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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고백의 상대 (23/181)

#23. 고백의 상대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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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 시현의 머릿속은 마치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 같았다. 분명히 지금쯤 우진이 바람피운 일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야 했다. 그런데 정작 그보다도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젯밤에 태하가 했던 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어제 들은 말이 생각났다.

16551945095435.jpg[……몇 년이 지나도 똑같이 예쁘던데, 나는.]

그 말을 하는 동안 태하의 시선은 내내 시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16551945095435.jpg[교복 입을 때도 예뻤고, 사원증 걸고 있어도 예쁘고.]

16551945095465.jpg[…….]

16551945095435.jpg[밤늦게 술 냄새 풍기고 다녀도, 예뻐 죽겠고.]

고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아홉 살 때부터 제 손으로 키우다시피 한 아이만 아니었다면!

16551945095465.jpg‘대체 무슨 뜻으로 한 소리지?’

시현은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여태 그녀는 태하가 자신을 여자로 보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 회사에 왔을 때 내가 마음에 들었느냐는 둥 하면서 잠시 이상하게 굴었던 적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억을 잃어서라고 생각했다.

16551945095435.jpg[그럼 똑바로 봐.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그런 말을 하면서 제 몸을 내보였을 때도, 단순히 아이 취급을 당한 게 심술이 나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나 이만큼 컸단 말이야, 하는 투정 같은 거였다고.

16551945095465.jpg‘만약에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로 태하가 나를 여자로 보는 거라면…….’

생각하다 말고 시현은 머리를 두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려버렸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하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나는 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어제 우진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지금쯤 이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헤어지느냐 마느냐, 죽도록 고민하고 있어야 할 때인데. 왜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어제 태하에게 들은 말뿐인 걸까. 덕분에 잠까지 설쳐서, 어제 먹은 술이 아직 덜 깼는지 속이 울렁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아프다고 연차 내고 쉬고 싶었지만 시현은 억지로 참고 욕실로 향했다. 이유는 오로지 태하 때문이었다. 약혼자가 바람피웠다고 회사까지 빠질 정도로 프로 정신이 없는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세수를 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는 바람에 시현은 하마터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인터폰 화면에 뜬 얼굴은 태하였다.

16551945095435.jpg- 와서 아침 먹어.

16551945095465.jpg“어?”

순간적으로 우진이 싫어할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가 시현은 그만 씁쓸해졌다. 참, 그 인간 바람났지. 용건만 말하고 나서 태하는 도로 가버렸다. 시현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 앞으로 달려가서 거울을 보았다. 어제 술을 너무 먹어서 얼굴이 부었을 텐데…… 근심스럽게 제 얼굴을 요모조모 들여다보다가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16551945095465.jpg‘대체 태하랑 밥 먹는데 거울은 왜 보고 있는 거야?’

시현은 달아오른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애써 생각했다. 하도 오랜만에 예쁘다는 말을 들어서, 실망시키기 싫은 거다. 아마 경비 아저씨가 예쁘다고 칭찬했어도 신경 썼을 거다. 옆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누르자 태하가 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맛있는 냄새가 확 끼쳐 왔다.

16551945095465.jpg“뭔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

시현은 어떻게든 태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려 노력했다. 오늘의 메뉴는 북엇국이었다. 어제 먹은 술로 뒤틀린 속에 따뜻한 북엇국이 들어가니까 말 그대로 살 것 같았다. 북엇국을 부지런히 떠먹으며, 시현은 진심으로 칭찬했다.

16551945095465.jpg“이야, 우리 태하. 완전 일등신랑감이네?”

태하는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16551945095435.jpg“그럼 좀 데려가 주든가.”

그렇지 않아도 복잡했던 머릿속 실타래가 하나 더 늘었다. 무슨 말을 해도 늘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하니 저게 농담인지 뭔지 알 수가 있나. 어제만 해도 그렇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걸까. 혹시 그게 진짜로 고백이었다면? 그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숟가락을 움직이는 시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생각만으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16551945095435.jpg“저기.”

그런 시현의 마음을 마치 들여다본 것처럼, 태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16551945095435.jpg“어젯밤엔 내가…….”

시현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16551945095465.jpg“어머. 나 어젯밤에 너 만났니?”

태하가 당황한 눈으로 시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16551945095435.jpg“기억이 안 난다고? 하나도?”

16551945095465.jpg“완전히 필름이 끊겼나 봐. 못 살아 내가, 이놈의 술을 끊든지 해야지.”

충격을 받은 듯 빤히 쳐다보는 태하를 보고, 시현은 아차 하는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16551945095465.jpg“혹시 내가 너한테 돈 빌려달라고 했니? 그런 거면 그냥 주사 부린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태하가 퉁명스럽게 말을 가로챘다.

16551945095435.jpg“됐으니까 밥이나 먹어.”

포기한 듯 시선을 도로 밥상 위로 옮기는 태하를 보고, 시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잘 넘겼다. * 쉴 새 없이 진동하는 휴대폰을 아예 무음으로 전환시키며, 보라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1655194512497.jpg“이거 완전 스토커 아냐?”

상대는 물론 김우진이었다. 이제 그만하자고 했으면 그동안 만나준 거나 고맙게 생각하고 순순히 떨어질 것이지, 주제도 모르고 벌써 며칠째 전화를 해대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벌써 부재중 전화가 열 통도 넘게 찍혔다. 질려서 없던 정도 떨어질 판이었다.

1655194512497.jpg“이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결혼을 하나 몰라.”

강시현이 안됐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휴대폰을 확인하던 보라는, 문득 부재중 통화 알림 아래 떠 있는 문자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16551945124979.jpg- 시현이가 알아버렸어. 이거 보면 꼭 연락 줘, 보라야.

