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빨리 커서 당신을 잡아먹고 싶었던 건 나야.2021.12.31.
“해보면 알 거 아냐. 남자로 보이는지, 아닌지.”
우아한 동작으로 입술을 닦고 냅킨을 내려놓으며, 그는 말했다.
“오늘 여기서, 나랑 자고 가.”
시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자자. 대신 방은 제일 좋은 걸로 잡아 주라. 콜?’
평소 입버릇대로 농담으로 받아치려다가 시현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그대로 손목 잡고 가서 체크인 할 것 같다. 윤태하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농담 대신에 시현은 얼굴을 굳혔다.
“잊었나 본데, 나 아직 우진 오빠랑 안 헤어졌어.”
태하가 픽 웃고는 말했다.
“그쪽도 여기서 밥만 먹고 얌전히 집에 가진 않았을 것 같은데?”
가슴이 철렁했다. 그 여자랑은 밥 몇 번 먹은 게 다라는 우진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갈 데까지 간 걸까. 하긴 그렇게 비싼 목걸이까지 사준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랑 자보자고. 만약에 내가 별로더라도, 배신감은 덜해질 거 아냐. 그러면 그쪽한테 돌아가더라도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
즉 맞바람을 피우자는 얘기인가 본데.
“그럼 너는 어쩌고?”
시현은 한숨을 짓고 물었다.
“자고 나서 별로라고 우진 오빠한테 돌아가면 넌 어쩔 거냐고. 나한테 진심이라며, 상처받지 않겠어?”
이쪽은 나름 진지하게 말한 건데, 태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별로일 리가 없을 텐데.”
“……!”
“그러니까 시험해보라고. 난 자신 있으니까.”
시현은 자연스럽게 침대 위의 태하를 떠올렸다. 뭘 제대로 상상하기도 전에 얼굴부터 확 달아올랐다.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하를 상대로, 호텔에서 자니 마니, 하고 있다니! 내가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다.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로 식히며,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샴페인을 너무 마셨나 봐. 이만 집에 가자.”
어차피 받아줄 거라고 생각도 안 했는지, 다행히 태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 일어났다. 레스토랑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로비로 나오는데, 누군가가 놀란 듯이 불렀다.
“어머, 시현이 아니니?”
돌아보자 저만치에 대학 시절 친구가 서 있었다.
“어, 주은아!”
시현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가서 손을 잡았다. 대학교 때 매일같이 붙어 다녔던 친한 동기 중의 한 명이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웬일이야, 여긴?”
“남자친구랑 놀러 왔지. 시현이 너도?”
저만치 서 있는 태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주은이 호기심 어린 얼굴을 했다.
“너 결혼한다더니 저 사람이야? 나도 인사시켜주라.”
“어?”
시현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반가운 나머지 태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잠시 깜빡했다.
“……잠깐만.”
멀찍이서 태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주은의 눈이, 갑자기 커다래졌다.
“저거 혹시 네가 키우던 애 아니니? 우리 대학교 때, 중학생이었던 걔!”
시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하는 워낙 눈에 띄는 외모인 데다 혼혈이니, 몇 년 만에 봐도 대번에 알아볼 만도 했다. 중학교 3학년쯤 됐을 때, 이미 태하는 이미 어엿한 성인의 키와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태하를 열심히 돌보는 시현에게 몇몇 친구들은 그렇게 놀리곤 했다.
[너 혹시 쟤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럴 때마다 시현은 벌컥 화를 냈다.
[미친, 그걸 말이라고 하냐? 쟤 중딩이야!]
“맞네, 걔!”
대꾸하기도 전에 주은이 손뼉을 쳤다.
“뭐야, 둘이 사귀는 거야? 대박!”
주은이 시현의 등을 찰싹 때리며 깔깔거렸다.
“와 진짜, 강시현. 그때는 죽어도 아니라고 펄쩍 뛰더니!”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뭐, 둘이 호텔에 쎄쎄쎄라도 하러 왔어?”
“그냥 밥 먹으러 온 거야.”
“어쨌든 데이트네 뭐.”
태하를 바라보며, 주은이 새삼 감탄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나저나 역시 좋은 주식은 조기에 투자하고 봐야 하는구나. 키워서 잡아먹는다니, 훌륭한 전략이었다, 강시현.”
순간 시현은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어릴 때도 잘생겼었는데 지금 보니까 장난 아니네. 어쩐지 밤낮으로 알바 해가며 지극정성으로 키우더라니…… 우리 시현이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고, 시현은 돌아섰다. 그대로 태하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도망치다시피 호텔을 나왔다.
“시현아? 야, 강시현!”
뒤에서 주은이 놀란 듯이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대학 시절, 시현은 매일매일 아르바이트에 쫓기다시피 살고 있었다. 작은어머니는 등록금 외에는 시현에게 한 푼도 주려 하지 않았다. 아직 작은아버지 댁에서 살고 있으니까 용돈만이라면 그 정도까지 하지 않아도 됐지만, 태하를 돌보려면 역시 돈이 필요했다. 태하의 할머니는 태하가 중학교에 올라가던 해에 돌아가셨다. 어차피 살아 있을 때도 별 도움이 안 되는 할머니기는 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태하를 돌볼 사람이라고는 시현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태하는 겉으로는 어른과 다름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외모는 같은 학교 여자애들에게서 편지가 쏟아질 정도로 수려했고, 키는 180센티미터에 가까웠다. 성적도 뛰어났다. 과외는커녕 학원 한 번을 못 갔는데도, 시험만 보면 전교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그런 태하를 보면 시현은 절로 기운이 났다. 내가 어떻게든 뒷바라지를 해서,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교까지 보내고 말겠다! 시장에서 장사하며 자식을 키우는 장한 엄마 같은 각오로, 시현은 아르바이트에 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저녁을 만들어 주러 태하의 집에 갔는데 웬일인지 집이 비어 있었다. 밥을 차려 놓고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안 돼서 시현은 안절부절못했다. 공부를 해도 집에서 하는 아이인데, 웬일일까. 태하가 겨우 돌아온 것은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어디 갔다 이제 와? 몇 번이나 전화해도 안 받고!”
