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으면, 나하고 해.2021.12.21.
“그럼 대리님, 저 가볼게요. 괜히 대리님하고 같이 있는 거 보면 본부장님 또 심술부리실 것 같아서요.”
보라는 귀엽게 윙크를 날리고 돌아서서 종종걸음으로 가버렸다. 혼자 남은 시현은 피식피식 웃었다.
[교복 입을 때도 예뻤고, 사원증 걸고 있어도 예쁘고.]
뭐야, 그게 보라 얘기였단 말이야? 제 얘기인 줄 알고 잠시나마 진지하게 고민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기야 태하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볼 리가 없는 거였는데. 그나마 필름 끊긴 척, 기억 못 하는 척한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몰랐다. 그 말의 주인공이 보라인 것을 알고 나니 태하의 말이 백 퍼센트 이해가 갔다. 하기야 이보라가 언제인들 예쁘지 않았을까. 아마 늙어서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예쁠 것 같다.
[이분홍 씨, 어느 팀 소속이죠?]
갑자기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태하가 심하게 화를 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보라가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던 건 아닐까.
‘윤태하 이 자식, 질투 장난 아닌데?’
시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태하가 ‘이분홍 씨’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보라의 고등학교 때 별명 같은 거겠지. 그러고 보니 보라가 핑크색을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다행이다, 내가 아니라서…….”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다 말고, 시현은 갑자기 울컥해서 입을 다물었다. 아니, 하나도 다행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사실은 서운했다. 그게 내가 아니었다는 게. 그 순간 시현은 깨달았다. 어젯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바람난 약혼자는 뒷전이고, 온통 태하 생각뿐이었을 정도로. ……자신이 태하에게 흔들렸다는 것을. * 시현은 자기혐오에 빠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하고 보라인데, 누구보다 아끼는 두 사람인데. 그 둘 사이에서 마치 소외라도 당한 것처럼 이토록 허전함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했다.
‘사람 착각하게,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을 해가지고.’
애써 태하를 원망해 봐도 설득력이 없었다. 언제든 윤태하가 진지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걔는 어릴 때부터 그런 성격이었는데. 태하 탓을 할 것도 없다. 혼자 착각하고 흔들린 것은 자신이었다. 시현은 태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종일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다행히 태하는 오늘따라 원앱팀 사무실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이게 고백인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그게 고민할 거리나 되냔 말이다. 만약에 진짜로 태하가 자신에게 고백했다 치고, 그러면 받아주기라도 했을 거라는 건가? 여태 친동생보다 더하게 여기며 키워온 아이를? 하루 종일 스스로를 야단친 끝에 시현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다행히 내가 아니었으니까 된 거야.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면 돼.’
그쯤에서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멈추고 시현은 퇴근길에 나섰다. 지친 걸음을 이끌고 회사 건물을 나오는데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우진이었다.
“시현아.”
얼굴을 보는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와서, 시현은 얼굴을 굳혔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잖아. 바로 어제 한 말인데 벌써 잊어버렸어?”
“그냥 앉아서 기다리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서 왔어.”
말마따나 우진은 제법 초췌해 보였다. 시현은 한숨을 짓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회사 앞이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딴 데 가서 얘기해.”
회사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까지 가서야 시현은 우진의 팔을 놓아주었다. 놓자마자 우진은 태엽을 잔뜩 감았다 놓은 장난감처럼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너 배신감 느끼는 거 내가 다 이해하는데, 이렇게 고민하고 뭐고 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어. 걔랑은 정말 밥 몇 번 먹은 게 다라고.”
시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랑은 한 번도 안 먹었던 비싼 밥 말이지. 오죽하면 태하가 떡볶이를 봉지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을까.’
시큰둥한 반응을 느꼈는지, 우진은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흔들릴 수는 있는 거잖아. 너도 살다 보면 그럴 때 있을 거 아니야. 너는 한 번도 안 그럴 것 같아?”
이 말을 어제 들었다면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냐고, 나는 그럴 일 없다고 당장 쏘아붙여 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 봐, 너도 장담은 못 하잖아.”
귀신같이 알아채고, 우진은 매달리듯 시현의 손을 잡았다.
“언젠가 네가 흔들릴 때가 오면, 그땐 내가 너 꼭 붙잡아줄게. 그러니까 너도 이번 한 번만 그래 주라. 응? 시현아.”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듯하게도 들렸다.
“이런 일로 쉽게 헤어질 사이 아니잖아, 우리. 결혼 준비하기도 바쁜데, 쓸데없는 일에 이렇게 시간 낭비하지 말자. 응?”
끈질기게 설득하는 우진에게, 결국 시현은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시간을 줘. 내가 연락할 테니까, 제발 좀 찾아오지 말고.”
* 태하는 하루 종일 어이가 없었다.
[어머. 나 어젯밤에 너 만났니?]
