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쓰레기 예물 (34/181)

#34. 쓰레기 예물2022.01.25.

16551947472427.jpg“어떠니, 아들?”

정임이 핸드백을 어깨에 척 메고 이리저리 모델처럼 포즈를 취해 보였다.

16551947472432.jpg“이야, 우리 엄마 진짜 젊어 보인다. 엄마가 시집가는 거 같은데?”

쌍 엄지를 날리는 우진에게, 정임이 곱게 눈을 흘겼다.

16551947472427.jpg“얘도 참. 엄마 놀리는 거니?”

명품 매장 직원이 곁에서 장단을 맞췄다.

16551947472442.jpg“보통 젊은 분들이 많이 하시는 모델인데, 고객님께는 딱 맞춤이네요. 어쩜 뭘 들어도 그렇게 소화를 잘해내실까요?”

칭찬을 받은 정임이 한껏 우쭐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시현에게도 재촉하는 눈빛이 날아왔다. 너도 어디 찬사를 해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시현은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

16551947472447.jpg“잘 어울리세요, 어머님.”

영혼 없는 반응이 느껴졌는지, 정임이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16551947472427.jpg“하여튼, 나이도 젊은 애가 애교라는 게 없다니까.”

시현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정임은 벌써 세 시간째 이 매장, 저 매장 돌면서 온갖 가방을 들어 보고, 그때마다 예쁘다, 잘 어울린다는 말을 강요하고 있었다. 원래 애교라곤 있지도 않지만, 있었더라도 바닥날 판이다.

16551947472432.jpg“그럼 엄마, 이걸로 할래요?”

16551947472427.jpg“너무 비싸지 않겠니? 세상에, 요만한 가방이 천만 원 가까이 하는데.”

이제 와서 정임이 사양하는 척을 했다.

16551947472432.jpg“아니, 내가 엄마가 둘이야 셋이야? 하나밖에 없는 엄마, 막내아들 장가보내면서 이 정도는 당연히 받아야지.”

예뻐 죽겠다는 듯, 정임이 서른다섯 살 먹은 막내아들의 뺨을 꼬집었다.

16551947472427.jpg“엄마가 오늘 기분이 너무 좋다. 아들 잘 둬서 이렇게 비싼 가방도 다 가져보고!”

그 돈이 시현에게서 나온다는 건 까맣게 잊은 듯한 말투였다. 처음에 200만 원짜리를 보는 것으로 시작한 예단 가방 쇼핑은, 결국 거의 천만 원에 가까운 가방을 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시현은 너무 지쳐서, 천만 원이고 이천만 원이고 좋으니 이제 제발 좀 끝내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16551947472442.jpg“지금은 재고가 없고, 다음 달 초쯤에 입고 예정입니다. 그때 저희가 전화 드릴 테니까 오셔서 결제하시면 됩니다.”

아직 회사에 신청한 퇴직금 담보 대출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며, 시현은 물었다.

16551947472447.jpg“혹시 선결제해야 하나요?”

16551947472442.jpg“선결제는 받지 않으니 그냥 구매 시에 결제하시면 됩니다. 대신 혹시 그사이에 가격 인상이 있으면 인상된 가격으로 결제 부탁드립니다.”

시현은 여태 오십만 원짜리 핸드백을 사본 적도 없었다. 대출까지 받아서 천만 원짜리 시어머니 명품 백을 살 생각을 하니 역시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16551947472447.jpg“그럼 전화 주세요.”

매장에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나오면서, 시현은 입사 때부터 쓰던 오래된 핸드백을 어루만져 보았다. 세일 때 이십만 원인가 줬었지, 아마. 앞에서 우진이 정임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나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16551947472432.jpg“엄마. 예단 가방 좋은 거 받았으니까, 우리 시현이도 예물 좋은 걸로 해줄 거지?”

16551947472427.jpg“벌써부터 제 마누라 챙기기는. 알았어, 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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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백화점을 나와서도 아직 오늘의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정임은 시현을 집으로 데려가더니, 안방 장롱 깊숙한 곳에서 황금빛 보자기로 싸인 상자를 꺼냈다.

16551947472427.jpg“자, 네 예물이다.”

