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너였구나, 쓰레기.2022.01.18.
“아홉 살에 만난 거, 그게 왜 내 잘못이야.”
평소 태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의 가장(假裝)을 알코올이 다 씻어 간 것일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빛이 시현을 향했다. 그린 것 같은 입술에서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당신이 나한테 온 거잖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피를 토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시현은 눈시울이 확 뜨거워졌다. 울고 싶은 것을 감추느라, 시현은 매섭게 태하를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어린애가 굶고 있는데 모른 척하란 말이니?”
뿌리쳐진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모른 척했어야지. 남들 다 하듯이 그냥 한번 쓱 쳐다보고 갈 길 갔어야지.”
그는 시현을 마구 몰아붙이듯 다그쳤다.
“할머니도, 담임선생님도 모른 척하던 애를, 당신이 왜? 당신이 뭐라고?”
이제 와서 내가 잘못했다는 건가. 시현도 울컥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키웠는데, 어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어떻게 네가! 소리치려는 순간, 태하가 중얼거렸다.
“그때 모른 척했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 버려지지 않아도 되잖아.”
처음 본 순간부터 예쁘다 여겼던 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기어이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태하는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멋대로 주워 놓고, 왜 이제 와서 모른 척해.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
시현은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그대로 현관문에 등을 기대 눈을 감자마자 뜨거운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커다란 짐승이 포효하듯, 격렬한 흐느낌이 안에서 흘러나왔다. 억누르고 또 억누르다 기어이 터져 나온 서러운 울음이었다. 울고 있다. 내가 키운 아이가. 나 때문에.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 보려고 노력해도 길은 보이지 않고, 그저 마음만 쥐어짜듯이 아팠다.
* 다음 날 아침, 회사에서 마주쳤을 때 태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단정한 차림새와 차분한 눈빛으로 돌아가 있었다. 시현을 향해 건네는 인사도 평소의 윤태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의 일이 마치 꿈속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하지만 시현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전날 밤에 그가 토해냈던 말들을, 서러운 흐느낌을. 더 깊이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시현은 필사적으로 다른 일에 매달렸다. 다행히도 일은 회사 일 외에도 산더미같이 있었다. 청첩장과, 드레스와, 신혼집과, 뭐 그런 것들. 시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먼저 웨딩 플래너를 만나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등을 예약했다. 어디서 사진을 찍든, 어느 숍 어느 실장에게 메이크업을 하든 사실 시현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플래너가 권해 주는 곳들 중에서 대충 예산에 맞춰서 골랐다.
“우리 시현이 너무 예쁘다!”
웨딩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올 때마다 우진은 입이 귀까지 걸렸지만 시현이 보기에는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딱 세 벌 입어보고 나서 제일 처음 입었던 드레스로 골랐다. 숍을 나올 때는 그게 어떤 드레스였는지 이미 기억도 안 났다. 청첩장은 인터넷에 검색해서 제일 위에 뜨는 업체에 들어가서 골랐다. 문구는 그냥 기본 문구로, 디자인도 제일 인기 많은 것으로 고르니 디자인에서 주문까지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신혼집으로 들어갈 아파트 전세도 구했다. 예산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두 사람의 직장과 가까운 곳에 있는 아파트로 몇 군데 돌아보고 그중 한 집으로 결정했다.
“그래도 신혼집인데 도배하고 바닥 정돈 새로 해야 되지 않겠어?”
“이 정도면 깨끗한데 뭐.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아.”
“역시 우리 시현이, 알뜰하다니까.”
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좋아했지만 사실 시현은 그냥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결혼을 준비하는 신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일에 흥미가 없었다. 그냥 뭐든 상관없으니까 빨리빨리 결정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진행하니 모든 일이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우진의 부모에게 인사드리는 데까지 몇 년이나 걸렸던 것을 떠올리며, 시현은 새삼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어려웠던 것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이렇게 빨리 진행될 수도 있는 거였구나. 여태 우진이 결혼을 미루고 미뤄왔던 게 맞구나. 한편 원앱팀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UX 기획자인 시현은 물론이고, UI 디자이너, 개발자 할 것 없이 돌아가면서 매일같이 깨졌다.
“대체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퍼소나를 어떻게 설정한 겁니까? 제발 데이터 기반으로 생각을 하라고 해도, 그냥 알아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자꾸 가정을 하니까 방향이 계속 엉망인 거 아닙니까!”
“이게 지금 작동하는 수준이라는 겁니까? MVP만도 못한 걸 던져놓고 난 내 할 일 다 했다, 하고 팔짱 끼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본부장은 그야말로 예민의 극치에 달해 있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로 가차 없이 질책했다. 천재 개발자인 젊은 본부장 앞에서, 팀원들은 반론 한마디 제기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깨졌다. 태하가 왜 저러는지 아는 시현은 속으로 팀원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같이 깨지고, 같이 열심히 고칠 뿐. 태하 때문에라도 빨리 결혼하는 게 맞는 거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일단 결혼을 해버리면 태하도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을 거 아닌가.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차라리 빨리 결혼을 해버려야 이 어지러운 마음이 좀 가라앉을 것 같았다. 6월이면 너무 빠르지 않은가, 생각했던 것도 처음뿐이었다. 이제는 도리어 6월 마지막 주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빨리 결혼식 날이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현은 하루하루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
“자. 미주 씨한테 제일 먼저 주는 거야.”
