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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말로 해봐야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25/181)

#25. 말로 해봐야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2021.12.24.

16551945359055.jpg“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으면.”

낮은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귓가에 울렸다.

16551945359055.jpg“……나하고 해.”

한참 만에야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5359065.jpg“그래, 하자.”

움찔하는 태하를 향해 시현은 눈동자를 빛내며 바짝 다가섰다.

16551945359065.jpg“언제 할래? 내가 좀 급해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16551945359055.jpg“……?”

16551945359065.jpg“3월은 다 갔으니까 4월 어때? 아님 5월의 신부도 좋고.”

태하는 오히려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 여자가 왜 이러나, 하는 듯이 바라보는 눈빛에 시현은 픽 웃었다. 어차피 그럴 거면서 까불어. 길게 한숨을 내뱉고 시현은 돌아서서 제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16551945359065.jpg“오늘치 헛소리는 이미 기준치 훌쩍 넘었다. 피곤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그러나 채 다 누르기도 전에 손목을 붙잡혔다.

16551945359055.jpg“내가 지금 헛소리하는 것 같아?”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16551945359065.jpg“그럼 당연히 헛소리지, 제정신으로 그런 소리가 나와?”

시현도 마주 노려보아 주었다. 한번 속지, 두 번 속나!

16551945359065.jpg“경고하는데, 다른 여자한테 할 얘기 자꾸 나한테 와서 하지 마. 두 번은 못 참아.”

16551945359055.jpg“내가 뭘 어쨌는데?”

딱 잡아떼는 게 어이가 없어서 시현은 쏘아붙였다.

16551945359065.jpg“너! 어젯밤에 나한테 엘리베이터 앞에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말하자마자 아차, 하고 혀를 깨물어버렸다. 참, 기억 안 나는 건 내 쪽이었지!

16551945359055.jpg“필름 끊겼던 게 아니라고?”

태하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시현은 포기하고 한숨을 지었다.

16551945359065.jpg“그래, 나한테 고백한 줄 알고 이걸 어쩌나, 하루 종일 고민 때렸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좀 당사자한테 가서 직접 하라고, 제발.”

얄밉게 잘생긴 얼굴을 흘겨보고, 시현은 여태 잡혀 있는 손을 뿌리치려 했다.

16551945359065.jpg“나니까 다행인 줄 알아. 다른 여자 같으면 고소했다.”

그러나 태하는 왠지 시현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16551945359055.jpg“강시현.”

대신에 갑자기 이름을 불렀다. 이게 또 누나한테 강시현이야, 버릇없이! 정색을 하고 노려보는데, 갑자기 태하의 얼굴이 확 가까워졌다. 뭐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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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몸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완전히 정지해버렸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것은 맞닿은 입술의 뜨거움뿐이었다.

16551945359065.jpg“…….”

잠시 후, 태하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중얼거렸다.

16551945359055.jpg“말로 해봐야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시현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숨을 쉬는 것조차도 잊어버렸다.

16551945359065.jpg“…….”

건전지가 떨어진 로봇 상태가 되어 있는 시현을, 태하는 가슴을 활짝 펴고 바라보았다.

16551945359055.jpg“난 헛소리한 적 없어. 다른 여자 얘기한 적도 없고.”

16551945359065.jpg“…….”

16551945359055.jpg“그러니까 잘 생각해보고 대답해.”

여태 정지화면 상태인 시현이 걱정됐는지, 태하는 제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16551945359055.jpg“숨은 좀 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시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다음 날 아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시현이 안에서 내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살금살금 밖으로 향했다. 한참 전부터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던 태하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물었다.

16551945359055.jpg“출근하는 거야?”

순간 시현이 움찔했다.

16551945359065.jpg“……!”

뒷모습만으로도 기절할 만큼 놀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참 후에야 시현이 뻣뻣한 동작으로 돌아보았다.

16551945359065.jpg“태, 태하야.”

16551945359055.jpg“이리 와. 내 차 타고 가.”

차 문을 열면서 말했지만 시현은 듣지 않았다.

16551945359065.jpg“저기, 태하야.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얘기하는 게 우스우면서도 씁쓸했다. 또 달려들어 키스할까 봐 겁을 내는 게 뻔히 보였다.

16551945359065.jpg“너 혹시 내가 불쌍하니? 막 구제해주고 싶고, 그래?”

태하는 짧게 한숨을 쉬고 대꾸했다.

16551945359055.jpg“아직도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할까? 어제 했던 거.”

시현이 순식간에 몇 미터쯤 뒤로 떨어졌다. 폭발물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16551945359065.jpg“아니! 그건 됐고!”

