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오늘 여기서, 나랑 자고 가. (26/181)

#26. 오늘 여기서, 나랑 자고 가.202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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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45547794.jpg“혹시 본부장님께서는 일곱 살 연상의 여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도저히 못 듣겠다. 시현은 그대로 일어서서 도망쳤다. 허둥지둥 휴게실을 나오는데, 등 뒤에 태하의 대답이 들려왔다.

16551945547799.jpg“한창 예쁠 나이죠. 뭘 해도 귀엽고.”

시현과 동갑인 미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16551945547794.jpg“진짜 우리 본부장님, 센스 있으셔! 어쩜 농담을 웃지도 않고 하세요?”

16551945547799.jpg“진심입니다만.”

미쳤어, 미친 거야. 시현은 도리질을 치며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16551945547811.jpg“강 대리님!”

그러다 마침 복도 중간에서 보라를 딱 마주쳤다.

16551945547814.jpg“어. 보라 씨.”

16551945547811.jpg“얼굴이 엄청 빨개요. 어디 아프세요? 약 사다 드릴까요?”

보라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16551945547814.jpg“아냐,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16551945547811.jpg“요즘 계속 안 좋으시잖아요. 혹시 약혼자 분하고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보라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아까 미주도 그러더니 얘도 뭔가 눈치를 챘나, 싶어서 시현은 뜨끔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렇지, 약혼자가 바람난 게 뭐 좋은 얘기라고 동네방네 광고를 할까.

16551945547814.jpg“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어.”

16551945547811.jpg“그렇죠? 사이좋으신 거죠?”

보라가 그럼 그렇지, 하듯 손뼉을 쳤다.

16551945547811.jpg“하긴 두 분 사이에 문제가 있을 리가 있나요. 약혼자 분, 대리님 볼 때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시던데.”

16551945547814.jpg“그랬어?”

의외였다. 정작 나는 모르겠는데, 보라는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느꼈을까.

16551945547811.jpg“그럼요. 옆에서 보기에도 부럽더라고요. 두 분, 완전 천생연분이에요. 결혼하면 정말 잘 사실 것 같아요.”

이 말을 며칠 전에만 들었더라도 참 기분이 좋았을 텐데. 시현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16551945547799.jpg“잠깐 나 좀 봅시다.”

굳은 표정의 태하가 보라의 팔을 잡아채듯 붙잡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

16551945547811.jpg“본부장님?”

놀라서 불렀지만 태하는 대꾸도 없이 보라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녀를 비상구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거칠게 닫고 나서야 태하는 보라의 팔을 내동댕이치듯 놓았다.

16551945547799.jpg“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말라고.”

보라는 울상을 했다.

16551945547811.jpg“정말 너무하세요. 같은 회사, 같은 층에 있는데 어떻게 눈에 띄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16551945547799.jpg“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 강시현 곁에 어슬렁거리지 말라는 소리잖아!”

16551945547811.jpg“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강 대리님한테 뭘 어쨌다고…….”

가련한 표정으로 파르르 떠는 보라를 바라보며, 태하는 조소했다.

16551945547799.jpg“뭐? 두 분, 완전 천생연분이에요? 결혼하면 정말 잘 사실 것 같아요?”

그는 죽일 듯이 보라를 노려보았다. 만약에 지금 이 순간 그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더라면 진작 찔려서 피를 흘리고 있을 것 같다.

16551945547799.jpg“사람을 기만하는 것도 작작 해.”

보라는 당황했다.

16551945547811.jpg‘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금세 경고가 날아왔다.

16551945547799.jpg“발뺌할 생각 마. 둘이 호텔에 있는 거, 내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뭐야, 다 들킨 거잖아. 보라는 얼굴에서 두려움을 지우고 어깨를 폈다. 그대로 태하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16551945547811.jpg“하도 매달리는 바람에 몇 번 만나준 것뿐이고, 그나마 이미 정리했어요. 못 믿겠으면 그 남자한테 가서 물어보시든가요.”

태하는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나,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보라는 진심으로 당당했다. 먼저 내 것을 빼앗은 건 강시현이니까. 나는 그냥 당한 대로 갚아줬을 뿐이다.

