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왜 네가 그 말을 하는데 (35/181)

#35. 왜 네가 그 말을 하는데2022.01.28.

16551947640293.jpg

16551947640298.jpg“이모, 그 돈 제가 해드릴게요.”

16551947640303.jpg“응?”

수연이 놀란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16551947640298.jpg“가게 명의도 제 명의로 바꿔요. 그럼 되잖아요.”

수연은 얼른 손을 잡아 빼며 고개를 저었다.

16551947640303.jpg“아니야. 시현이한테 그렇게 폐 끼칠 수 없어.”

16551947640298.jpg“저 그냥 드린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투자하는 거예요.”

시현은 차분히 설명했다.

16551947640298.jpg“요즘 회사 월급만 가지고는 모자라서 투잡이 유행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투자해서 제 명의로 가게 열고, 이모는 경영만 하시는 거예요. 투자금은 제가 매달 이자 붙여서 조금씩 돌려받고요. 은행 이자보다 더 받으면 저도 손해 아니잖아요.”

16551947640303.jpg“그래도 안 돼.”

수연은 강경했다.

16551947640303.jpg“시현이도 결혼 준비 중이잖아. 이것저것 돈 들어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엉뚱한 데 돈을 쓰겠어? 내 걱정은 마. 나는 어디 가서 건물 청소를 해도 되고, 식당 설거지를 해도…….”

16551947640298.jpg“이모.”

시현은 매달리다시피 수연의 팔을 잡았다.

16551947640298.jpg“저 친정엄마도 없고, 너무 외롭고 힘들어요. 이모 멀리 가는 거 싫어요. 그냥 좀 곁에 있어 주면 안 돼요?”

16551947640303.jpg“시현아.”

16551947640298.jpg“사실은 저 오늘도 속상한 일이 있어서 이모한테 하소연하려고 찾아온 거예요. 이렇게 찾아왔을 때, 이모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손으로 키운 태하마저 멀리해야 할 사이가 된 마당에, 마음 붙일 곳이라고는 오로지 수연뿐이었다. 속상할 때도, 가까이에 수연이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다.

16551947640303.jpg“하지만, 미안해서 어떻게…….”

결국 눈물을 글썽거리는 수연의 어깨에, 시현이 응석을 부리듯 살짝 머리를 기댔다.

16551947640298.jpg“미안해하지 마세요. 저도 이모가 필요해서 그래요.”

그 시절,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보듬어주던 사람. 어깨에 기대자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수연이 어린 소녀를 대하듯, 시현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16551947640303.jpg“그래, 시현아. 이모가 시현이 곁에 있어줄게.”

  * 다음 날, 시현은 서류를 들고 태하를 찾아갔다.

16551947640298.jpg“본부장님. 전에 부탁드렸던 퇴직금 담보 대출 건으로 결재 부탁드립니다.”

태하는 대번에 차가운 얼굴을 했다.

16551947657068.jpg“나는 사인 못 하니까 팀장에게 얘기하세요.”

시현은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 태하는 시현이 예단을 해간다는 자체를 끔찍이 싫어하고 있었다. 전에도 말을 꺼냈다가 ‘맨손으로 고춧가루나 만지게 만드는 사람들한테, 예쁘게 봐 달라고 선물까지 바쳐 가면서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화를 내는 바람에 말다툼까지 했었다.

16551947640298.jpg“예단 하려는 거 아니야. 내가 돈이 필요해져서 그래.”

태하가 그럼 뭐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사정을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16551947640298.jpg“나 어릴 때, 그러니까 아직 너 만나기 전에. 작은아버지 댁에서 7년 정도 가정부로 일했던 분이 계셔.”

시현은 수연의 이야기를 했다. 엄마처럼 대해주었던 분이라는 것부터, 최근에 다시 만난 것, 수연이 현재 처한 상황까지. 태하는 내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듣고 있었다.

16551947640298.jpg“그래서 그 돈, 내가 꼭 해드리고 싶어.”

진심을 담아서 말했는데도 태하는 끝내 가져간 서류에 사인해주지 않았다.

16551947657068.jpg“생각해보도록 하죠.”