저렇게까지 기겁을 하는 걸 보니 조금 심술이 났다. 내 입술이 그렇게 질색을 할 정도의 물건인가. 게다가 나는 첫 키스였는데.

16551945359065.jpg“그, 그래, 뭐 그럼 진짜라고 치고. ……대체 언제부터 그랬는데?”

16551945359055.jpg“기억도 안 나. 너무 오래돼서.”

16551945359065.jpg“너 군대 간 후로 나랑 여태 연락 끊겨 있었잖아. 그게 말이 돼?”

16551945359055.jpg“군대 가기 훨씬 전부터였는데.”

시현의 눈이 점점 커지는 바람에, 저러다가 밖으로 쏟아질까 봐 걱정이 됐다. 잠시 후, 그녀는 진심으로 심각하게 말했다.

16551945359065.jpg“윤태하, 너 제정신 아니야. 너 그때 미성년자였다고!”

16551945359055.jpg“그래서 그땐 아무것도 안 했잖아. 당신 잡혀갈까 봐.”

가볍게 대꾸하고, 태하는 다가가서 시현의 팔을 잡고 제 차 쪽으로 이끌었다.

16551945359055.jpg“지각하겠다. 빨리 타.”

16551945359065.jpg“됐어. 나 버스 타면 돼.”

16551945359055.jpg“딴짓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타라고.”

16551945359065.jpg“아니, 그래서가 아니라……!”

16551945359055.jpg“자꾸 그러면 한다.”

협박 끝에야 시현은 겨우 말을 들었다. 옆자리에 시현을 태우고 나서 태하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단순히 안전벨트를 매 주려고 손을 뻗었을 뿐인데, 시현은 기겁을 하면서 몸을 한껏 움츠렸다.

16551945359065.jpg“꺅!”

16551945359055.jpg“아주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밖에 없군.”

안전벨트를 매주면서, 태하는 혀를 찼다.

16551945359055.jpg“출근길인데 좀 건전한 생각을 합시다, 강시현 씨.”

시현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 또 키스하고 싶었지만 태하는 꾹 참았다. 안 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어기면 두 번 다시 내 차에는 안 타려고 할 테니까. 사실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밖에 없는 건 이쪽이었다. 그야 얼마나 오래전부터 꿈꾸었던 순간인데. 상상 속에서만 닿았던 입술은, 실제로는 훨씬 더 부드럽고 말도 안 되게 달았다. 어젯밤에는 긴장도 되고, 가슴이 너무 뛰어서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옆에 앉은 여자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차는 미끄러지듯 회사를 향해 달렸다. 핸들을 잡은 태하에게, 시현이 물었다.

16551945359065.jpg“저기, 그럼 이보라 씨는?”

아, 이름이 이보라였군. 맨날 헷갈린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태하는 되물었다.

16551945359055.jpg“이보라가 왜?”

16551945359065.jpg“너, 보라 씨하고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16551945359055.jpg“동창?”

마침 차가 신호에 걸린 김에 태하는 생각해보았다. 고등학교 때 그런 여자애가 있었던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진짜 어른이 되려면 경제적으로도 독립해야 했다. 아버지에게 생활비 받아쓰고 있으면 어떤 여자가 남자로 봐줄까. 그래서 학업과 앱 개발을 병행하느라 제정신이 아닐 때였다. 같은 반 친구들이 아무리 졸라도 농구나 축구 한 번을 함께 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남자 동창들도 기억이 안 나는 판에, 여자 동창이 기억이 날 리가 있나.

16551945359055.jpg“모르겠는데.”

오히려 동창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런 쓰레기가 나하고 같은 학교를 나왔단 말이야?

16551945359055.jpg“그래서, 갑자기 이보라 씨 얘기는 왜?”

시현은 보라가 자신의 약혼자와 놀아난 상대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혹시나 눈치를 챘나, 걱정스러워서 물었는데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16551945359065.jpg“아니야, 아무것도.”

저만치 회사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시현이 갑자기 허둥거렸다.

16551945359065.jpg“나 여기서 내려줘.”

16551945359055.jpg“왜?”

16551945359065.jpg“같이 출근하는 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떡해?”

16551945359055.jpg“보면 어때. 어차피 청첩장 받으면 다 알게 될 텐데.”

기겁한 얼굴로 쳐다보는 시현에게, 태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16551945359055.jpg“다음 달에 하자며? 결혼.”

16551945359065.jpg“그건……!”