정임이 상자를 보자기째 시현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시현은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어보았다. 솔직히 별 기대 안 했는데, 안에서 나온 것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커다란 상자 안에서는 다시 귀금속 보관용 작은 상자들이 여러 개 나왔다. 그 안에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 세트로 들어 있었다. 정임이 마치 대가댁 마나님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16551947472427.jpg“내가 평생 모은 패물들이란다. 이제 며느리나 줘야지, 다 늙어서 다이아 따위 끼고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겠니?”

루비 세트, 사파이어 세트, 진주 세트, 다이아몬드 세트. 각각 모두 귀걸이, 목걸이, 반지까지 풀세트였다. 디자인이 하나같이 올드해서 젊은 시현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만큼 보석 하나하나가 큼직했다. 특히 다이아몬드 세트의 반지는 언뜻 보아도 2캐럿은 되어 보였다.

16551947472432.jpg“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우리 시현이 횡재했네!”

호들갑을 떠는 우진에게, 정임은 마치 누가 들을까 무섭다는 듯 쉿, 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대 보였다.

16551947472427.jpg“네 윗동서들한텐 이런 거 안 줬으니까 암말 말고. 괜히 막내며느리만 편애한다고 시애미 원망 들을라. 너희만 집값 안 보태 줬으니까 그 대신 주는 거야.”

정임이 다시 보자기로 상자를 꽁꽁 싸매어 돌려주었다.

16551947472427.jpg“자, 너도 잘 보관했다가 네 며느리에게 물려주거라.”

여태 지치고 속상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도 같았다. 보석을 좋아한다든가 값나가는 물건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래도 정임이 그렇게 야박한 사람은 아니구나 싶어서였다. 어머님도 다 생각이 있으셨던 거구나.

16551947472447.jpg“감사합니다, 어머님.”

결혼생활에 작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원래 시현은 보석이나 귀금속 따위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특히 반지는 거친 손이 콤플렉스여서 아예 끼지 않았다. 그래서 정임의 말대로 그냥 잘 보관하고 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우진이 반대했다.

16551947472432.jpg“엄마가 너 생각해서 준 건데 그걸 그냥 묵혀만 두면 어떡해?”

16551947472447.jpg“어머님께서 잘 보관하라고 하셨잖아.”

16551947472432.jpg“그거야 잃어버리지 말라고 하신 거지. 가끔씩 시댁 갈 때 끼고 걸고 보여드려야 선물한 사람도 흡족하지 않겠어?”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단지 디자인이 너무 올드하고 반지 같은 경우에는 아예 사이즈가 맞지 않아서, 이대로는 착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전체적으로 세팅을 다시 하기로 했다. 주말에 시현은 보석들을 싸들고 주얼리 숍을 찾았다. 리세팅 전문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일부러 검색해서 찾아간 곳이었다.

16551947472447.jpg“일상생활에서도 착용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바꾸고 싶어요. 좀 젊어 보이는 스타일로요.”

보석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세공사가 잠시 후에 물었다.

16551947472442.jpg“혹시 깊은 의미가 있는 물건인가요?”

16551947472447.jpg“이번에 결혼하면서 시어머님이 주신 것들이에요.”

세공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16551947472442.jpg“이 보석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비싼 돈 들여서 세팅을 새로 할 가치가 없어요. 저희가 매입을 하더라도 금값밖에 못 쳐드릴 정돕니다. 금값도 14k라 얼마 안 되니까, 이래저래 그냥 차라리 새로 사시는 게 낫습니다.”

놀람과 동시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16551947472447.jpg“혹시 가짜 보석인가요?”

16551947472442.jpg“인조는 아닌데, 가치는 거의 없어요.”

시현은 영문을 몰랐다. 진짜 보석이라면 다 비싸고 좋은 건 줄만 알았는데.

16551947472442.jpg“일단 루비는 함침처리라고, 저급 루비에 납유리 성분을 충전시켜서 투명도를 개선한 루비입니다. 일반 루비 가격의 100분의 1, 50분의 1 가격도 될까 말까예요.”

세공사는 보석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16551947472442.jpg“또 사파이어는 일명 먹사파이어라고, 옛날 사모님들이 많이 하시던 건데요. 투명도가 거의 없고 색깔이 어두워서 보석으로서 가치는 별로 없습니다. 그나마 진주는 천연 진주이긴 한데, 너무 오래 사용해서 광택이 많이 죽었고 흠집도 많습니다. 원래 진주는 대를 물리기 힘든 보석이거든요.”

