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네가 가라, 하와이 (37/181)

#37. 네가 가라, 하와이.2022.02.04.

끈적하고 뜨거운 밤이었다. 마지막을 아쉬워하듯 우진은 전에 없이 뜨거웠고, 따라서 보라도 그에게서 일찍이 느껴본 적 없는 쾌락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결혼 후에도 가끔 아쉬울 때 한 번씩 만나볼 만은 한데, 하고 생각하다 보라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 더럽게 구질구질해서 여기서 딱 끊지 않으면 나중에 골치 아파질 것 같다. 게다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어쨌든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보라도 아낌없이 몸을 불살랐다. 기나긴 정사가 끝났을 때는 둘 다 너무 지친 나머지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듯 뒤엉켜 잠이 들었다. 보라가 어렴풋이 잠에서 깬 것은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 때문이었다. 찰칵. 소리를 듣고도 처음에는 너무 피곤해서 눈이 뜨이지 않았다. 계속 잠을 청하는데도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찰칵, 찰칵, 찰칵. 아, 시끄러워 죽겠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잠결에 생각하다 문득 가슴이 철렁했다.

16551947928866.jpg‘셔터 소리?’

보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기다렸다는 듯이 또다시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를 새하얀 섬광이 사정없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16551947928866.jpg“꺅!”

보라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보라의 비명을 듣고, 세상모르고 자던 우진도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

16551947928874.jpg“왜 그래, 보라야? 응?”

우진이 졸음에 취한 목소리로 묻는데, 이번에는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방에 조명이 켜졌다. 갑작스러운 빛의 공격에 두 남녀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겨우 눈부심을 극복하고 눈을 떴을 때, 침대 앞에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시현이었다.

16551947928878.jpg“……!”

보라와 우진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16551947928866.jpg“꺅!”

잠시 후 보라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이불로 몸을 가렸다. 그런 두 사람에게, 시현이 다시 한번 휴대폰을 들이댔다. 찰칵.

16551947928874.jpg“가, 강시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엉?”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옷을 주워 입으며, 우진이 시뻘건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그런 우진에게 휴대폰 카메라를 고정한 채로, 시현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16551947928888.jpg“증거 확보 중.”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린 보라가 날카롭게 외쳤다.

16551947928866.jpg“오빠, 폰 뺏어요! 빨리!”

16551947928874.jpg“어? 어! 알았어!”

우진은 보라의 지시에 빠르게 응답했다. 팬티 바람으로 시현에게 달려들어,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휴대폰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어서 우진은 스탠드를 들어 휴대폰을 몇 차례나 내리쳤다. 땅! 땅! 땅! 충격에 버티지 못한 액정이 깨져 나가며 유리조각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사이에 보라는 허둥지둥 옷을 주워 입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블라우스 단추는 두세 개 꿰다 말았고 그나마 스커트는 어디다 벗어놨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하는 꼴을, 시현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진은 시현의 휴대폰을 완전히 박살을 내고 나서야 가쁜 숨을 내쉬며 스탠드를 내려놓았다.

16551947928874.jpg“야, 강시현! 너 돌았어? 야밤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이게 무슨 짓……!”

다행히 증거는 인멸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큰소리를 치기 시작하는데, 시현이 말했다.

16551947928888.jpg“벌써 다 전송해놨는데.”

16551947928874.jpg“뭐?”

16551947928888.jpg“다른 데 벌써 보내놨다고. 사진이랑 동영상, 다.”

우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직감했다. 자칫하면 인생 골로 갈 위기라는 것을.

16551947928874.jpg“시, 시현아. 저기, 내가 다 설명할게.”

뒤늦게 허둥거리며 변명하려는 우진을 향해, 시현이 말했다.

16551947928888.jpg“꿇어.”

우진이 우물쭈물 무릎을 꿇었다. 시현은 보라에게도 눈짓으로 우진의 옆을 가리켰다.

16551947928888.jpg“너도.”

보라 역시 머뭇머뭇 와서 우진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불이 켜지자 방 안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증명하듯 침대 시트는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 아래 두 남녀가 민망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알몸에 팬티 바람의 우진. 대충 단추를 꿰다 만 블라우스에 역시 아래는 팬티만 입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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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보면 우스꽝스럽다고 웃음을 터뜨리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바로 이런 일을 말하는 거였을까. 나란히 무릎을 꿇은 두 남녀를 바라보다, 시현이 불쑥 물었다.

16551947928888.jpg“처음부터 보라 너였어?”

16551947928866.jpg“죄송해요, 대리님.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보라가 눈물을 글썽였다. 시현은 눈을 감았다.

16551947928866.jpg[하긴 두 분 사이에 문제가 있을 리가 있나요. 약혼자 분, 대리님 볼 때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시던데.]

16551947928866.jpg[그러니까 대리님, 꼭 그분이랑 결혼해서 행복하셔야 해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래서였구나, 보라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던 게. 우진의 말도 떠올랐다.

16551947928874.jpg[일은 무슨. 저기 그…… 거래처랑 통화했지.]

16551947928874.jpg[거래처 여직원이야. 그냥 만나서 밥 몇 번 먹은 게 다야. 정말이야, 그 이상 아무 일도 없었어.]

그는 바람을 피운 것이 걸리고 나서도 끝까지 상대만은 밝히지 않았다. 보라가 걸고 있는 목걸이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저걸 보고서도 둘 사이를 꿈에도 의심하지 않고 있던 자신이 새삼 우스웠다. 그런 나를 보면서, 그동안 둘은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배신감을 참느라 시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 와중에도 입은 살아서, 우진은 또다시 변명을 하려 들었다.

