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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침대 위의 두 남녀 (36/181)

#36. 침대 위의 두 남녀202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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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47791672.jpg“……왜 네가 그 말을 하는데.”

우진에게 듣고 싶었던 말. 끝내 듣지 못했던 말.

16551947791672.jpg“왜 네가, 대체 왜……!”

시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우는 시현을 차마 안지도 못하고, 태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머리에 손을 댔다가, 그저 어쩔 줄을 몰랐다. 달랜다고 하는 말도 그저 울지 마, 울지 마. 그 한 가지뿐이었다

16551947791679.jpg“울지 마. 응?”

서툰 위로가 오히려 더 다정하게 느껴져서 울음이 북받쳤다. 어깨가 들썩이도록 흐느끼며, 시현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16551947791672.jpg“내가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아닌 것 같은데, 이젠 돌이킬 수도 없어. 너무 멀리 와버렸어.”

16551947791679.jpg“아직 늦지 않았어.”

태하가 힘주어 말했다.

16551947791679.jpg“결혼하고 나서도 이혼하는데, 아직 결혼식장에도 안 들어갔잖아.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돼. 할 수 있어.”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것들이 떠올랐다.

16551947791694.jpg‘뭐? 이제 와서 결혼을 엎자고?’

우진의 성난 얼굴과,

16551947791699.jpg‘너 미쳤니? 우리 아현이는 어쩌라고!’

작은어머니의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와,

16551947791703.jpg‘강시현 대리, 청첩장까지 돌리고 나서 파혼했다며?’

뒤에서 수군거릴 사람들. 생생하게 들려오는 수많은 말들을 뚫고, 태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닿았다.

16551947791679.jpg“헤어지고 나한테 오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 결혼만은 하지 마.”

진심으로 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한마디가. 시현은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태하가 조심스레 시현의 눈가에 손을 뻗었다. 가만히 눈물을 훔쳐내는 손가락이 말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의 편이라고.

16551947791672.jpg“내가…… 할 수 있을까?”

태하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7791679.jpg“할 수 있어.”

  * 시현과 싸우고 난 우진은 그 길로 집으로 달려가서 제 어머니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1655194780827.jpg“아니, 생판 남한테 돈을 갖다 바치느라 예단을 못 하겠다고?”

정임이 펄쩍 뛰었다.

16551947791694.jpg“그렇다니까! 엄마는 가방 없어도 살지만, 그 이몬지 뭔지는 그 돈 없으면 굶어 죽을 판이라고 아주 그냥 딱 못을 박더라고.”

정임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뒷목을 잡았다.

1655194780827.jpg“아이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이라니?”

16551947791694.jpg“걱정 마, 엄마. 내가 엄마 가방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1655194780827.jpg“아유, 지금 그까짓 가방이 문제야?”

달래려 드는 우진에게, 정임이 팩 하고 역정을 냈다.

1655194780827.jpg“너 생각을 해봐. 결혼하기 전부터 벌써 그 모양이면, 결혼하고 나서는 네 등골까지 뽑아다 갖다 바치려고 하겠니, 안 하겠니? 응?”

아이고, 아이고, 귀한 내 아들 골수까지 쪽쪽 뽑아 먹히게 생겼네. 정임이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1655194780827.jpg“얘, 우진아.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응? 이거 도저히 안 되겠어.”

우진이 씹어뱉듯 말했다.

16551947791694.jpg“솔직히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엄마.”

사실 여태 미뤄 오던 결혼을 서두르게 된 건, 바람을 피웠다가 걸린 이유도 있지만 태반은 그 윤태하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이었다. 시현을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시현에게 미쳐 있다는걸. 저렇게 잘난 놈이 목매달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시현이 예뻐 보이고 괜찮아 보였다. 제가 아무리 잘나 봐야 강시현이 내 여자인데, 하는 우월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랑 헤어지면 그놈한테 갈 게 뻔한데, 그 꼴만은 절대 못 볼 것 같았다. 그래서 결혼을 서두른 건데, 오늘 대판 싸우고 보니 슬그머니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16551947791672.jpg[그럼 어머님 예단으로 이 가방 어때?]

