게 갔다가, ‘강 대리님한테 죄송해서 안 되겠어요’ 하고 거절당하게 되면 그거야말로 낭패다. 이보라만은 한참 못하지만, 강시현만 한 결혼 상대도 찾기 힘든데. 성격 좋고, 알뜰하고, 직장도 좋고, 뭐 사달라는 둥 기념일 챙겨달라는 둥 귀찮게 굴지 않고. 강시현은 딱히 흠잡을 데가 없는 여자였다. 자신도 이제 서른다섯이나 됐으니 슬슬 결혼을 하기는 해야 할 텐데, 자칫 잘못하면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둘 다 놓치는 꼴이 되는 수가 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겨 보고 나서, 우진은 억지로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런 거 아냐. 진짜 바빠서 그런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응?”
* 사실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혹시 오빠 나 몰래 다른 여자 만나는 거야?’
그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서, 끝내 시현은 우진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얼른 마시고 일어나자. 나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 돼.”
남은 커피를 서둘러 마시다 우진은 그만 실수로 커피를 엎질렀다. 다행히 아이스 커피여서 화상은 입지 않았지만, 양복바지가 젖어버렸다.
“아이, 씨.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우진이 투덜거리며 일어서서 카페를 나갔다. 바지 때문에 급해서 깜빡했는지, 웬일로 휴대폰을 그대로 놔둔 채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우진의 휴대폰을 보며 시현은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무턱대고 의심만 키워 가느니 차라리 내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게 낫다. 확인해보고 나서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자고 생각하고, 시현은 우진의 휴대폰에 손을 댔다. 다행히 잠금 패턴은 시현이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딱히 보안에 신경 쓴 느낌은 아니어서, 역시 내가 넘겨짚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메신저부터 확인해보았지만 별 의심 갈 만한 내용은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업무용으로 쓰는 부서 단체 채팅방과 대학 시절 동기 채팅방, 가족 채팅방 같은 것들이고, 개인 채팅도 모두 친구나 동료들이었다. 이어서 시현은 문자 메시지 메뉴에 들어갔다. 여기도 누군가와 연락하고 있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카드 결제 내역이 그때그때 문자로 와 있었다. 백화점에서 목걸이를 산 것이 화이트데이 전 주말이었다고 했으니까, 대충 3월 14일에서 며칠 전일 텐데……. 편의점이나 식당 등에서 소소하게 결제한 내역이 계속되다, 큰 금액이 눈에 띄었다. [Web발신] 03/11 13:07 승인 미래백화점 김*진 2,000,000원 할부 24개월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목걸이는 작은 사이즈도 이백만 원은 한다’던 미주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심부름이라면 자기 카드로 샀을 리가 있을까. 그것도 할부로.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시현은 눈을 감아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고함소리에 눈을 뜨자 우진이 황급히 시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너 왜 남의 핸드폰을 허락도 없이 막 보고 그래? 예의 없이!”
얼굴까지 시뻘게져서 버럭 화를 내는 남자를, 시현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 6년 동안 그녀가 알고 있던 남자와는 사뭇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오빠.”
시현은 조용히 물었다.
“그 여자, 언제부터 만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