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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어떻게 하면 나한테 와줄 거야? (29/181)

#29. 어떻게 하면 나한테 와줄 거야?2022.01.07.

1655194612587.jpg“태하야. 나 이제 너한테 대답할게.”

태하가 긴장한 얼굴로 숨을 멈췄다.

1655194612587.jpg“우진 오빠 용서해주기로 했어.”

시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충격받은 얼굴로 말을 잃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태하는 입을 열었다.

16551946125878.jpg“그 남자, 사랑하지 않잖아.”

1655194612587.jpg“왜 그렇게 생각해?”

16551946125878.jpg“당신을 속이면서 뒤에서 다른 여자 만나고 있던 남자를 사랑한다고?”

1655194612587.jpg“그래, 화가 나. 생각 같아서는 옷이라도 쥐어뜯고, 뺨이라도 때리고 싶어. 그렇다고 사랑했던 마음까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야.”

시현은 힘주어 말했다.

1655194612587.jpg“여태 만난 시간들을 봐서라도, 한 번은 기회 줄 수 있어.”

그러나 태하는 납득하려 하지 않았다.

16551946125878.jpg“한 번 배신한 인간은 두 번도 해. 지금 바보짓 하고 있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

1655194612587.jpg“바보짓이라는 거 알아도, 다른 길이 없을 때도 있어.”

16551946125878.jpg“왜 다른 길이 없어, 내가 있는데!”

시현은 고개를 들어 태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1655194612587.jpg“너는 다른 길들 중에서도 제일 아니야.”

제 목소리가 최대한 단호하게 들렸으면 했다.

1655194612587.jpg“설사 네 말대로 내가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쳐. 하지만 최소한 오빠하고는 사랑한 적이라도 있었어. 그러니까 다시 사랑하려고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어. 혹 마음대로 안 되더라도, 그 사랑한 추억 위에 의리든 정이든 쌓아가면서 살 수 있어. 그런데 너하고는 사랑한 적조차 없다고.”

16551946125878.jpg“나하고는 앞으로 하면 되잖아!”

시현은 픽 웃었다.

1655194612587.jpg“만약에 내가 너하고 사귀든 결혼하든, 한다고 쳐. 대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니?”

16551946125878.jpg“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태하가 발을 쾅 굴렀다.

16551946125878.jpg“좋아한 건 나야. 처음부터 당신을 원한 건 내 쪽이라고!”

1655194612587.jpg“그게 무슨 소용이야. 남들은 다 그런 눈으로 볼 텐데. 아, 저러려고 어릴 때부터 키웠구나. 다 꿍꿍이가 있었네. 잠깐, 혹시 미성년자일 때부터 건드렸던 거 아냐?”

더러운 시선, 추잡한 말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듯했다. 주은은 친구니까 그냥 놀리는 정도로 넘어갔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믿어주기는 할까?

1655194612587.jpg“나, 너 키우면서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을 정도로 깨끗한 마음이었어. 그 마음에 더러운 손가락질 같은 거 받고 싶지 않아.”

시현은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1655194612587.jpg“축하해달라고는 안 해. 그냥 모른 척만 해주라.”

우두커니 서 있는 태하의 옆을 지나쳐 가려고 한 순간, 팔을 붙들렸다.

16551946125878.jpg“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언제나 침착했던 표정이 처참할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그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시현은 눈을 감아 버렸다. 외면하는 시현에게, 태하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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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46125878.jpg“당신이 하라는 거 뭐든지 다 할게. 내 전 재산이라도 줄게.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게.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을게.”

1655194612587.jpg“…….”

16551946125878.jpg“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나한테 와줄 거야?”

그 손을 단호하게 뿌리치느라, 시현은 몰래 이까지 악물어야 했다.

1655194612587.jpg“다시 태어나.”

다행히도 쥐어짜낸 가짜 목소리는, 제 귀에도 차디차게 들렸다.

1655194612587.jpg“다음번엔 웬만하면 나보다 먼저 태어나. 아홉 살에 나 만나지 말고.”

  * 며칠 만에 만난 우진은 얼굴이 꽤나 초췌해져 있었다. 시현의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어지간히 마음고생을 한 것 같았다. 그러게 누가 그런 짓을 하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역시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정이 무섭다는 게 이런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시현은 입을 뗐다.

1655194612587.jpg“한 번이야.”

우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1655194612587.jpg“이번 한 번만 용서할게. 대신 두 번은 없어,”

16551946153891.jpg“시현아!”