누구 말이라고 감히 거역을 할까. 말은 그렇게 해 놓고,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 차를 멈춰 주며 태하는 피식 웃었다.

16551945359055.jpg“그러니까 당신이나 나한테 아무 말이나 막 던지지 마.”

16551945359065.jpg“…….”

16551945359055.jpg“잘 생각해보고 대답하라고. 난 진심이니까.”

황급히 차에서 내려서 도망치듯 회사로 향하는 시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태하는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부러 여유로운 척 허세를 부렸지만, 같이 있는 내내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거절당할까 봐. 다행히 시현은 아직 거절하지 않았고, 일단 태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지금쯤 머릿속이 복잡할 테니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기다리는 것쯤이야 지금까지도 수도 없이 해왔으니까. * 컴퓨터라는 것은 너무 많은 작업을 동시에 실행하면 자칫 멈춰버린다. 지금 시현의 머릿속이 딱 그랬다. 너무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바람에 과부하가 걸려서, 오히려 그냥 새하얬다. 먹통이 된 컴퓨터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시현을, 미주가 재촉했다.

16551945451363.jpg“시현 씨, 와이어프레임 왜 공유 안 해줘?”

16551945359065.jpg“응? 무슨 와이어프레임?”

16551945451363.jpg“정신 나갔네, 완전히. 피그마로 만든 거 공유해달라고 어제부터 얘기했잖아!”

16551945359065.jpg“아, 맞다. 미안해.”

그제야 컴퓨터를 뒤지기 시작하는 시현을 보고, 미주가 한숨을 쉬었다.

16551945451363.jpg“됐고,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시현을 끌고 휴게실로 가서, 미주는 커피를 뽑아 건네고 마주 앉았다.

16551945451363.jpg“대체 무슨 일이야? 혹시 남자친구가 속이라도 썩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자 미주가 픽 웃었다.

16551945451363.jpg“프러포즈 받는다고 점심때 신나서 나가더니 시무룩해서 돌아왔잖아, 화이트데이 날. 정작 목걸이는 한 번도 안 걸고 왔고.”

한마디도 안 했는데, 이미 다 짐작하고 있는 거였다. 심지어 미주는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말까지 했다.

16551945451363.jpg“내가 분명히 목걸이 사는 걸 봤는데……. 이거 혹시 딴 년 갖다 준 거 아니야?”

이제는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차마 그렇다고 말도 못 하고, 시현은 쓰디쓴 커피만 마셨다.

16551945451363.jpg“그 남자, 예단 타령했다고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더라. 아직 청첩장도 안 찍었는데, 아니다 싶으면 지금 걷어차 버려.”

시현은 새삼 미주가 속이 깊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예단 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얘기해 줬던 건, 어차피 할 결혼이니까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준 거였구나.

16551945451363.jpg“세상에 남자도 많은데, 확 갈아타. 이번엔 어리고 잘생기고 키 크고 돈 많은 남자로.”

그런 남자가 나 좋대? 하고 대꾸하려다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있긴 있네, 그런 남자가. 갑자기 미주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16551945451363.jpg“아, 걔는 어때? 그 코인 대박 났다는 동생!”

하마터면 시현은 커피를 뿜을 뻔했다. 사레가 들어서 한참 콜록거린 끝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시현은 외쳤다.

16551945359065.jpg“미쳤어? 걔는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려!”

16551945451363.jpg“그게 어때서? 일곱 살 많은 것보다 낫지.”

16551945359065.jpg“나는 걔 아홉 살 때부터 봤다고!”

16551945451363.jpg“지금 아홉 살 아닌데 어때?”

미주는 허리에 손까지 얹고 주장했다.

16551945451363.jpg“일곱 살 연하면 딱 우리 본부장님 나이잖아. 봐, 본부장님 어디가 어린애처럼 보여?”

차마 걔가 걔라고 말도 못 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때 노린 것처럼 휴게실에 태하가 들어왔다. 미주가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16551945451363.jpg“마침 잘 왔네.”

커피머신 쪽으로 향하는 태하의 앞을, 미주는 떡하니 막아섰다.

16551945451363.jpg“본부장님. 실례지만 제가 좀 여쭤볼 게 있습니다.”

16551945359055.jpg“뭡니까?”

16551945451363.jpg“혹시 본부장님께서는 일곱 살 연상의 여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도저히 못 듣겠다. 시현은 그대로 일어서서 도망쳤다. 허둥지둥 휴게실을 나오는데, 등 뒤에 태하의 대답이 들려왔다.

16551945359055.jpg“한창 예쁠 나이죠. 뭘 해도 귀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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