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고백 (22/181)

#22. 고백20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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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44958317.jpg“오빠.”

시현은 조용히 물었다.

16551944958317.jpg“그 여자, 언제부터 만났어?”

16551944958327.jpg“그, 그 여자라니?”

얼마나 놀랐는지, 우진은 말까지 더듬었다.

16551944958317.jpg“오빠가 화이트데이에 목걸이 선물한 여자 말이야.”

16551944958327.jpg“무슨 헛소리야? 말했잖아, 그건 우리 부장님이 심부름으로…….”

16551944958317.jpg“그 부장님, 어제 내가 길에서 우연히 만났어. 그런 적 없다고 하시던데?”

방금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우진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사람 얼굴이 신호등도 아닌데 색깔이 막 변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리는 것이, 변명을 떠올리고 있는 게 뻔했다.

16551944958317.jpg“아니면 혹시 다른 부장님 얘기였어?”

16551944958327.jpg“그, 그게…….”

16551944958317.jpg“그런 거면 얘기해. 내가 그분 찾아뵙고 직접 여쭤볼 테니까.”

더는 물러날 데가 없다고 판단한 걸까. 갑자기 우진이 팔을 붙잡고 매달려왔다.

16551944958327.jpg“잘못했어, 시현아!”

방금까지 왜 남의 핸드폰을 보느냐고 벌컥 화를 냈던 남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돌변해서 싹싹 빌었다. 카페 안의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이쪽을 쳐다보았지만 우진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16551944958327.jpg“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우진은 시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호소했다.

16551944958327.jpg“우리 벌써 6년이나 만났잖아. 나도 어쩔 수 없이 남자라, 오랜만에 설레는 감정이 좋더라. 그래서 잠깐 눈이 돌아갔었나 봐.”

16551944958317.jpg“누구야, 그 여자?”

잠시 머뭇거린 후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16551944958327.jpg“거래처 여직원이야. 그냥 만나서 밥 몇 번 먹은 게 다야. 정말이야, 그 이상 아무 일도 없었어.”

해명이랍시고 하는 말이 오히려 더 씁쓸했다. 만나서 밥 몇 번 먹은 여자한테 명품 목걸이를 선물하면서, 나한테는 핸드크림이나 던져주면서 비싼 거라고 생색을 냈구나. 당신한테 나는 겨우 그 정도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목걸이로 프러포즈를 받는 줄 알고 들떠서 나갔던 자신을 생각하자, 이상하게 눈물 대신 웃음이 났다. 허공을 바라보며 피식피식 웃는 시현을 보고, 우진은 덜컥 겁이 난 모양이었다.

16551944958327.jpg“그렇지 않아도 너 속이는 거 나도 힘들어서, 벌써 정리했어. 우리 엄마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겨우 이 정도 일로 나 버릴 거 아니지? 응? 시현아.”

우진은 시현의 손을 꼭 붙잡고 애원했다. 여기저기서 호기심 어린 눈길이 느껴져서, 시현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잡힌 손을 빼며, 시현은 우진을 외면한 채 말했다.

16551944958317.jpg“오늘은 그만하자. 나중에 다시 얘기해.”

16551944958327.jpg“시현아!”

16551944958317.jpg“진짜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나. 생각이 좀 정리되면 연락할게.”

안타깝게 부르는 우진을 뒤로하고, 시현은 도망치듯 카페를 나왔다. * 시현이 카페를 나가고 난 후, 우진은 자리에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16551944958327.jpg“난 또, 다 걸린 줄 알았네.”

아마 카드결제 내역을 본 모양인데, 보고도 딱 목걸이 얘기만 하는 게 우스웠다. 하여튼 둔하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자다. 자세히 보면 호텔이니 레스토랑이니, 걸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겨우 그거 하나만 봤다니. 다행히 호텔까지는 들키지 않아서, 그냥 밥 몇 번 먹은 게 다라고 우길 수 있었다.

16551944958317.jpg[누구야, 그 여자?]