정중하지만 차가운 말투가, 타협 불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원망스러웠지만 결재권자는 어디까지나 태하고, 그가 못 해주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팀장 결재라도 받아서 제출해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며, 시현은 축 처진 어깨로 태하의 사무실을 나왔다. 하기야 태하 입장에선 내가 지금쯤 얼마나 미울까. 내가 해달라는 건 뭐든 해주기 싫겠지. 하늘 아래 진짜 내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태하와 수연 둘뿐인데. 그중 하나를 잃었다고 생각하자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듯 묵직해졌다. * 어느덧 결혼 준비가 거의 끝나고, 남은 것은 신혼여행 예약 정도였다. 신혼여행은 우진이 알아보기로 해서, 퇴근 후에 여행사에서 받은 자료를 가지고 시현의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1655194767075.jpg“요즘 세이셸이니 보라보라니 하는데, 그래도 아직은 하와이가 최고래.”

16551947640298.jpg“그래?”

1655194767075.jpg“마침 하와이 쪽 비행기 노선이 싸게 나와서, 가격도 아주 괜찮더라고.”

우진이 이것저것 카탈로그를 보여주며 설명했지만 시현은 반쯤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언제쯤 얘기를 꺼낼까 타이밍을 재느라 바빴다. 결국 우진이 마음에 들어 하는 하와이로 신혼여행지를 정하고 나서야 시현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16551947640298.jpg“저기, 오빠. 미안하지만 나 예단 못 해가게 됐어.”

1655194767075.jpg“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시현은 낮에 태하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수연이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수연이 지금 처해 있는 사정까지 모두. 비록 태하는 얘기를 듣고도 무시했지만, 부디 우진은 이해해줬으면 했다.

1655194767075.jpg‘너한테 그렇게 고마운 분이라면 나한테도 고마운 분이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1655194767075.jpg“그럼 우리 엄만 어쩌라고? 벌써 가방도 골라놨는데?”

16551947640298.jpg“나중에 살면서 여유 되면 내가 꼭 해드릴게. 가방은 없어도 당장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잖아. 수연 이모는 지금 생계가 달려 있어.”

1655194767075.jpg“그걸 말이라고 해? 엄마가 가방 산다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다 봐놓고!”

우진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서, 시현은 얼른 주위의 눈치를 보았다.

16551947640298.jpg“목소리 좀 낮춰, 오빠.”

바람을 피운 이후로 여태껏 시현 앞에서는 착 엎드리다시피 굴던 우진이었다. 그러나 이 건만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1655194767075.jpg“내가 지금 목소리 낮추게 생겼어? 너 우리 엄마한테 예물로 그렇게 바리바리 받아 챙겨놓고 이제 와서 예단은 못 해드리겠다니, 양심이 있는 거야?”

양심 운운까지 나오자 시현도 화가 났다. 사실 괜히 일러바치는 것 같아서 예물에 대해서는 그냥 입 다물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자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16551947640298.jpg“그 보석들 말이야. 리세팅 하러 숍에 가져가 봤는데, 차라리 새로 사는 게 낫대. 보석은 가치가 하나도 없고, 다이아몬드는 큐빅이래. 금조차도 14k라서 팔아봐야 몇 푼 나오지도 않는다더라. 그래서 그냥 도로 싸들고 나왔으니까 그대로 어머님께 돌려드릴게. 그럼 됐지?”

제가 생각해도 민망했는지, 우진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큰소리를 땅땅 치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1655194767075.jpg“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였어? 시어머니가 주시는 선물인데 가격이 중요해? 마음이 중요한 거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났다. 시현은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백을 들어 보였다.

16551947640298.jpg“그럼 어머님 예단으로 이 가방 어때?”

1655194767075.jpg“뭐?”

16551947640298.jpg“내가 몇 년 동안 애지중지 들고 다니던 건데, 천연 소가죽이라 아직 몇 년은 더 쓸 만해.”

1655194767075.jpg“미쳤어? 우리 엄마한테 너 쓰던 가방을 드리자고?”

16551947640298.jpg“어머님은 나한테 몇십 년 쓰던 보석 주셨는데 왜? 마음이 중요한 거라며?”

1655194767075.jpg“그게 그거랑 같아?”

16551947640298.jpg“뭐가 다른데!”

시현도 화가 났다. 대체 이 남자는 내가 평생 오십만 원짜리 가방도 못 들어봤다는 건 알고서 나한테 천만 원짜리 가방 타령인 걸까. 화가 난 김에 가슴속에 묻어 두려고 했던 말까지 튀어나왔다.