어젯밤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고백한 건데, 그걸 잊어버려? 대체 언제부터 품어 온 마음인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났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강시현 이외의 여자는 상상할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어릴 때는 왜 시현 누나는 미스코리아에 안 나갈까, 진지하게 궁금했었다. 나가면 당연히 미스코리아 진이 될 텐데. 좀 크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배우니 여자 아이돌 가수니, 미인의 대명사는 몇 년마다 계속 바뀌었다. 그러나 요즘 대세라는 미인 누구를 봐도 태하는 늘 똑같은 생각을 할 뿐이었다. 시현이 훨씬 더 예쁜데. 상대를 누구로 놓든, 승자는 늘 강시현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입 밖으로 내는 건 쉽지 않았다. 미성년자일 때는 말해봐야 안 받아줄 것 같아서, 성인이 돼서는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겨버려서. 그 남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시현이 알게 되자마자 곧바로 고백했지만, 역시 말을 꺼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속으로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고백하고도 차마 엘리베이터에 따라 타지 못하고 그냥 올려 보낸 건데. 아침에 만나면 그녀가 뭐라고 대답할까, 밤잠도 설칠 정도로 긴장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겨우…….
[완전히 필름이 끊겼나 봐. 못 살아 내가, 이놈의 술을 끊든지 해야지.]
종일 허탈감에 시달리다 태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뭐, 잊어버렸으면 다시 하면 되지. 혹시 거절당하면 또 하면 되고. 또 거절당하거든 아예 얼굴 볼 때마다 고백할 테다. 어차피 이제 약혼자와는 헤어질 테니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 우진을 겨우 떼어내고 시현은 집으로 돌아왔다. 일부러 버스도 안 타고 집까지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우진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하에게 흔들리지 않았나. 바람을 피우진 않았지만, 잠시 다른 사람에게 설렌 걸로만 따지면 우진이나 자신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엇보다 그녀는 서른세 살이었다. 이 나이에 다시 누군가를 만나서 처음부터 또 연애할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어차피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데, 다른 남자를 만나서 이 피곤한 과정을 또 겪어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전화가 왔다.
- 너 대체 언제까지 우리 아현이 앞길 막을 거야?
받자마자 작은어머니가 바락 고함을 질렀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안 봐도 그림이 뻔히 그려졌다. 이번엔 정말 놓치기 아까운 신랑감이 있으니 아현이부터 빨리 시집보내자고 작은어머니가 들들 볶았을 테고, 작은아버지는 남들 이목이 무서우니 죽어도 시현이 먼저 보내야 한다고 버텼을 테고.
“죄송해요. 그렇지 않아도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 그 댁에 인사드린다고 한 게 벌써 언제야? 왜 여태 감감무소식이냔 말이야!
“오빠 집에 인사는 드렸는데, 정말 죄송해요. 제가 요즘 회사 일로 정신이 없어서 연락드리는 걸 깜빡했어요.”
작은아버지와 꽤나 크게 말다툼을 한 모양이다. 시현이 몇 번이나 사과했지만 작은어머니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씩씩거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듣는 것 같았다.
- 우리 집에 인사는 안 와도 되니까, 바로 상견례 날짜 잡아. 다음 주 안으로. 알았어?
눈치 보고 기죽어 살아온 세월이 워낙 길어서일까. 이미 독립도 한 어엿한 어른인데, 작은어머니 앞에만 서면 시현은 자꾸만 작아졌다. 길길이 날뛰는 작은어머니에게, 사실은 약혼자가 바람을 피웠고, 지금은 용서할까 말까 고민 중이라는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네, 작은어머니. 오빠랑 상의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시현은 결국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서 집에 돌아왔는데, 태하가 현관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번엔 또 너냐. 시현은 눈을 감고 한숨을 지었다. 태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하루 종일 속이 말이 아니었지. 고민했다가, 설렜다가, 실망했다가, 어이없다가, 죽고 싶도록 창피했다가. 그게 너 때문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시현은 우진을 방패로 삼았다.
“오빠가 회사 앞에 찾아왔더라.”
태하는 금세 화난 표정을 했다.
“미쳤군. 뭐라는데?”
“잘못했다고 싹싹 빌지 뭐.”
“설마 받아줄 건 아니지?”
“생각 좀 해보려고.”
시현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 흔들릴 수 있는 거잖아. 나도 살다 보면 언젠가 그런 날 없을 거라고 장담 못 해.”
아까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그냥 한번 눈감아줄까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머리 아프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번쯤 눈감고 넘어갈까, 그런 생각도 들어.”
자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이해한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우진도 두 번 실수하지는 않을 거라고 위로해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날카로운 힐난이었다.
“그렇게까지 결혼이 하고 싶어 죽겠어? 바람피운 것까지 눈 감을 정도로?”
시현은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나 결혼 못 해서 환장했다! 그래서 뭐, 네가 나 시집이라도 보내줄래?”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면 나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왜 몰라주는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하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헤아려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으면.”
낮은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귓가에 울렸다.
“……나하고 해.”
놀란 시현은 숨을 멈췄다. 고개를 들자 태하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아이가 아닌, 남자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