결정적으로 시현은 상대가 누군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카드결제 내역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메시지나 통화 내역은 혹시 몰라서 그때그때 철저하게 지워 둔 게 다행이었다. 우진은 재차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에 그 여자가 이보라라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시현이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텐데.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그만 만나자고 선언한 이후, 보라는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현에게까지 차이면 그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쳐버리는 꼴이다. 강시현은 놓치기에는 꽤 아까운 결혼 상대였다. 서른다섯이나 되니 슬슬 결혼이 급한 것도 사실이었다. 직장에서도 자신이 올해 안에 결혼할 거라고 다들 알고 있고, 어머니도 벌써부터 신이 나서 예단으로 받을 명품 가방을 고르고 계신데 실망시켜드릴 순 없었다. 게다가 강시현의 곁에는 그놈이 있지 않은가. 윤태하인가 뭔가 하는, 새파랗게 어린놈. 시현이 혼자가 된 것을 알면 그놈이 때는 이때다, 하고 잽싸게 채갈 게 틀림없었다. 헤어지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시현이 저보다 훨씬 젊고, 키도 크고, 능력도 좋은 놈을 만나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남자의 자존심 문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단은 강시현을 붙잡고 봐야 한다. 그런 치밀한 계산 끝에, 우진은 아까 자존심 내려놓고 납작 엎드렸던 것이다. 다행히도 아직 들킨 건 목걸이뿐이니 가망이 있었다. 내일도 찾아가서 싹싹 빌어야겠다고, 우진은 생각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릎도 꿇을 수 있다. 그러면 시현은 결국 용서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고, 마음이 약하고, 남을 잘 믿고. 원래 그런 여자니까, 강시현은. * 죽도록 술이 고팠지만 차마 수연의 가게에는 갈 수가 없었다. 수연이 알면 자신보다도 더 속상해할 테니까. 그래서 시현은 집 근처 바에서 혼자 위스키를 마셨다. 평소 같으면 소주나 마셨을 테지만 이런 날까지 궁상을 떨고 싶지 않았다. 정작 위스키를 마시고 있으니 더 씁쓸했다. 이런 날이 아니면 비싼 술도 못 먹을 정도로 궁상을 떨고 살았구나.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살았을까, 나는. 대체 뭘 위해서……. 위스키를 반 넘게 비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현의 발걸음은 비교적 가벼웠다. 약혼자가 바람난 여자치고는 그랬다. 술기운에 머릿속이 몽롱한 것이, 기분이 썩 괜찮았다. 술에 취하면 복잡한 일 따위는 깊이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바람난 약혼자의 일마저도.

16551944988271.jpg[원래 술 잘 못 마셨잖아. 언제부터 그렇게 늘었어?]

태하가 물은 적이 있었다. 혼자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좀 달랐다. 어쩌면, 나는 내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게 두려웠던 건 아닐까. 혹시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답이 나올까 봐……. 원룸 건물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커다란 그림자를 보고, 시현은 걸음을 멈췄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던 태하가 시현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짓고 다가왔다.

16551944988271.jpg“술 먹었어?”

16551944958317.jpg“조금. 넌 왜 나와 있어?”

16551944988271.jpg“잠깐 바람 좀 쐬려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태하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내가 걱정돼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 태하의 등 뒤에 대고, 시현은 불쑥 물었다.

16551944958317.jpg“넌 알고 있었지?”

주어도 없는 말에 태하는 눈에 띄게 움찔했다. 당황해서 제 표정을 살피는 것을 보고 시현은 확신했다.

16551944988271.jpg“뭘?”

16551944958317.jpg“모르는 척 안 해도 돼.”

시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16551944958317.jpg“너 알고 있었잖아, 내 약혼자 바람피우는 거.”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내뱉는 태하에게, 시현은 물었다.

16551944958317.jpg“넌 어떻게 알게 된 거야?”

16551944988271.jpg“어쩌다가 봤어. 둘이 같이 있는 거.”

16551944958317.jpg“어디서 뭐 하고 있었는데?”

태하는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16551944988271.jpg“바람피우는 거 알았으면 됐지, 그것까지 알아서 뭐 하게.”

16551944958317.jpg“내가 한번 맞춰볼까?”

시현은 명탐정이라도 된 듯, 검지를 펴고 눈을 빛냈다.