16551945547811.jpg“설마 강 대리님한테 말씀하실 건 아니죠? 가뜩이나 약혼자가 다른 여자 만나는 거 알고 상처받으셨을 텐데, 그게 저라는 것까지 알면 얼마나 더 상처받겠어요.”

태하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보라를 한 대 치고 싶다는 표정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물론 여자를 때릴 수는 없을 테니까, 보라는 마음 놓고 생긋 웃었다.

16551945547811.jpg“전 강 대리님 무척 좋아해요. 두 사람 결혼 깰 생각도 없고요. 이미 정리한 사이니까, 그냥 본부장님만 입 다물어주시면 지나갈 일이에요.”

그럼 실례할게요, 하고 보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태하가 불렀다.

16551945547799.jpg“이하늘 씨.”

어이가 없어서 이 남자가 일부러 이러나, 하고 쳐다봐도 그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윤태하는 진짜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이 보라건 분홍이건 하늘이건 상관조차 하지 않는다는 걸, 보라는 새삼 깨달았다.

16551945547799.jpg“대체 강시현한테 왜 이러는 거지? 그 여자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16551945547811.jpg“윤태하.”

태하가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 대고, 보라는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16551945547811.jpg“잘못한 건 강시현이 아니야. 너지.”

  * 퇴근 후 버스정거장에 서 있는 시현의 앞에, 버스보다 먼저 와서 선 것은 아침에도 타고 출근했던 검은 자동차였다. 유리창이 스르르 열리며 태하의 얼굴이 나타났다.

16551945547799.jpg“타, 저녁 먹으러 가게.”

됐다고 거절하려다 시현은 생각을 바꿨다. 아무래도 태하와는 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내비게이션에 도착 시간이 30여 분 후로 찍혀 있는 것을 보고 시현은 물었다.

16551945547814.jpg“밥 먹는데 뭐 이렇게 멀리까지 가? 대충 근처에서 먹으면 되지.”

16551945547799.jpg“아버지가 이번에 서울에 호텔을 하나 인수하신다고, 거기 레스토랑이 어떤지 좀 봐달라고 하셔서.”

태하가 차를 출발시키며 대답했다.

16551945547799.jpg“전에 한 번 가서 먹었는데 난 잘 모르겠더라고. 그러니까 당신이 좀 봐줘.”

시현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데이트 같은 건 아니구나. 게다가 레온이 부탁한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야 했다.

16551945547814.jpg“아저씨 부탁이라면 들어드려야지.”

태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16551945547799.jpg“대체 아버지 어디가 그렇게 좋아?”

16551945547814.jpg“뭐?”

16551945547799.jpg“나하고 비슷한 얼굴에 나이만 많은 거잖아. 그러면 당연히 젊은 쪽이 좋은 거 아닌가?”

시현은 놀라서 태하를 바라보았다. 옛날부터 아버지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하게 못마땅해 보여서, 겨우 찾은 아버지한테 왜 저러나 했는데. 고백까지 받고 나니 이제는 알겠다. 질투하는 거구나. 태하는 진짜로 시현이 자기 아버지를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레온은 매력적인 데다 대단한 미남이었다. 그래서 볼 때마다 괜히 얼굴이 빨개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태하가 생각하는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아마도 레온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시현과 단둘이 자주 만났던 것 때문에 태하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16551945547814.jpg“저기, 사실은…….”

16551945547799.jpg“뭐?”

시현은 한숨을 쉬고 입을 다물었다.

16551945547814.jpg“아냐, 됐어.”

태하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레온과 약속했으니까. * 잠시 후 태하를 따라 호텔에 들어선 시현은 호텔의 규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런 큰 호텔을 인수한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부자구나, 레온 아저씨. 문제는 안내를 받아 레스토랑 안에 들어갔을 때였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클래식한 내부 장식이, 마치 유럽의 왕궁에라도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통으로 된 유리창 밖으로는 화려한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이 정도로 고급 레스토랑인 줄은 미처 몰랐다.

16551945547814.jpg“이런 데였으면 진작 좀 말을 하지. 나 옷도 대충 입고 왔는데…….”

