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고백에 대한 대답 (28/181)

#28. 고백에 대한 대답2022.01.04.

16551945915501.jpg“난 알아. 당신이 날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웅크리고 있는 시현을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태하는 말했다.

16551945915501.jpg“빨리 커서 당신을 잡아먹고 싶었던 건 나야.”

온 세상이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딘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태하는 그녀를 품에 숨기듯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빗발치는 화살을 제 몸으로 막아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괜찮아, 내가 다 알아, 하는 것처럼. 넓고 따뜻한 품 안에 그냥 이대로 눈 딱 감고 숨어버리고 싶어지는 자신을 깨달은 순간, 시현은 스스로에게 격렬한 거부감을 느꼈다. 대체 언제부터 윤태하가 너한테 남자였지? 네가 이러고도 바람피운 약혼자를 탓할 수 있어?

16551945915512.jpg“이거 놔!”

시현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태하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16551945915512.jpg“너 내가 아주 우습게 보이지? 네 맘대로 끌어안고, 마음대로……!”

차마 키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시현은 손등으로 입술을 가린 채 태하를 노려보았다.

16551945915512.jpg“자고 가자는 소리나 하고! 그게 우리 사이에 할 말이니?”

그런 시현을, 태하는 안타까운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16551945915501.jpg“다 말했잖아, 내 마음. 아직도 모르겠어?”

16551945915512.jpg“난 대답 안 했어!”

다가오려는 태하를 소리쳐서 제지하고, 시현은 뒷걸음질을 쳤다.

16551945915512.jpg“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일단 나 좀 가만히 놔둬.”

돌아서자마자, 시현은 뛰다시피 빠르게 걸었다. 지금은 1초라도 빨리 태하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 점심시간. 오랜만에 원앱TF 외 개발팀 인원들까지 열 몇 명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본부장의 특이한 취향이 화제에 올랐다.

16551945915545.jpg“글쎄 아주 정색을 하고 세상 진지하게 말씀하시더라니까요?”

미주가 목소리를 착 깔고 성대모사를 선보였다.

16551945915545.jpg“한창 예쁠 나이죠. 뭘 해도 귀엽고.”

16551945930205.jpg“꺅!”

여직원들은 좋아서 비명을 지르고, 남직원들은 반대로 기이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16551945930209.jpg“에이, 미주 대리 괜히 소설 쓰는 거 아냐? 본부장님이면 어린 여자들도 줄을 섰을 텐데, 왜 굳이 나이 많은 여자를.”

16551945915545.jpg“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제 두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요!”

미주가 펄쩍 뛰었다.

16551945915545.jpg“농담 아니라고까지 하셨으니까, 의심나시면 본부장님한테 직접 여쭤들 보시든가요.”

미주는 시원시원한 성격과 확실한 일 처리로 사내에서 신망이 높았다. 장난으로 소설 운운은 했지만, 그녀가 없는 말을 지어서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두들 알고 있었다.

16551945930209.jpg“그러니까 확 차이 나는 연상 취향이다, 이거지? 거 취향 독특하시네.”

16551945930209.jpg“오늘부터 회사 노처녀들 잠 못 자겠네.”

16551945930209.jpg“어머 노처녀라뇨? 과장님 양성평등 교육 이수 다시 하고 싶으세요?”

16551945930209.jpg“원래 모자란 남자들일수록 어린 여자 밝히는 거예요. 본부장님이 정상이라고요.”

여기저기서 입방아를 찧는 가운데, 시현은 혼자 입을 다물고 있었다.

16551945930209.jpg“근데 강 대리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해?”

갑자기 화살이 이쪽으로 날아오는 바람에 시현은 움찔했다.

16551945915512.jpg“네?”

정 과장이 놀리듯 말했다.

16551945930209.jpg“아니, 혼자 뭘 한참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길래. 왜, 혹시 본부장님이 연상 취향이라니까 이참에 큰 그림 그려볼까, 싶어?”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울컥했다. 내가 대체 뭘 그렸다고 여기저기서 큰 그림 타령인 걸까.

16551945930209.jpg“그러고 보니까 강 대리도 본부장님보다 일곱 살 연상이잖아?”

16551945930209.jpg“그러게요. 한창 예쁘고, 뭘 해도 귀여울 나이 맞네.”

사람들이 깔깔댔다.

16551945930209.jpg“어허, 이 사람들이 우리 강시현이를 뭘로 보고!”

원앱팀 팀장이 벌컥 역정을 냈다.

16551945930209.jpg“우리 강시현이가 양심이 있지, 언감생심 본부장님을 넘볼 리가 있어?”