마지막 다이아몬드 세트를 가리키며, 세공사는 민망한 듯이 말했다.

16551947472442.jpg“저어 그리고 이건, 큐빅 지르코니아입니다.”

얼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금값이라도 쳐드릴까요, 하고 묻는 걸 그대로 싸가지고 나왔다.

16551947472447.jpg“시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처음부터 예물 따위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나는 것은 보석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기만당한 느낌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냥 금반지나 하나 받았으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너만 주는 거라고 갖은 생색을 내던 정임과, 옆에서 우리 시현이 횡재했다고 장단을 맞추던 우진을 생각하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주얼리 숍에 가져가 보지 않고 그냥 보관했더라면 평생 감사할 뻔했다. 과분한 보물을 받았다고. 다행히 해가 져가고 있었다. 수연의 가게가 슬슬 영업을 마칠 시간이었다. 보석들을 보자기째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시현은 택시를 탔다. 안 좋은 일이 있거나 생각이 많아지면 술로 도망치는 버릇은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것이 얼마 전이었다. 그래서 술은 입에도 안 댄 지가 꽤 됐는데, 오늘은 마시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수연이라면 따뜻하게 위로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현은 수연의 가게로 향했다. * 벌써 영업이 끝났는지, 가게 간판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테이블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수연의 옆모습이 보였다. 아직 문 닫을 시간은 안 된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며 시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16551947472447.jpg“이모, 저 왔어요.”

16551947521233.jpg“어, 시현아. 어서 와.”

반갑게 맞이하는 수연의 눈가가 새빨개져 있어서 시현은 깜짝 놀랐다. 울어서 부은 눈이었다.

16551947472447.jpg“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계속 고개를 젓던 수연은, 계속된 추궁에 결국 입을 열었다.

16551947521233.jpg“가게를 접어야 할 것 같아.”

16551947472447.jpg“갑자기 왜요? 장사 잘된다고 좋아하셨잖아요.”

수연이 간간이 눈물을 훔치며 이야기한 사정은 이러했다. 수연은 주민등록상 사망자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휴대폰도 아는 사람 명의로 쓰고 있는 마당이니 가게라고 자기 명의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게도 역시 아는 사람 명의로 계약해서 열었던 건데, 그 사람이 하루아침에 가게 보증금을 빼가지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즉 사기를 당한 거였다.

16551947521233.jpg“주인이 가게 보증금 다시 채워놓든지, 아니면 다음 주까지 비워달라고 하네.”

눈물을 삼키는 수연을 보고 있자 슬픔이 아닌 분노가 치밀었다. 이십 대부터 남의 집 가정부 살이를 하던 수연이다. 그 후로도 인생이 평탄했을 리 없었다. 신분이 저러니 제대로 된 일은 하기 힘들었을 거고, 기껏해야 허드렛일이나 전전했겠지. 그런 사람이, 평생 힘들게 모아서 사십 대 중반이 돼서야 겨우 마련한 가게를……!

16551947472447.jpg“그래서, 이제 어쩌실 거예요?”

16551947521233.jpg“돈이 없으니 가게 비워야지 뭐. 어차피 그 사람 명의로 계속할 수도 없으니까.”

수연이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였지만, 그 얼굴도 금세 도로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16551947472447.jpg“보증금이 얼만데요?”

입에 담기조차 버거운 큰돈이라는 듯, 수연은 힘들게 대답했다.

16551947521233.jpg“3천만 원.”

그 돈이 수연의 전 재산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3천만 원. 예단비로 대출받으려던 것과 마침 딱 같은 금액. 시현은 마음속의 저울에 두 사람을 올려보았다. 어린 시절, 마음 붙일 곳 없던 자신을 엄마처럼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수연. 허섭스레기나 다름없는 예물을 쥐어주고 갖은 생색을 다 냈던 예비 시어머니. 저울은 금세 한쪽으로 기울었다. 정임의 분노한 얼굴이 잠시 떠올랐지만 별로 무섭지 않았다. 어차피 귀여움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어머니 명품 백 따위에 들일 돈이 있으면 수연을 돕고 싶었다. 작은어머니에게 생리대값 달라는 말도 못 하는 시현이 걱정돼서, 쫓겨나던 와중에도 기어이 제게 돈뭉치를 쥐여주던 수연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시현은 수연의 손을 잡았다.

16551947472447.jpg“이모, 그 돈 제가 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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