16551947928874.jpg“시현아,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근데 정말 우리 다 정리한 사이야. 오늘은 이별여행 대신 마지막으로 만난 거였어. 그렇지, 보라야?”

16551947928866.jpg“맞아요. 저희 진짜 오늘이 마지막이었어요.”

보라가 황급히 맞장구를 쳤다. 시현은 우진을 향해 질문했다.

16551947928888.jpg“하나만 묻자. 그렇게 좋으면 얘하고 결혼하면 되지, 왜 나였어?”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내저었다.

16551947928874.jpg“난 너밖에 없어, 시현아. 얘랑은 그냥 잠깐 호기심에 만난 거야. 믿어줘!”

16551947928866.jpg“말도 안 돼요! 제가 왜 이런 남자하고 결혼을 해요?”

방금까지 찰떡처럼 서로에게 딱 달라붙어 있던 두 사람이, 이제는 서로를 부정하느라 바빴다. 심지어 서로 옥신각신 다투기까지 했다.

16551947928874.jpg“야, 나도 너랑 결혼할 생각 없었거든?”

16551947928866.jpg“마지막으로 이별여행 한 번만 가자고 매달린 게 누군데요?”

두 사람이 동시에 매달리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16551947928888.jpg“왜 내 남자였니?”

시현은 이번에는 보라를 향해 물었다.

16551947928888.jpg“너 인기 많잖아. 더 좋은 남자들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이 인간이었어?”

보라가 기어이 눈물을 글썽였다.

16551947928866.jpg“정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그냥 전, 진짜로 강 대리님이 너무 좋아서…… 대리님 거는 뭐든지 다 좋아 보였어요. 그것뿐이에요.”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이 다 나왔다. 내가 너무 좋아서 내 남자와 놀아났다니. 바람을 피운 이유도 가지가지라지만, 이건 기네스북 감일 것 같다. 들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고, 시현은 심호흡을 했다.

16551947928888.jpg“내가 찬 거야.”

무릎을 꿇은 채인 우진을 바라보며, 시현은 차갑게 말했다.

16551947928888.jpg“넌 바람을 피웠고, 그러다 나한테 들켰고, 그래서 내가 결혼 깬 거야.”

16551947928874.jpg“뭐?”

우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기다시피 다가와서 시현의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16551947928874.jpg“시현아, 제발 이러지 마. 우리 이제 결혼 준비도 다 했잖아. 결혼을 깨다니, 그게 무슨……!”

그런 우진을, 시현은 다리를 힘껏 휘둘러 걷어차 버렸다.

16551947928874.jpg“억!”

가슴팍을 정통으로 걷어차여 나뒹구는 우진을, 시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16551947928888.jpg“이보라.”

16551947928866.jpg“네? 네, 대리님.”

16551947928888.jpg“내 거는 다 좋아 보인댔지? 그럼 너 다 가져.”

시현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침실을 휘 둘러보았다. 가구부터 커튼에 이르기까지 제 손으로 고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정든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니, 미련도 없다.

16551947928888.jpg“신혼집도 다 마련됐고, 결혼식장도 예약했고. 넌 그냥 나 대신 몸만 들어가면 돼.”

새하얗게 질린 보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16551947928866.jpg“아니에요, 대리님! 저 절대로 대리님 자리 뺏을 생각…….”

16551947928888.jpg“아, 신혼여행도 네가 가면 되겠다.”

구석에 떨어져 있던 스커트를 집어서 보라의 얼굴에 홱 던지며, 시현은 차갑게 뇌까렸다.

16551947928888.jpg“네가 가라, 하와이.”

  * 문득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태하는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두 시가 넘어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굴까, 하고 휴대폰 액정을 보자 메시지 알림에 시현의 이름이 떠 있었다. 강시현 : [사진] 잠이 확 달아나서 태하는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메시지를 확인한 태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아무 내용도 없는 메시지에, 사진만 달랑 첨부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 얽혀서 잠든 두 남녀가 찍힌 사진이었다. 남자는 우진, 그리고 여자는 틀림없는 보라였다. 사진의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걸 보낸 사람이 시현이라는 사실이었다. 태하는 사태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걸 어떻게 시현이……?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휴대폰이 또다시 진동했다. 우웅, 우웅, 우웅. 사진이 계속해서 도착했다. 사진마다 두 남녀는 조금씩 다른 포즈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짧은 동영상까지 왔다. 보고 있자니 저절로 상황이 이해가 갔다. 틀림없다. 시현이 찍어서 실시간으로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이걸 찍고 있을 시현을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쯤 대체 어떤 심정으로 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까. 태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대체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 계속 오던 메시지도 잠잠해져서, 태하는 참다못해 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라, 제발.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신호가 가도 시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다 문득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현장을 들킨 두 사람이, 다급한 김에 시현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게 아닐까. 불길함에 온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시현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태하는 그대로 집을 뛰쳐나왔다. 시현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서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작은 인영이 눈에 띄었다. 사랑에 빠진 눈은 멀리서 보아도 상대를 정확히 파악해냈다. 태하는 단숨에 달려갔다.

16551947984377.jpg“괜찮아?”

숨을 몰아쉬며, 태하는 빠르게 시현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다행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 보였다.

16551947984377.jpg“어떻게 된 거야? 응?”

16551947928888.jpg“태하야.”

다급히 묻는 태하를 바라보며, 시현은 씩 웃어 보였다.

16551947928888.jpg“나, 반품하고 오는 길이야.”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이 사라졌다. 동시에 눈이 스르르 감기며, 그대로 몸이 무너졌다.

16551947984377.jpg“강시현!”

쓰러지는 시현을, 태하가 놀라서 받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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