괜히 주눅이 드는 시현과 달리, 태하는 마치 이 호텔에서 태어나서 이 식당에서 삼시 세끼 먹고 자란 사람처럼 잘 어울렸다. 하기야 앞으로 이 호텔 주인 아들이 될 텐데, 하고 시현은 생각했다. 잠시 후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았다. 식사 코스도, 샴페인도, 그는 모두 여기서 제일 좋은 걸로 준비해달라고 강조했다. 웨이터가 물러가고 나서, 시현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16551945547814.jpg“굳이 그럴 필요 있어? 그냥 먹어도 비쌀 텐데.”

16551945547799.jpg“나도 프렌치 같은 건 잘 모르니까, 뭐든지 비싼 게 맛있겠지 싶어서.”

하지만 왠지 그런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16551945547814.jpg“너 우진 오빠 봤다는 거, 이 레스토랑인 거지?”

순간 태하의 커다란 어깨가 움찔하는 게 눈에 보였다.

16551945547814.jpg“그럴 것 같았어.”

시현은 웃었다. 그래서 뭐든 제일 좋은 걸로 주문한 거구나. 일부러 같은 곳에 데려와서 더 비싼 거 먹여주려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16551945547799.jpg“그 사람, 진짜로 용서할 건 아니지?”

16551945547814.jpg“잘 모르겠어.”

먼저 나온 샴페인을 소주 마시듯 단숨에 마셔버리고, 시현은 창밖의 야경을 내다보았다. 저 안 어딘가에 우진과 함께했던 곳들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6551945547814.jpg“넌 단번에 끊어내지 못하는 내가 바보같이 보이겠지만, 6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쉬운 건 아냐. 우리도 많이 사랑했어. 하루 종일 같이 있었는데도 아쉬워서 집 앞에서 차마 못 헤어지던 날도 있고, 헤어지고 나서도 밤새 통화하느라 날 꼬박 새우고 출근하던 날도 있고……. 그렇게 연애했다고, 우리도.”

지금이야 이렇게 됐지만, 좋았던 순간들이 왜 없었을까. 우진 때문에 웃고, 기쁘고, 행복했던 날들도 분명히 있었다.

16551945547799.jpg“그 얘기를 내 앞에서 하는 게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 들고?”

16551945547814.jpg“……미안.”

16551945547799.jpg“됐어. 뭐, 지금은 내가 짝사랑하는 거니까.”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쁜 접시에 담겨 나오는 음식들은 하나하나 놀랍도록 양이 적고, 또 놀랍도록 맛있었다. 태하는 내내 자기 식사는 뒷전으로 한 채 시현이 먹는 것에만 신경 썼다. 시현이 잘 먹는 것 같으면 얼른 제 접시에 있는 것도 옮겨주었다.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시현은 하루 종일 머릿속에 맴돌던 것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16551945547814.jpg“있잖아. 혹시 넌 어릴 때부터 나만 봐서 익숙한 걸 연애감정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뭐랄까, 엄마 같은 거 말이야.”

태하가 나이프를 내려놓고 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16551945547799.jpg“밤에 침대 안에서 자기 엄마 생각하는 놈도 있나?”

시현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혹시 누가 들었을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태하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물었다.

16551945547799.jpg“당신은 내가 아들처럼 보여?”

16551945547814.jpg“그건 아니고.”

16551945547799.jpg“그럼, 아직도 아홉 살 어린애로 보이는 거야?”

그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16551945547814.jpg[몇 살이 돼도, 나한테는 그냥 아홉 살 애라고.]

우진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어떻게 봐도 태하가 어린애로는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보려고 해도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심지어 태하는 원래 나이보다도 더 성숙해 보이는 타입이었으니까. 하지만 여태껏 긴 세월을 동생으로만 생각해온 것은 사실이었다.

16551945547814.jpg“어린애까지는 아니지만……. 남자로 보이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다행히 태하는 상처받은 기색은 없었다. 대신에 그는 냅킨을 집어 들며 말했다.

16551945547799.jpg“시험해보면 알겠지.”

16551945547814.jpg“응?”

16551945547799.jpg“해보면 알 거 아냐. 남자로 보이는지, 아닌지.”

우아한 동작으로 입술을 닦고 냅킨을 내려놓으며, 그는 말했다.

16551945547799.jpg“오늘 여기서, 나랑 자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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