16551945930209.jpg“그러게요. 강 대리님 곧 결혼까지 앞두고 있는데, 정 과장님 너무하셨다. 사과하세요.”

16551945930209.jpg“미안, 강 대리. 대신 내가 결혼식 때 부조 십만 원 할게.”

16551945930209.jpg“그럼 오만 원 하려고 하셨어요?”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거나 말거나 시현은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 물론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1655194595481.jpg“혹시 모르잖아요? 진짜 강 대리님 얘기였는지도.”

그렇게 말한 것은 보라였다. 보라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1655194595481.jpg“우리 강 대리님 너무 예쁘고 귀여우신 거 사실이잖아요. 딱 일곱 살 연상이고. 그래서 저는 처음 듣는 순간부터 혹시 본부장님이 강 대리님 말씀하신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요.”

억지로 넘기던 불고기 조각이 목에 탁 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16551945930209.jpg“아이고, 우리 여신님, 아주 그냥 눈에 콩깍지가 씌었네.”

16551945930209.jpg“강 대리, 보라 씨한테 대체 무슨 약을 먹인 거야?”

모두가 웃겨 죽겠다고 난리인 상황에서, 시현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16551945930209.jpg“보라 씨. 아무리 농담이라도 상사들 앞인데 말은 가려 해야지, 그게 무슨 소리야?”

늘 저를 예뻐하고 감싸 주었던 시현이 처음으로 얼굴을 굳히고 야단치자 보라는 얼굴이 빨개져서 눈물까지 글썽였다.

1655194595481.jpg“아니, 저는 정말 강 대리님이 예쁘셔서 그런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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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다른 상사들이 나서서 감쌌다.

16551945930209.jpg“강 대리도 참, 왜 밥상머리에서 사람을 면박을 주고 그래?”

16551945930209.jpg“거 칭찬을 해줘도 난리야. 하여튼 요즘은 세상이 어떻게 돼가는 건지, 예쁘다고 말하기도 무섭다니까.”

16551945930209.jpg“괜찮아, 괜찮아. 얼른 밥 먹어, 보라 씨.”

주로 남자 상사들이 오히려 시현을 나무라며 보라를 달랬다. 한숨을 쉬고 보리차를 마시는 시현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16551945930209.jpg“그나저나 강 대리는 청첩장 언제 돌릴 거야?”

16551945930209.jpg“그러게. 갈 사람은 빨리 가야 저런 소릴 안 듣지.”

씁쓸한 보리차를 끝까지 마시고, 시현은 대답했다.

16551945915512.jpg“……곧 돌릴까 해요.”

  * 시현은 수연에게 그동안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우진이 바람을 피운 일, 그리고 태하와의 일까지도.

16551946004167.jpg“세상에, 나쁜 놈.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시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수연은 눈물을 글썽였다.

16551946004167.jpg“그냥 시현이를 좋아한다는 그 친구한테 가면 안 돼?”

시현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51945915512.jpg“제 손으로 키운 애예요. 그렇게 되면 제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다 물거품이 돼버려요.”

어젯밤에 잠도 못 자고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16551945915501.jpg[난 알아. 당신이 날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거.]

태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보는 사람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걸 시현은 알고 있었다. 당장 친한 친구조차 ‘이러려고 지극정성으로 키웠느냐’고 깔깔대며 놀리는 판에, 누가 그렇게 생각해줄까. 시현은 참 스스로가 잘난 데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미모도 학벌도 집안도 내세울 것 없고, 심지어 부모도 없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태하를 훌륭하게 키워낸 것이었다. 그런 태하와 남녀 사이로 얽혀서 손가락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여태 떳떳하게,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못 할 짓이었다.

16551946004167.jpg“시현이는 그 친구한테 전혀 마음 없고?”

시현은 잠시 생각해보고 말했다.

16551945915512.jpg“남자로 보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수연에게만은 솔직해질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연만은 이해해 줄 것 같아서. 돌 던지지 않을 것 같아서.

16551945915512.jpg“그런데 그 애는 저한테 남자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거거든요. 그래서 남자로 보이기 전에, 저 도망가려고요. 지금이라면 아직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수연은 못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16551946004167.jpg“얘기 들어보니까 그 친구는 시현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상처받지 않겠어?”

16551945915512.jpg“금세 좋은 사람 생기겠죠. 어쩌면 여태 저 때문에 다른 사람 못 만나고 있었던 걸 수도 있고요.”

심지어 보라도 태하에게 관심이 있는 눈치 아니던가. 그래, 보라.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고 집안도 좋고……. 태하에게는 그런 상대가 어울린다.