전구가 반짝 켜지는 것처럼, 우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16551946153891.jpg“잘 생각했어. 나 정말 걔랑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그냥 밥…….”

1655194612587.jpg“됐으니까 그만해.”

그놈의 밥 몇 번 먹은 사이 타령을 또 듣기 싫어서, 시현은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1655194612587.jpg“밥을 몇 번 먹었는지, 어디서 데이트를 했는지, 둘이 어디까지 갔는지, 나 그런 거 하나도 안 궁금해. 안 묻기로 했으니까 오빠도 말하지 마.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자, 우리.”

16551946153891.jpg“어, 그래. 알았어. 알았어.”

우진이 두 손을 뻗어 건너편에 앉은 시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16551946153891.jpg“고마워, 시현아. 내가 너한테 잘할게. 살면서 다 갚을게. 앞으로 이런 일, 두 번 다시는 없을 거야. 나 진짜 맹세할 수 있어.”

몇 년 동안 늘 잡아 왔던 손인데, 왜 이렇게 생경하게 느껴지는 걸까. 어색하고 불편한 나머지 뿌리치고 싶은 것을, 시현은 애써 참고 말했다.

1655194612587.jpg“오빠가 그랬지? 언젠가 살면서 내가 흔들릴 때가 오면, 오빠가 내 손 꼭 잡아주겠다고.”

16551946153891.jpg“그럼. 그렇게 해야지. 내가 우리 시현이 꼭 잡아줘야지.”

그게 바로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는 대신, 시현은 우진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어서 이 손이 예전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날이 왔으면, 하고 속으로 빌면서. *

16551946172169.jpg“아니, 당장 다음 주에 상견례를 하자고?”

우진의 어머니, 정임이 아들의 말에 펄쩍 뛰었다.

16551946172169.jpg“뭐가 이렇게 무례해? 우리 일정은 고려도 안 한다니?”

우진이 한숨을 짓고 설명했다.

16551946153891.jpg“시현이가 우리 집에 인사 온 지 벌써 한참 됐잖아. 그쪽에 인사가 늦어진다고, 시현이네 작은어머니가 화가 많이 나셨대. 그래서 따로 인사 올 필요 없으니까, 다음 주 안으로 무조건 상견례 잡으라고 하셨다잖아.”

16551946172169.jpg“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딸 가진 죄인이 뭐가 그렇게 당당해? 날짜를 잡아도 우리가 잡아야지, 얻다 대고 통보야? 경우 없이.”

모욕이라도 당한 듯 씩씩대는 정임을, 우진이 달랬다.

16551946153891.jpg“그러지 말고 엄마, 이번엔 좀 눈 딱 감고 저쪽 하자는 대로 합시다, 응? 나 그렇지 않아도 시현이한테 약점 잡혔단 말이야.”

16551946172169.jpg“약점이라니?”

우진이 우물거리다 대답했다.

16551946153891.jpg“……몰래 다른 여자 만나다가 들켰어.”

찰싹! 정임이 아들의 등짝을 매섭게 내리쳤다.

16551946172169.jpg“어이구, 이놈아! 결혼까지 앞둔 여자를 두고, 그게 어디 할 짓이야?”

16551946153891.jpg“아야!”

아픈 등을 문지르며 우진이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16551946153891.jpg“아, 나도 안 그러고 싶었는데 걔가 먼저 나한테 살살 눈웃음쳤단 말이야. 시현이보다 훨씬 어리고 예쁜데 어떻게 안 넘어가?”

16551946172169.jpg“그 아가씬 몇 살인데?”

16551946153891.jpg“스물여섯 살.”

방금 아들의 등짝을 때려 놓고 정임은 금세 솔깃했다. 누가 봐도 서른세 살보다는 스물여섯 살 어린 며느리가 좋지 않은가. 젊으니까 애도 쑥쑥 잘 낳을 테고, 체력이 좋으니 회사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도 좋을 테고. 손자 얼굴은 보고 싶지만 아이를 봐주기는 싫다. 며느리가 애는 여럿 낳았으면 좋겠지만, 내 아들 등골 휘니까 맞벌이도 계속했으면 좋겠다. 그게 정임의 속마음이었다.

16551946153891.jpg“걔는 집안도 장난 아니야. 조한신문 사장 딸이라고.”

16551946172169.jpg“뭐?”

조한신문 삼십 년 지면 구독자인 정임의 귀가 번쩍 띄었다.