시현이 휴게실로 미주를 데려와서 청첩장을 건넸다.
“축하해, 시현 씨! 아유, 청첩장 예쁘게 잘 나왔다.”
청첩장을 펴서 결혼식 날짜를 본 미주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기 있잖아. 혹시…….”
시현은 끝까지 듣기도 전에 대답했다.
“아니야, 속도위반.”
“하여튼 눈치도 빠르긴.”
미주가 웃었다.
“그럼 왜 이렇게 서둘러? 올해 안으로 한다더니 웬 6월?”
“말했잖아. 우리 작은어머니 성격이 좀 유난스러우시다고. 사촌동생한테 결혼할 남자가 생겼는지, 제발 빨리 좀 가라고 들들 볶아대셔서.”
“아, 뒷차 나가야 하니까 빨리 앞차 빼달라 이거였구나?”
“응.”
한참 청첩장을 들여다보던 미주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야?”
주어는 없었지만 이번에도 시현은 금세 알아들었다.
“그냥 잠깐 싸웠던 거야. 결혼 준비하면서 안 싸우는 커플이 어디 있어?”
“그렇지. 저기, 저번에 목걸이 운운한 건 미안해, 시현 씨. 내가 말실수했어.”
전에 미주가 혼잣말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분명히 목걸이 사는 걸 봤는데……. 이거 혹시 딴 년 갖다 준 거 아니야?]
지금 생각해도 소름 끼치도록 눈치가 빨랐다.
“아냐. 오빠한테 물어보니까, 산 거 맞는데 도로 환불했다더라. 내가 워낙 알뜰해서 비싼 거 샀다고 혼날 것 같더래.”
시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짓느라 입가가 다 아팠다.
“그걸 또 환불을 했대? 하여튼 남자들, 여자를 그렇게 몰라요. 비싼 거 사 왔다고 타박하면서도 돌아서서 웃을 건데.”
“그러게 말이야. 내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잖아.”
“하여튼 정말 축하해, 시현 씨. 결혼식은 내가 공사다망한 와중이지만 꼭 갈게.”
“그래. 공사는 다 망해도 내 결혼식은 꼭 와주라.”
시현이 먼저 휴게실을 나가고 나서, 혼자 남은 미주가 중얼거렸다.
“방금 저거, 억지로 웃은 거지?”
둘째가라면 서러운 미주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최소한 목걸이 건은 거짓말이다.
‘그럼 대체 그 목걸이가 어디로 간 거지? 사는 걸 내가 분명히 봤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휴게실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어, 보라 씨 왔어?”
반갑게 마주 인사하는데, 문득 보라가 걸고 있는 목걸이가 미주의 눈에 띄었다. 클로버 모양의 목걸이였다.
‘음?’
순간 흠칫했다가 미주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요즘 저 목걸이 하고 다니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며 미주는 휴게실을 나왔다. *
- 본부장님, 개발팀 이보라 씨가 뵙고 싶다고 합니다.
당장 꺼지라고 전해요. 애꿎은 비서에게 전화기에 대고 호통을 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태하는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잠시 후 보라가 들어왔다. 화사한 프린트의 블라우스에 H라인 스커트가 날씬한 몸에 맞춘 듯이 잘 어울렸다.
“뭡니까?”
“혹시 청첩장 받으셨나, 해서요.”
보라가 하얀 봉투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주어도 없는데 가슴이 철렁해서, 태하는 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머, 아직 못 받으셨나 봐요. 다른 사람들 다 받았는데.”
보라가 생글거리며 다가와 봉투를 건넸다. 봉투에서 청첩장을 꺼내 펼치는 태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신랑 김우진. 신부 강시현. 검은 글자가 하나하나 화살이 되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태하는 눈을 감아버렸다.
“참석하실 거죠? 원앱팀 팀원 결혼식인데 본부장님이 빠지면 안 되잖아요.”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 곁에 선 시현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어지러웠다. 견딜 수 있을까, 내가.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소리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의 손목을 잡고 뛰쳐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저하고 같이 가요.”
보라의 말에 태하는 겨우 눈을 떴다.
“뭐?”
“제가 곁에서 본부장님 꼭 붙잡아 드릴게요. 흔들리지 않게.”
태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당장 나가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자칫하면 더 심한 말을 퍼부어버릴 것 같아서, 태하는 그렇게만 말하고 보고 있던 자료에 시선을 옮겼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엉뚱한 말이었다.
“좋아해.”
태하는 고개를 들었다. 생글거리던 여자가, 어느덧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고등학교 때부터 너만 바라봤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글썽일 것 같은 표정으로, 보라는 호소했다.
“그 여자는 그냥 옛날 과외선생일 뿐이잖아. 대체 언제까지 못 잊을 건데?”
태하가 몸을 일으켰다. 다가가서 보라의 앞에 선 그가, 팔짱을 낀 채 보라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눈코입 하나하나를 찬찬히 뜯어보는 것처럼.
“…….”
말없이 전해져 오는 위압감에 보라는 마치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한참 후에야 태하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 너였구나.”
이제야 알아보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와락 반가워진 보라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본 순간.
“……쓰레기.”
태하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