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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결혼 준비 (33/181)

#33. 결혼 준비202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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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태하는 아침 수업 시작 전에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 고등학교 도서관치고는 제법 장서가 풍부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올해 초에 아버지인 레온이 학교 도서관에 1억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책이 부쩍 늘었다. 특히 웹이나 앱 개발 쪽의 책들이 그랬다. 말한 기억도 없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관심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태하는 자바스크립트에 대한 책을 몇 권 골라 들었다.

16551946706544.jpg“널 좋아해.”

갑자기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태하는 흠칫 놀랐다. 솔직히 0.1초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16551946706549.jpg‘이젠 남자한테까지 고백을 받나?’

돌아보자 책장 너머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긴장한 얼굴로 마주 서 있는 남학생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태하와 같은 반 친구였다. 아, 내가 아니었구나. 태하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최근에 하루가 멀다 하고 고백을 받는 바람에 잠시 착각했다. 남의 고백을 엿듣는 취미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학교 공부와 앱 개발, 그리고 짝사랑만으로도 이미 태하의 머릿속은 과부하 직전이었다.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태하는 발소리를 죽여 도서관을 나가려 했다.

16551946706554.jpg“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16551946706544.jpg“뭔데?”

16551946706554.jpg“윤태하 휴대폰 번호 좀 알려줘.”

여자아이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태하는 걸음을 멈췄다.

16551946706544.jpg“어? 그건 나도 모르는데…….”

방금 고백한 친구가 곤란한 듯이 말했다.

16551946706554.jpg“너 윤태하랑 같은 반이잖아.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면 알 거 아냐?”

16551946706544.jpg“그런데 걔는 친한 애가 하나도 없어서, 아마 다른 애들도 모를 텐데.”

하지만 여자아이는 끈질겼다.

16551946706554.jpg“너 나 좋아한다며. 그 정도도 못 해줘?”

여태 태하도 수도 없이 고백을 받았다. 받아줄 수는 없지만, 좋아해주는 마음은 늘 고맙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아니까. 그래서 무뚝뚝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웬만하면 상대가 상처받지 않도록 부드럽게 거절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고맙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다든가, 학생이니까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런데 용기를 내서 자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상대에게, 그 마음을 이용해서 다른 남자의 전화번호를 묻다니. 태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책장 사이로 여자아이를 슬쩍 넘겨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애인지 궁금했다.

16551946706554.jpg“내일까지 휴대폰 번호 알아 와. 그럼 밥 한 번은 같이 먹어줄게.”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얼굴을 보고도 예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미 태하의 미적 기준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 맞춰져 있기도 했지만, 예쁘다고 생각하기에는 방금 들은 말이 너무 최악이었다. 부디 방금 고백한 친구가 정신을 차렸기를 빌며, 태하는 대출 노트에 이름을 적은 후 빌린 책을 들고 조용히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날 점심때의 일이었다. 급식실로 향하는 태하의 앞을, 아침에 봤던 그 여자아이가 가로막은 것은.

16551946706554.jpg“이거,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먹어줄래?”

여자아이는 뺨까지 살짝 붉히고 도시락을 내밀었다. 아침에 다른 친구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수줍은 듯, 떨리는 목소리마저도 다 연기라는 걸 태하는 금세 눈치챘다. 정말 수줍었다면 굳이 남들 다 보는 복도에서 이러진 않겠지. 역시나 여기저기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1946706544.jpg“6반 이보라 아냐?”

16551946706544.jpg“대박. 이보라가 윤태하한테 고백하는 거야?”

반응을 보아하니 꽤나 유명한 여자아이인 것 같았다. 물론 태하는 몰랐고, 앞으로도 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도시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태하는 말했다.

16551946706549.jpg“치워.”

여태 자신에게 고백한 상대 중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는 냉정한 말이었다. 흠칫 놀라 바라보는 여자아이의 얼굴에 대고, 태하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16551946706549.jpg“치우라고.”

수많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거절당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목덜미부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하는 상대의 옆을 지나 제 갈 길을 재촉했다. 방금 들은 상대의 이름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운 후였다. *

1655194673522.jpg“아, 너였구나.”

이제야 알아보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와락 반가워진 보라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 순간.

1655194673522.jpg“……쓰레기.”

태하가 말했다.

1655194673522.jpg“여전하구나, 넌.”

태하의 얼굴에 미소까지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보라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16551946706554.jpg“지금 뭐라고 했어?”