16551946172169.jpg“아니, 우진아. 그러면 지금 시현이네랑 상견례를 할 때가 아니라…….”

그 아가씨를 잡는 게 맞지 않겠느냐는 말을 차마 못 꺼내는 엄마의 마음을, 아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왜냐하면 본인도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16551946153891.jpg“그런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나랑 결혼을 하겠어? 그냥 잠깐 논 거지.”

우진은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주제 파악은 돼 있었다. 이제 그만 만나자고 선언한 이후, 보라는 아무리 연락해도 우진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뒤로 통화한 것은 딱 한 번, 시현에게 바람을 들켰다고 문자를 보냈을 뿐이었다.

16551946199437.jpg[저라는 것만은 절대 몰라야 해요. 만약에 강 대리님이 아시면 저 회사에서 얼굴 못 들고 다녀요. 그렇게 되면 그냥 확 죽어버릴 거예요.]

보라는 오로지 바람난 상대 여자가 저라는 게 들킬까 봐, 그 걱정만 했다. 이제는 우진도 알 것 같았다. 그냥 부잣집 아가씨가 잠깐 변덕을 부린 거라는걸. 왜 하필 나였나, 생각해 보면 그랬다. 단순히 사수인 강시현의 약혼자니까, 윗사람의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데서 오는 배덕감 혹은 우월감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우진도 화가 났다. 이거 완전히 갖고 논 거잖아? 확 그쪽 회사에다 까발려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랬다간 자신의 결혼도 물 건너간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간신히 용서를 받았지만, 바람 상대가 이보라였다는 것까지 알았다간 그때야말로 시현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였다. 이보라는 이미 놓친 꿩이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내 마당에 있는 닭인 강시현이라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16551946153891.jpg“하여튼 걔는 나랑 절대 결혼 안 할 거고, 이미 정리한 사이니까 엄마도 괜히 기대 품지 마. 나한테는 그나마 시현이가 최선이야.”

우진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16551946153891.jpg“나도 벌써 서른다섯이잖아. 시현이 놓치면 또 어느 세월에 다른 여자 만나서 결혼을 해? 시현이만 한 조건도 흔치 않으니까 엄마도 너무 욕심부리지 마, 엄마 아들 그 정도 아니야.”

16551946172169.jpg“아니, 내가 뭐랬니. 난 그냥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닐까, 한 거지.”

그러면서도 정임은 못내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 한번 혼이 나더니 정신이 바짝 든 모양이었다. 시현이 작은어머니의 얘기를 전하자마자 우진은 다음 날 곧바로 상견례 날짜를 잡아 왔다. 그것도 바로 다음 주로. 그쪽 부모님의 성정을 생각하면 못마땅해하셨을 게 뻔했지만, 왠지 시현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전처럼 예비 시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만약에 역정을 내셨다 한들, 그건 우진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찍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우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16551946153891.jpg- 어 시현아, 언제 퇴근해? 같이 저녁 먹을까 해서.

1655194612587.jpg“미안, 나 오늘 좀 일찍 나왔어. 방금 집에 들어왔는데.”

16551946153891.jpg-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까? 우리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솔직히 피곤해서 쉬고 싶었다. 괜찮다고 거절하려다 시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진이 노력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렇다면 나도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1655194612587.jpg“알았어, 그럼 와.”

이참에 수연의 가게로 데려가서 우진을 소개할까 싶었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우진이 도착할 시간쯤 맞춰서 밖으로 나가는데, 하필이면 건물 입구에서 들어오던 태하를 마주쳤다. 그냥 지나치려는 시현에게, 태하가 말했다.

16551946125878.jpg“얘기 좀 해.”

시현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

1655194612587.jpg“할 얘기는 어제 다 한 것 같은데, 뭐가 또 남았어?”

16551946125878.jpg“진짜로 그 결혼, 할 생각이야?”

1655194612587.jpg“그렇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해?”

태하는 잠시 고뇌하는 얼굴을 했다. 이윽고 그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16551946125878.jpg“당신이 아직 모르는 게 있어. 사실은…….”

하지만 태하는 말을 맺지 못했다.

16551946153891.jpg“이 새끼가, 아직도 우리 시현이한테 집적거려?”

우진이 다짜고짜 사이에 뛰어들어 태하의 멱살을 잡았다.

16551946153891.jpg“너 오늘 잘 걸렸다!”

시현이 놀라서 말리기도 전에 우진은 태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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