뭐? 보라는 화들짝 놀라서 당장 사무실을 나와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우진은 마치 기다린 것처럼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16551945124979.jpg-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보라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에 짜증이 확 치미는 것을 겨우 참고, 보라는 애써 안타까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1655194512497.jpg“오빠 목소리 들으면 괜히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그랬죠.”

16551945124979.jpg- 보라야……!

감동한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보라는 다급하게 물었다.

1655194512497.jpg“그런데 강 대리님이 알아버렸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16551945124979.jpg- 말 그대로야. 시현이가 알아버렸어. 목걸이 선물한 것도.

보라는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귀가 닳도록 말을 했는데, 이런 등신이!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어 버릴 뻔한 순간, 우진이 다시 말했다.

16551945124979.jpg- 그런데 그게 너라는 건 몰라.

1655194512497.jpg“네?”

16551945124979.jpg- 내가 다른 여자 만나는 것까진 알았는데, 그게 너란 건 아직 모른다고.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1655194512497.jpg“오빠, 잘 들으세요. 제가 처음부터 말했죠? 비록 제가 오빠한테 끌린 건 사실이지만, 전 강 대리님 정말 좋아한다고, 절대 상처 드리기 싫다고요.”

우진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51945124979.jpg- 응.

1655194512497.jpg“저라는 것만은 절대 몰라야 해요. 만약에 강 대리님이 아시면 저 회사에서 얼굴 못 들고 다녀요. 그렇게 되면 그냥 확 죽어버릴 거예요.”

협박까지 섞어서 보라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16551945124979.jpg- 알았어. 절대 그것만은 모르게 할게. 나만 믿어.

벌써 반은 들켜 놓고 믿긴 뭘 믿어, 등신아.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보라는 시무룩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1655194512497.jpg“고마워요, 오빠. 믿을게요.”

전화를 끊으려는데, 우진이 다급히 말했다.

16551945124979.jpg- 저기, 보라야. 우리 정말 이렇게 끝인 거니?

진짜 구질구질하긴. 휴대폰을 흘겨보며, 보라는 들리지 않게 짜증 섞인 한숨을 뱉었다.

1655194512497.jpg“말했잖아요. 전 두 분 결혼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요.”

16551945124979.jpg- 하지만…….

1655194512497.jpg“두 분, 정말 잘 어울려요. 그러니까 저는 그만 잊고 앞으론 강 대리님한테 잘해주세요. 그게 오빠도 행복해지는 길이에요.”

달래다시피 해서 겨우 전화를 끊고 나서 보라는 생각에 잠겼다.

1655194512497.jpg‘가만있자. 그게 나라는 건 모른다고 해도, 어쨌든 바람피우는 건 알았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우진과 헤어질 가능성도 있는 거 아닌가. 둘이 파혼하게 되면, 윤태하가 강시현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김우진과의 결혼이야 깨지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지만, 윤태하와 잘되는 건 곤란하다. 보라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1655194512497.jpg‘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되겠어.’

굳어진 얼굴에 미소를 장착하고, 보라는 시현을 찾아 나섰다. * 일단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척해서 넘기긴 했지만, 시현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한 채 그대로였다. 만약에 어젯밤에 태하가 한 말이 진짜 고백이었다면 조만간 또다시 할 거 아닌가. 한 번 했던 고백을 두 번 안 할 리가 있나.

16551945095465.jpg‘어떡하지?’

생각에 잠겨 회사 복도를 걷는데, 문득 누군가가 시현의 팔을 붙잡았다.

1655194512497.jpg“대리님!”

흠칫 놀라 돌아보자 보라가 웃으며 서 있었다.

1655194512497.jpg“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세요? 몇 번이나 불러도 모르시고.”

시현은 얼른 웃어 보였다.

16551945095465.jpg“아무것도 아니야. 요즘 일이 많아서, 좀 피곤해서 그래.”

보라는 대번에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1655194512497.jpg“세상에, 본부장님이 계속 부려먹으시는 거예요?”

16551945095465.jpg“그렇지 뭐.”

본부장이라는 말에 문득 지난번에 태하가 보라에게 화를 냈던 일이 떠올랐다. 시현은 새삼스럽게 보라의 눈치를 살폈다.

16551945095465.jpg“보라 씨야말로 괜찮아? 그날 본부장님이 보라 씨한테 너무 심하게 구시던데.”

기가 죽기는커녕, 웬일인지 보라는 쿡쿡 웃었다.

1655194512497.jpg“괜찮아요. 괜히 심술부리는 거예요.”

마치 친한 사이라도 되는 것 같은 말투에 시현은 위화감을 느꼈다.

16551945095465.jpg“심술?”

주위를 살피더니, 보라는 시현의 팔을 끌고 아무도 없는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1655194512497.jpg“이거 강 대리님 믿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절대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보라는 손가락까지 걸고 나서야 시현의 귀에 속삭였다.

1655194512497.jpg“저, 사실은 윤태하 본부장님하고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16551945095465.jpg“응?”

시현은 놀라서 보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보라가 말한 적이 있었다. 태하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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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연이 있었구나,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다가 시현은 문득 숨을 멈췄다. 그렇다면…….

1655194512497.jpg“오랜만에 만나서 괜히 심술부려 보고 싶었나 봐요. 왜 남자들 그러잖아요, 관심 있는 여자 괜히 괴롭히는 거.”

목에 건 사원증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웃는 보라의 모습 위로, 어제 태하가 했던 말이 겹쳐졌다.

16551945095435.jpg[교복 입을 때도 예뻤고, 사원증 걸고 있어도 예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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