16551947640298.jpg“그리고 내가 이 말까지는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다른 여자 만나면서 쓴 돈을 왜 내가 같이 갚아야 해?”

어차피 용서하기로, 잊어버리기로 한 일이다. 그래서 애써 말을 꺼내지 않으려고 여태 참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자 입이 멈추지 않았다. 우진의 얼굴이 더더욱 시뻘겋게 변했다. 저러다 폭발하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1655194767075.jpg“내, 내가 언제 너더러 갚아달랬어?”

16551947640298.jpg“오빠 그 돈 다 카드로 썼잖아. 카드값 때문에 돈 모자라서 전세 대출 천만 원 더 받기로 했잖아. 그럼 나랑 같이 갚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 아냐?”

우진이 움찔했다.

16551947640298.jpg“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녔길래 카드값이 천만 원씩 나오느냐고!”

시현이 우진과 만나서 먹는 거라고는 늘 그가 좋아하는 국밥이나 덮밥 종류였다. 가끔 좋은 거 먹는다고 해봐야 파스타 정도. 선물도 몇만 원짜리 이상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와는 호텔 레스토랑 같은 곳을 다니고 명품 목걸이를 사다 바치니 카드 대금이 천만 원 넘게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1655194767075.jpg“다 끝난 얘기를 왜 또 꺼내는데?”

사과는커녕, 우진은 적반하장으로 벌컥 성질을 냈다.

1655194767075.jpg“그래, 내가 실수했어. 근데 네가 용서하기로 했잖아. 그래서 이렇게 죽어지내는데 그래도 모자라? 언제까지 그 얘기 끄집어내서 사람 죄인 취급할 건데!”

시현은 후회했다. 차라리 그냥 말하지 말걸.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새삼 서럽고 억울하고 비참했다. 이러니 태하가 나한테 떡볶이 취급이나 받는다고 하지.

16551947640298.jpg“오늘은 그만하자. 나중에 다시 얘기해.”

자칫하면 울음을 터뜨려 버릴 것 같아서, 시현은 일어나서 빠르게 카페를 나왔다. * 지쳐서 돌아오자 태하가 집 앞에 서 있었다. 시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16551947657068.jpg“잠깐 나 좀 봐.”

시현은 외면한 채로 대꾸했다.

16551947640298.jpg“미안한데 내가 오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서. 나중에 얘기하자, 태하야.”

저녁도 굶었지만 배고픈 것도 몰랐다. 지금은 그냥 들어가서 쓰러져 자고만 싶었다. 잠들면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니까. 서럽고, 슬프고, 억울한 것들 따위 다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시현의 눈앞에, 태하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16551947657068.jpg“이것만 주고 갈게.”

새하얀 봉투였다.

16551947640298.jpg“이게 뭔데?”

시현은 별 생각 없이 봉투를 받아서 열어 봤다가 깜짝 놀랐다. 안에서 나온 것은 천만 원짜리 수표 석 장이었다.

16551947640298.jpg“이게…… 뭐야?”

16551947657068.jpg“필요하다며, 돈. 혹시 모자라면 말하고.”

시현은 얼굴을 굳혔다.

16551947640298.jpg“내가 너한테 대출 결재 해달라고 했지, 언제 빌려달랬어?”

16551947657068.jpg“당신이 힘들게 일해서 모은 퇴직금이잖아. 그거 담보로 대출 같은 거 받게 하기 싫어.”

순간 코끝이 찡하게 아파 왔다. 얘는 왜 하필, 이럴 때 골라서 이래. 가뜩이나 울고 싶은데. 약해지는 마음을 감추느라 시현은 더욱더 단호하게 봉투를 내밀었다.

16551947640298.jpg“됐으니까 가져가.”

16551947657068.jpg“갚으라는 거 아니야. 그냥 쓰면 돼.”

16551947640298.jpg“그러니까 더 싫다고! 내가 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도울 돈인데, 그걸 네가 왜 내?”

하지만 태하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16551947657068.jpg“강시현한테 소중한 사람이면,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야.”

그때였다. 여태 꾹꾹 눌러 참고 있었던 눈물이 한계치를 넘은 것은.

16551947640298.jpg“……왜 네가 그 말을 하는데.”

우진에게 듣고 싶었던 말. 끝내 듣지 못했던 말.

16551947640298.jpg“왜 네가, 대체 왜……!”

시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16551947726618.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