16551944958317.jpg“비싸고 좋은 데서 밥 먹고 있었겠지. 날짜는 아마, 지난주 금요일 저녁.”

16551944988271.jpg“……!”

태하가 놀란 눈으로 시현을 쳐다보았다. 그날은 원래 우진을 만나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우진이 갑자기 야근이 생겼다면서 저녁 약속을 깨고는 미안하다며 대신 떡볶이를 사다 줬었다. 그 떡볶이를, 태하는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렸다.

16551944988271.jpg[떡볶이 말고 다른 거 말해. 먹고 싶은 거 뭐든지 다 사줄 테니까.]

그때는 얘가 미쳤나, 하고 생각했는데 아까 혼자 술을 마시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니 그랬다. 혹시 태하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16551944988271.jpg[이러니까 결혼할 사람한테 겨우 떡볶이 취급밖에 못 받고 있는 거잖아!]

아마 우진이 다른 여자와 비싼 곳에서 식사하는 걸 보고 화가 나서 한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어서 넘겨짚어 봤는데 딱 맞춘 모양이다. 태하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걸 보면.

16551944958317.jpg“내 말이 맞지?”

시현은 소리 내어 웃고 태하의 등을 칭찬하듯 가볍게 두드렸다.

16551944958317.jpg“고맙다, 윤태하. 아무것도 모르고 그 떡볶이 맛있게 먹었으면 지금쯤 엄청 짜증 났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그날 태하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이해가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대신해 화내준 게 고맙기까지 했다.

16551944958317.jpg“되게 답답했겠다, 너. 다 알면서 사실대로 말은 못 하고.”

태하는 조심스럽게 시현의 표정을 살폈다.

16551944988271.jpg“화 안 내?”

16551944958317.jpg“네가 뭘 잘못했다고 화를 내. 잘못한 인간은 따로 있는데.”

16551944988271.jpg“알고도 말 안 했잖아, 내가.”

16551944958317.jpg“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잖아, 나 상처받을까 봐. 말하려고도 했는데 내가 안 들은 거고.”

어제 퍼널 분석 결과를 보고하러 갔을 때, 태하는 말했었다. 잠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나가서 얘기하자고. 중간에 말다툼을 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듣지는 못했지만, 이제 생각하니 알 것 같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지.

16551944958317.jpg“너 내 편이잖아. 내 편인데 내가 왜 화를 내, 너한테.”

주책없이 배어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쓱 훔치며 시현은 웃었다. 이 와중에도 내 편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전에만 터졌어도 막막할 뻔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훨씬 낫지 않은가. 지금 내 곁에는 태하도 있고, 수연 이모도 있으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위로가 되어서, 아까 우진 앞에서도 나지 않았던 눈물이 자꾸만 나오려 했다.

16551944958317.jpg“…….”

눈물을 참느라 시현은 애써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16551944958317.jpg“오랜만에 설레는 감정을 느껴보니 좋았다더라. 그래서 잠깐 눈이 돌아간 거래. 어쩜, 나한테 하나도 안 설렌다는 얘기를 그런 식으로 하니?”

피식피식 웃으며 말하는 동안 태하는 묵묵히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져서, 시현은 태하를 쳐다보았다.

16551944958317.jpg“있잖아, 태하야. 너도 연애해봤지?”

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시현은 다시 물었다.

16551944958317.jpg“원래 첨엔 다 그렇잖아. 상대가 좋아 죽겠고, 예뻐 죽겠고……. 그게 몇 년이나 가든?”

이번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시현은 한숨을 쉬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말하기 싫은가 보다. 곧이어 도착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데,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16551944988271.jpg“……몇 년이 지나도 똑같이 예쁘던데, 나는.”

시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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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44988271.jpg“교복 입을 때도 예뻤고, 사원증 걸고 있어도 예쁘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태하가, 엘리베이터 밖에 선 채로 말했다.

16551944988271.jpg“밤늦게 술 냄새 풍기고 다녀도, 예뻐 죽겠고.”

너무 놀라서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16551944988271.jpg“…….”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도, 태하는 시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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