설마하니 시현이 그렇게 지독한 여자일 줄은 몰랐다. 세상에 우리 엄마가 어떤 엄마인데. 나를 낳아서 여태 키우느라 허리가 휘도록 고생을 하신 우리 엄마한테 감히 제가 쓰던 가방을 드리자니, 그게 할 말인가? 우진은 이를 갈았다. 벌써부터 시어머니 알기를 우습게 아는 걸 보면, 결혼 후에도 두고두고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고부 갈등에 제일 힘든 건 중간에 낀 남편이라던데. 게다가 용서하겠다고 해놓고는 바람피운 얘기를 또 끄집어내지 않던가.

16551947791672.jpg[오빠가 다른 여자 만나면서 쓴 돈을 왜 내가 같이 갚아야 해?]

이래서야 살면서 두고두고 약점 잡힐 것 같다. 남자가 실수로 한 번쯤 그럴 수 있는 거지, 그까짓 일을 가지고 평생 바가지를 긁힐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1655194780827.jpg“얘, 우진아. 그 조한신문 따님이랑은 정말 어떻게 안 되겠니?”

좀처럼 보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정임에게, 우진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16551947791694.jpg“글쎄 걔는 내 전화도 안 받는다니까. 그리고 걔가 뭐가 모자라서 나랑 결혼을 하겠어? 만나 준 것만도 황송하지.”

1655194780827.jpg“여자는 다 주저앉히는 수가 있어.”

뭘 모른다는 듯, 정임이 제 아들을 흘겨보았다.

16551947791694.jpg“응?”

1655194780827.jpg“아 제가 아무리 잘났어도, 애가 들어서면 별수 있느냔 말이야. 진작 좀 어떻게 하지 못하고, 쯧쯧.”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보라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어떻게든 잡아볼 수도 있었던 건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우진은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문득 머릿속에 반짝, 전구가 켜지는 것 같았다. 잠깐, 혹시 이제라도……? 우진은 황급히 손꼽아 날짜를 세어보았다. 결혼은 6월 말, 아직은 4월. 앞으로 두 달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진은 은밀히 어떤 계획을 떠올렸다. * 퇴근해서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오는 보라를, 누군가가 불렀다.

16551947791694.jpg“보라야!”

우진이었다. 보라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고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했다.

16551947822902.jpg“아 네, 안녕하세요. 강 대리님 아직 위에 계실 텐데 불러드릴까요?”

16551947791694.jpg“아니. 시현이 말고 너 보러 왔어.”

우진이 다가왔다.

16551947791694.jpg“잠깐 얘기 좀 해.”

보라는 가슴이 덜컥해서 목소리를 낮췄다.

16551947822902.jpg“미쳤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보라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16551947822902.jpg“따라와요. 절대 가까이 오지 말고.”

보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어디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결국 십여 분을 걸어서 회사 근처를 완전히 벗어난 후에야 보라는 눈에 띄는 대로 허름한 반지하 호프집에 들어갔다. 다행히 호프집 안은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대충 생맥주 두 잔을 주문하자마자 보라는 날카롭게 물었다.

16551947822902.jpg“회사 앞까지 찾아오면 어떡해요?”

16551947791694.jpg“네가 내 연락을 피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보라는 치미는 짜증을 애써 감췄다. 억지로 슬픈 표정을 하느라 얼굴에 경련이 다 일었다.

16551947822902.jpg“이제 우리 그만하기로 했잖아요. 오빤 이제 곧 결혼하는데, 저도 마음 정리해야죠.”

갑자기 우진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더니 보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16551947791694.jpg“보라야, 나 그냥 이 결혼 하지 말까?”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눈엣가시 같은 강시현이나 빨리 치우지 않고, 이 등신 같은 인간이! 보라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우진은 애절하게 호소했다.

16551947791694.jpg“도저히 네가 안 잊혀서 미칠 것 같아. 그냥 확 이 결혼 깨고 너한테 갈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어.”

진짜 돌아 버리겠네. 보라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16551947822902.jpg“벌써 청첩장 다 돌렸잖아요. 신혼집에 웨딩촬영까지 다 끝났다고 하던데 이제 와서 뭘 어쩌려고요?”

그제야 우진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16551947791694.jpg“마지막으로 이별여행 딱 한 번만 가자. 그럼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

16551947822902.jpg“안 가면 계속 귀찮게 하겠다는 거예요?”

16551947791694.jpg“모르겠어,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애원을 가장한 협박이었다.