학창시절은 물론, 직장에서까지 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녀였다. 그런데 쓰레기라니.

16551946706554.jpg“강시현 일로 이러는 거라면, 그건 나도 너 때문에 화가 나서……!”

1655194673522.jpg“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태하가 말을 가로챘다.

1655194673522.jpg“내가 널 싫어하는 건 강시현이랑은 아무 상관없어.”

16551946706554.jpg“그럼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여유로운 얼굴로, 태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걸 왜 설명해줘야 하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심지어 그는 보라를 향해 귀찮다는 듯 턱짓까지 했다.

1655194673522.jpg“나가. 강제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보라는 눈을 감았다. 자존심과 미련이 가슴속에서 치열하게 교차했다. 마음 같아서는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나도 너 같은 거 됐다고 쏘아붙여 주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윤태하는 쉽게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남자였다. 이렇게 회사에서 다시 만난 것도 하늘이 주신 기회나 다름없는데. 고등학교 때 그랬듯이, 보라는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윤태하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그때도, 지금도. 뺨을 후려치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보라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16551946706554.jpg“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내가 너한테 다 맞출게, 태하야.”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로, 보라는 태하에게 물었다.

16551946706554.jpg“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날 봐줄 거니?”

연극이라도 구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기대서 바라보고 있던 태하가, 이윽고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1655194673522.jpg“다시 태어나.”

하얗게 질린 보라를 벌레 보듯 바라보며,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1655194673522.jpg“다음번엔 강시현으로 태어나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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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긋지긋했던 꽃샘추위도 물러가고, 4월 중순이 되자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너무 더워지기 전에 촬영하는 게 좋다는 웨딩 플래너의 조언에 따라서 예정보다 일찍 웨딩 촬영이 이루어졌다. 드레스를 입고도 좀처럼 웃음이 나오지 않아서 시현은 촬영 내내 꽤나 고생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니 역시 포토그래퍼는 프로였다. 사진 속의 자신은 누가 봐도 행복에 한껏 취해 있는 신부였다. 웨딩 촬영이 끝나자마자 우진은 신혼집 입주를 서둘렀다. 마침 먼저 살던 세입자가 예정보다 빨리 나가게 됐다며, 그때 맞춰서 빨리 이사하자고 재촉을 해댔다.

16551946766018.jpg“아직 결혼식은 두 달이나 남았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16551946766023.jpg“난 너 하루라도 그 집에 더 두기 싫어.”

시현도 우진의 심정을 이해했다. 우진은 태하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게 사실이었다. 그러니 태하와 바로 옆집에 사는 게 싫은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식도 올리기 전에 신혼집 입주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행히 2년 전에 인테리어를 새로 한 집이라 따로 손볼 곳은 없어서, 살림만 채우면 됐다. 마침 우진의 작은형이 가전제품 판매점에서 일하고 있어서, 가전제품은 모두 직원가로 한 번에 구입할 수 있었다. 나머지 가구나 생활용품 등의 살림살이는 모두 예비 시어머니인 정임이 대신 골라서 채워 넣었다.

16551946766027.jpg“너 바쁜데 신경 안 써도 된다. 내가 다 알아서 하마.”

정임은 신혼살림 고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시간만 나면 아들의 팔짱을 끼고 새 신부라도 된 듯 신이 나서 가구 매장이니, 생활용품 매장이니 쇼핑을 다녔다. 다른 신부들 같으면 벌써 인터넷에 이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글 올리고 난리가 났을 일이지만, 시현은 그냥 정임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오히려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신혼집은 하나부터 열까지 정임의 취향대로 꾸며졌다. 가구와 가전부터 시작해서 그릇 세트, 주방기구, 하다못해 커튼과 침대 시트까지도 모두 정임이 고른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다 꾸며진 신혼집에 가서도 시현은 아무 감흥이 들지 않았다. 그냥 생판 남의 집 같을 뿐이었다. 여기가 자신의 신혼집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점은, 오로지 거실에 걸린 웨딩 사진뿐이었다.

16551946766027.jpg“어떠니? 내 안목이 썩 꽨찮지?”

우쭐해하는 정임의 말마따나, 화이트 톤의 가구로 꾸며진 신혼집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기야 신혼살림이라고 하니 파는 쪽에서도 알아서 권해줬겠지만, 만약에 정임이 검정 자개 가구로 쫙 깔았더라도 시현은 그저 그러려니 했을 거였다.