16551945915512.jpg“저보다 훨씬 좋은 여자도 많은데, 제가 언제까지 그 애 앞길 막고 있을 순 없어요.”

16551946004167.jpg“하긴, 시현이 마음 알 것도 같아.”

수연이 한숨을 지었다.

16551946004167.jpg“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나랑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사람이었거든. 그런 줄도 모르고 좋아했더니 결국은 끝이 안 좋더라.”

16551945915512.jpg“왜요?”

한참 망설인 끝에, 수연은 중얼거렸다.

16551946004167.jpg“나는…… 죽은 사람이야.”

시현은 놀라서 수연을 쳐다보았다.

16551946004167.jpg“정말이야. 주민센터 가서 조회해보면 난 죽은 사람으로 나와. 사망신고가 되어 있거든. 이 가게도 다른 사람 명의 빌려서 하고 있는 거야.”

16551945915512.jpg“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16551946004167.jpg“살려고 그랬어. 살아만 있으면 한 번쯤은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수연은 그쯤에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뭔가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것 같아서, 시현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도로 자신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16551945915512.jpg“하여튼 그래서 저, 그냥 오빠하고 결혼 진행 계속할까 해요.”

16551946004167.jpg“정말 괜찮아? 다른 여자 만난 거, 용서하고 잊어버릴 수 있겠어?”

16551945915512.jpg“그 여자랑은 이미 정리했대요. 그리고 저도 태하한테 살짝 흔들린 건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1대 1인 걸로 치죠, 뭐. 제가 좀 손해 보는 느낌이지만.”

웃고 나서, 시현은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서 중얼거렸다.

16551945915512.jpg“처음 실수한 거잖아요. 한 번은 기회 주고 싶어요. 꼭 그 애한테서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빠하고도 진지하게 노력해보고 싶어요.”

우진이 자신을 속였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찌르듯 아팠다. 그렇다는 건 자신도 아직 우진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도 않을 테니까.

16551945915512.jpg“……아직, 사랑하니까요.”

다행히도 수연은 태하처럼 바보 같다고 탓하지 않았다.

16551946004167.jpg“그래. 시현이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믿고 응원할게. 똑똑한 우리 시현이가 어련히 잘 생각했겠어? 난 무조건 시현이 편이야.”

손을 꼭 잡아주며 말하는 수연의 존재가 더없이 든든했다. 만약에 엄마가 살아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16551945915512.jpg“곧 오빠 데려와서 소개시켜 드릴게요. 너무 밉다 말고 받아주세요. 나쁜 사람 아니에요.”

16551946004167.jpg“그래야지. 우리 시현이 신랑 될 사람인데.”

16551945915512.jpg“나중에 다시 편한 사이가 되면, 태하도 한번 데리고 올게요. 당장은 힘들겠지만요.”

16551946004167.jpg“그래. 참, 그 태하란 친구는 시현이랑 몇 살 차이라고 했지?”

16551945915512.jpg“저보다 일곱 살 어려요. 올해 스물여섯이요.”

태하의 나이를 들은 수연의 얼굴에 문득 그리움이 어렸다.

16551946004167.jpg“그럼 동갑이네.”

16551945915512.jpg“네?”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묻자 수연이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16551946004167.jpg“우리 아들하고 말이야. 그 애도 올해 한국 나이로 스물여섯이거든.”

시현은 깜짝 놀랐다. 수연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다 큰 자식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그렇다면 겨우 스무 살 때 낳은 아이라는 뜻인데.

16551945915512.jpg“몰랐어요. 이모한테 아들이 있었는 줄…….”

제 손으로 빈 잔에 소주를 따르려는 수연의 손에서, 시현이 병을 빼앗았다. 대신 수연의 잔을 채우며 시현은 물었다.

16551945915512.jpg“그럼 아드님은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어요?”

16551946004167.jpg“미국에 있어. 낳자마자 제 아버지가 데려갔거든.”

가득 채운 잔을 단숨에 비우고, 수연은 중얼거렸다.

16551946004167.jpg“지금쯤 어떻게 자랐을까. 딱 한 번만…… 만나보고 싶어.”

  * 시현은 수연의 가게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 근처까지 오자 저만치서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태하였다.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달려올 정도면, 여태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역시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해서 시현은 희미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태하는 물었다.

16551945915501.jpg“왜 이렇게 늦었어. 또 술 먹었어?”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16551945915512.jpg“아니, 안 먹었어.”

이제 술로 도망치는 건 그만하기로 했다. 어젯밤은 물론이고 아까 수연의 가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그러니까, 맑은 정신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16551945915512.jpg“태하야. 나 이제 너한테 대답할게.”

태하가 긴장한 얼굴로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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