16551947822902.jpg‘결국 마지막으로 한번 자자는 얘기잖아?’

보라는 잡힌 손을 확 빼서 예쁘게 네일아트를 한 엄지손톱을 신경질적으로 깨물었다. 이 멍청한 남자가 진짜 결혼이라도 깨버리면 큰일이다. 결국 들어주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손절한 남자와 잠자리를 또 함께할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났다. 그나마 침대에서라도 좀 훌륭하면 모를까, 이 남자는 밤마저도 재미가 없었다.

16551947822902.jpg‘이대로는 절대 안 떨어져 줄 눈치인데…….’

보라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협박에 져서 그냥 질질 끌려가듯 들어주고 싶지는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나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을까. 금세 떠올랐다. 강시현에게 가장 큰 모욕을 안길 수 있는 방법이.

16551947822902.jpg“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16551947791694.jpg“뭔데?”

16551947822902.jpg“이별여행 말고, 나 오빠 신혼집에서 하룻밤 보내고 싶어요.”

우진이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했다.

16551947791694.jpg“뭐? 거긴 아직 입주도 하기 전인데. TV랑 인터넷도 안 들어온다고.”

16551947822902.jpg“그런 게 왜 필요해요?”

보라가 유혹하듯 우진의 손등을 살짝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16551947822902.jpg“……우리 둘만 있으면 됐지.”

그것만으로도 우진은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16551947791694.jpg“알았어.”

보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의 신혼집.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신혼부부의 침대에서, 그녀의 남자를 갖는다. 여자로서 이만한 모욕이 어디 있을까. 최고의 복수가 아닐 수 없었다.

16551947822902.jpg“그럼 일어날까요?”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술에 묻은 거품을 요염하게 핥아내며 보라가 속삭였다. * 시현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늘 깊이 생각하기 싫어서 툭하면 술로, 아니면 잠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제 마음을 똑바로 마주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16551947791672.jpg‘나는 정말 우진 오빠를 사랑하는 걸까?’

지금껏 애써 피해 왔던 질문을, 시현은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그렇다고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한때 사랑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럼 앞으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조차 자신이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곧 결혼할 남자가 조금도 내 편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살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돼줄 거라는 확신이 드는 상대는 수연, 그리고 태하뿐이었다. 사랑은 둘째 치고, 내 편이라는 생각조차 안 드는 사람과 결혼해도 되는 걸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 그렇다고 이제 결혼식장에 들어갈 일만 남은 결혼을 엎을 결심을 하는 것은 또 쉽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마지막 결론을 낼 수가 없어서, 시현은 그 밤에 집을 뛰쳐나왔다. 그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입주 전인 신혼집으로 향했다. 신혼집 거실에 걸려 있는 웨딩 사진을 보고 싶었다. 지금 그 사진을 보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했다. 일단 보고 나면 어느 쪽이 됐든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신혼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두 시가 넘어 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현관에 불이 반짝, 켜졌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시현은 흠칫했다. 입주 전이라 당연히 비어 있어야 할 현관에, 구두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눈에 익은 우진의 구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픈토 스타일의 예쁜 여자 구두였다.

16551947791672.jpg‘이게 뭐지?’

불안한 예감에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뛰었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올랐다. 설마……. 불이 꺼진 거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시현은 발소리를 죽여 침실로 향했다. 귀를 기울이자 가늘게 남자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지 않게 가만히 방문 손잡이를 돌리는 시현의 손이, 마치 오한이 든 것처럼 벌벌 떨렸다.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방 안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침대 곁에 스탠드 조명이 은은하게 밝혀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반쯤 남은 와인과 먹다 남은 치즈, 그리고 와인 잔이 보였다. 뒤이어 침대 위에 얽혀 곤히 잠든 두 남녀의 모습이 조명에 확연히 드러났다. 한눈에 봐도 남자는 우진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시현은 우진의 팔을 베고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우진의 다른 쪽 팔에 가려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구역질이 났다.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어지는 자신을 억누르고, 시현은 눈을 크게 뜨고 침대 위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었다.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한다.

16551947791694.jpg“으음.”

잠시 후 우진이 잠투정을 하며 자세를 바꿨다. 대자로 뻗어 누우며 팔을 치우자, 그 서슬에 가려졌던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잠든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16551947791672.jpg“……!”

시현은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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