16551946766027.jpg“요즘 세상에 나 같은 시어머니 없다, 얘. 며느리 힘들까 봐 귀찮은 일은 다 해주고. 안 그러니?”

아무 감흥이 없는 시현을 붙들고, 정임은 생색을 내고 또 냈다. 그렇게 신혼집에 입주할 준비가 완료되었지만, 아직 시현은 원래 살던 원룸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아직 월세 계약 만료 전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신혼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 손으로 고른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집. 나중에 살면서도 정이 붙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우진에게는 새 세입자가 아직 찾아지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 입주를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었다. 회사에까지 청첩장을 돌리고 나자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16551946706544.jpg“강 대리, 축하해. 준비는 잘돼가고?”

16551946706544.jpg“축하해요 강 대리님! 결혼식 꼭 갈게요.”

친구들에게는 다음 달에 모여서 밥을 사면서 청첩장을 돌리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다.

16551946706544.jpg- 그땐 미안했어, 시현아. 내가 괜히 오해해서 입방정 떨었네.

전에 태하와 함께 있을 때 호텔에서 마주쳤던 친구, 주은의 반응에 새삼 태하의 고백을 거절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신랑이 태하였다면, 청첩장 모임 따위는 창피해서 할 수도 없었을 텐데. 결혼 준비가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는데, 시현은 왠지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

16551946706554.jpg“강 대리니임.”

보라가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오며 눈치를 보았다.

16551946706554.jpg“저번에는 제가 정말 죄송했어요.”

얼마 전 개발팀까지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보라가 태하와 시현을 엮었었다.

16551946706554.jpg[우리 강 대리님 너무 예쁘고 귀여우신 거 사실이잖아요. 딱 일곱 살 연상이고. 그래서 저는 처음 듣는 순간부터 혹시 본부장님이 강 대리님 말씀하신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요.]

덕분에 시현은 그 자리에서 놀림감이 되어버렸고.

16551946766018.jpg“또 그럴 거야?”

16551946706554.jpg“아니요.”

보라가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까지 해서, 시현은 픽 웃어버렸다. 이런데 내가 어떻게 널 미워하겠니.

16551946706554.jpg“대리님 이제 화 풀리신 거죠? 그럼 저랑 데이트해요.”

그렇게 시현은 보라와 둘이 밖에 나가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16551946706554.jpg“대리님, 옛날에 본부장님 과외 하셨었죠?”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보라가 물었다. 시현은 깜짝 놀라서 보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16551946766018.jpg“응?”

16551946706554.jpg“사실은 저 고등학교 때 본 적 있거든요. 카페에서 두 분이 같이 공부하는 거.”

그제야 시현은 얼마 전 보라가 실없는 말을 했던 이유를 알았다. 어쩐지, 아무 생각 없이 한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16551946766018.jpg“그보다 훨씬 전부터 가르쳤었어. 같은 동네에 살았거든.”

16551946706554.jpg“언제부터요? 중학교 때?”

16551946766018.jpg“뭐, 대충 그때쯤부터. 그래서 내가 보기엔 아직도 어린애 같아.”

일부러 소리 내어 웃고, 시현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16551946766018.jpg“괜히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은 말고.”

16551946706554.jpg“그럼요. 입 딱 다물고 있을게요.”

보라가 덩달아 쉿, 해 보였다.

16551946706554.jpg“결혼 준비는 잘돼가세요?”

16551946766018.jpg“신혼집 입주 준비도 다 됐고, 웨딩 촬영도 끝났고. 이제 신혼여행 예약만 남았어. 당장 결혼식장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아직도 두 달이나 남았네.”

16551946706554.jpg“저도 나중에 대리님같이 좋은 분 만나서 결혼하고 싶어요.”

보라가 부러운 눈으로 쳐다봐서, 시현은 도리어 궁금해졌다.

16551946766018.jpg“보라 씨 눈에는 우진 오빠가 그렇게 괜찮아 보였어? 오빠 잘 모르잖아.”

우진과 보라는 지금까지 몇 번 마주쳐서 인사한 적이 있고, 그 외에는 셋이서 짧게 커피 한잔했던 게 전부였다.

16551946706554.jpg“에이, 얼굴만 봐도 알죠. 뭐랄까, 평생 자기 아내밖에 모르고 살 관상?”

보라가 웃었다.

16551946706554.jpg“그러니까 대리님, 꼭 그분이랑 결혼해서 행복하셔야 해요.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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