좁은 반지하 문으로 들어오느라, 태하는 반쯤 몸을 접다시피 하며 대꾸했다.
“나 오늘부터 아르바이트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제 누나 일 그만해.”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소리야? 넌 학생인데 공부해야지, 알바 할 시간이 어딨어?”
“누나도 학생이잖아. 취업 준비해야지.”
“나 학점도 좋고 자격증도 여러 개거든?”
“그래도 일은 그만해. 언제까지 나 때문에 고생할 순 없잖아.”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너 때문에 힘들다고 한 적 있어?”
태하는 시현에게 있어 보람이자 자랑거리였다. 살아가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태하가 제 마음을 몰라주는 게, 울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당장 그만둬. 용돈 필요하면 더 줄 테니까.”
“내가 줄 테니까 누나가 그만둬.”
“너 진짜 말 안 들을래?”
늘 제 말이라면 고분고분 듣던 녀석이, 웬일인지 오늘은 끝까지 뻗댔다. 결국 시현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됐어, 네 맘대로 해!”
씩씩거리며 집을 나서자 태하가 얼른 쫓아왔다.
“데려다 줄게.”
“따라오지 마.”
“밤길 위험하잖아.”
“따라오지 말라고, 말도 안 들을 거면서!”
옥신각신하며 나오는데 문득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시현과 같은 또래의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용건은 태하에게 있나 보았다. 태하를 보자마자 확 반가운 얼굴을 하는 걸 보면.
“태하야.”
부르는 목소리에 콧소리가 반이어서, 시현은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얘한테 애교 떤 거야?
“누구야? 이 사람.”
태하가 대답했다.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누나야.”
상대는 시현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태하를 향해 수줍게 물었다.
“있잖아, 태하 너 내일 뭐 해?”
“집에서 공부하는데요.”
“혹시 다른 일 없으면 나랑 영화 보러 갈래?”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시현은 가로막듯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기요, 그쪽 몇 살이에요?”
“스물두 살인데요?”
맙소사. 시현은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느라 심호흡까지 해야 했다.
“지금 얘 중학생인 건 알고 영화 보자고 하는 거예요?”
“그쪽이 무슨 상관인데요?”
마치 경계하듯 쳐다보는 바람에, 시현은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한 살 많은 언니로서 충고하는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아청법으로 잡혀가고 싶지 않으면.”
“뭐?”
방금 태하에게는 아양을 떨더니, 상대도 제법 성깔이 있는 것 같았다. 비웃듯 피식거리며 시현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쪽이 먼저 잡혀가야 할 거 같은데?”
“뭐?”
“방금 같이 집에서 나왔잖아. 왜, 자기 거 건드리니까 화 나?”
반말은 둘째 치고, 말의 내용에 뒷골이 다 띵했다. 이런 미친! 눈이 확 돌아서 한판 붙을 셈으로 앞으로 나서는 시현을, 태하가 한쪽 팔로 꽉 끌어안았다.
“이거 놔.”
뿌리치려 했지만 이미 힘으로는 이길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아 윤태하, 이거 좀 놔 보라고!”
“그럴 가치도 없어.”
시현의 어깨를 단단히 안아 제지한 채, 태하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꺼져.”
“뭐?”
“꺼지라고. 세 번 말해야 돼?”
살벌한 목소리에, 여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게 보였다. 그대로 돌아서서 도망치듯 가 버리는 상대의 등 뒤에 대고 시현은 소리쳤다.
“뭐 저런 미친 변태 돌아이가 다 있어?”
태하의 팔에 붙잡힌 채로, 시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너 한 번만 더 얘한테 집적거리면 죽을 줄 알아!”
상대가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태하는 겨우 시현을 놓아 주었다. 씩씩거리는 시현을 달래듯, 태하는 조용히 말했다.
“너무 열 내지 마. 저런 여자, 한두 명도 아니니까.”
“뭐?”
“가끔 있어. 대학생도 있고, 만나 주면 용돈 주겠다는 아줌마도 있었고.”
“이런 미친 것들!”
시현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아무리 애가 성숙해 보여도 그렇지, 어떻게 중학생한테!
“어떻게 너를 남자로 볼 수가 있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
“다음부터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다 죽여버릴 테니까!”
펄펄 뛰는 시현을, 태하는 언젠가부터 깊이를 알 수 없게 된 눈동자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호텔 건물 구석에 숨어서, 시현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너무 창피해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쩐지 지극정성으로 돌보더라니…… 우리 시현이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아까 의미심장한 얼굴로 하던 주은의 말이 끝없이 귓가에 떠돌았다.
[너 혹시 쟤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친구들이 농담 삼아서 가끔 하던 말도. 남들이 보기에는 나도 그렇게 보이겠지. 내가 옛날에 질색하던 그 여자들처럼……! 여태껏 자랑으로, 보람으로 여겨 온 일이 한순간에 더러운 흙탕물 투성이가 된 기분에, 온몸이 다 벌벌 떨렸다.
“난 알아.”
문득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크고 따뜻한 것이 시현의 몸을 감쌌다.
“당신이 날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웅크리고 있는 시현을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태하는 말했다.
“빨리 커서 당신을 잡아먹고 싶었던 건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