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파혼2022.02.08.
시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열을 내고 앓아누웠다. 심한 몸살이었다.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다 아팠다. 집에서 나갈 때까지만 해도 컨디션은 지극히 정상이었는데. 정신과 육체가 이토록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죽어도 회사 가서 죽어야 해.”
밤새 끙끙거리며 앓던 시현은 아침이 되자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일정 급한데 결근했다간 본부장이 난리 친다고. 그 인간 성격 되게 더러워.”
밤새 곁을 지키던 태하가 얼른 달려들어 그녀를 도로 눕혔다.
“그냥 쉬어. 그 인간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 테니까.”
아파 죽겠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얘가 무뚝뚝한 척하면서 은근히 유머 감각이 있네? 그렇지 않아도 몸을 일으켜 보니까 알겠다. 때려죽여도 회사는 못 가겠다. 가까이에 상사가 있으니까 좋긴 좋았다. 휴대폰이 없는데도 회사에 연락은 할 수 있고.
“강시현 대리 몸살이 심해서 연차 쓴다고 합니다. 며칠은 쉬어야 할 것 같다고 하네요. 예, 제가 방금 전화 받았습니다. 일정은 제가 조정할 테니까…….”
팀장에게 전화하는 태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현은 도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일어나 봐. 뭘 좀 먹어야 약을 먹지.”
눈을 뜨자 태하가 침대 곁의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죽이 놓여 있었다. 이어서 태하는 누워 있는 시현을 향해 팔을 뻗었다. 내가 좀 무거울 텐데, 하고 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시현을, 태하는 마치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달랑 안아서 일으켜 앉혔다. 이렇게까지 힘이 센 줄 미처 몰랐다. 굵은 팔뚝에 안겨 일으켜진 순간 얼굴이 달아올라서, 시현은 괜히 천장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 힘센 팔로, 태하는 조심조심 죽을 떠서 시현의 입가에 갖다 대주었다.
“숟가락질 정도는 할 수 있어.”
“아무 때나 해주는 거 아니니까 먹여줄 때 잠자코 먹어.”
무뚝뚝한 목소리가 왜 이렇게 다정하게 들리는지, 괜히 또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긴 내가 언제 또 이런 호강을 해보겠어. 시현은 순순히 입을 벌려 죽을 받아먹었다.
“넌 출근 안 해?”
“오늘은 내 회사에 일이 있어서 연차 내겠다고 얘기해놨어.”
내 회사라는 건 태하가 대표로 있는 유니온TA 얘기였다. 자기 회사에 미래은행 일까지, 태하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새삼 기억이 났다.
“일도 바쁠 텐데 가 봐. 내가 알아서 약 챙겨 먹고 쉴 테니까.”
태하가 숟가락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 지금 일이 중요할 것 같아, 당신이 중요할 것 같아?”
또다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 났다. 수시로 열이 나는 것이, 아무래도 빨리 약을 먹는 게 좋을 것 같다. 죽을 다 먹고, 약까지 먹이고 나서야 태하는 도로 시현을 눕혀주었다. 침대 프레임에 등을 기대어 시현을 등진 채로 그는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이 안 보이니 말하기가 쉬웠다. 자신이 민망할까 봐 태하가 배려해 주고 있는 것을 시현은 깨달았다. 얼굴 보고도 말할 수 있는데, 괜찮은데. 넌 어디까지나 내 편이니까.
“어젯밤에, 신혼집에 갔었어.”
“밤중에 거긴 왜.”
“얼마 전에 웨딩촬영 했어. 그래서 거실에 웨딩사진이 걸려 있거든. 그거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어, 마지막으로.”
지금 생각하니 이미 가기 전부터 결론은 나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 그래서인가, 두 사람이 침대 위에 뒤엉켜 잠들어 있는 꼴을 보고도 잠시 충격에 빠져 있다가 금세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 와중에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내 촬영하고, 태하에게 전송까지 할 생각을 했던 게 스스로도 감탄스러웠다.
“근데 가 보니까 둘이 안방에서 그러고 있지 뭐야.”
“…….”
“왠지 예감이 안 좋아서 찍자마자 너한테 보냈지. 아니나 다를까, 정신 차리자마자 내 휴대폰부터 빼앗아가서 박살을 내더라.”
커다란 등에 대고 시현은 웃었다. 억지로 웃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우스웠다. 다 큰 어른 둘이서 나란히 속옷 바람으로 무릎을 꿇고 있던 걸 떠올리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둘이 나란히 무릎 꿇고 있는 게 대박이었는데 그걸 못 찍었네. 아까워 죽겠어. 너도 봤으면 배꼽 잡았을걸? 아하하하.”
소리 내어 웃자 가뜩이나 아픈 몸이 더 쑤셔 왔다. 근육통 때문에 웃음 사이사이에 얼굴을 찌푸리며 시현은 사과했다.
“하여튼 너한테는 미안해. 본의 아니게 밤중에 안구 테러하게 됐네.”
“아니, 잘했어.”
태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휴대폰이 아니라 당신까지 위험했을지 몰라.”
시현은 생각해 보았다. 정말 그들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현장을 딱 걸리고도 사과는커녕, 야밤에 쳐들어와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길길이 날뛰던 우진이 떠올랐다.
[오빠, 폰 뺏어요! 빨리!]
[어? 어! 알았어!]
보라의 지시에 충실히 응답해서, 달려들어 우악스레 팔을 붙잡아 휴대폰을 빼앗아가던 것도. 그들이 꼬리를 내린 것은, 시현이 이미 사진과 동영상을 다른 곳에 전송해두었다고 말한 후였다. 뒤늦게 등골이 오싹했다. 나 좀 위험했던 거네? 시현은 웃음을 거두고 물었다.
“넌 알고 있었지? 상대가 보라였다는 거.”
이제 생각하니 알 것 같다. 왜 태하가 원앱팀 사무실에 놀러 온 보라를 보고 그토록 심하게 화를 냈었는지.
[당장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요. 그리고 두 번 다신 내 눈에 띄지 말도록.]
그때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고맙기 짝이 없었다. 내 대신에 화내준 거구나.
“그냥 말해주지 그랬어. 어차피 바람피우는 것도 알게 된 마당에, 상대가 누구면 어떻다고.”
“내가 말해줘도 결혼 진행할 것 같아서. 그러면 당신만 더 힘들어질 거 아냐.”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끝나고 나니 알겠다. 이미 뻔히 보이는 길을 굳이 고집을 부려서 가는 나를 보며, 태하는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했을까.
“미안해. 괜히 너 걱정시켜서.”
그제야 태하가 시현을 향해 돌아앉았다.
“미안해해야 할 건 나야.”
“무슨 소리야?”
“당신 결혼 깨진 거, 나 때문이니까.”
“그게 왜 네 탓이야?”
시현은 웃었지만 태하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야.”
“알아. 나한테도 얘기했었어.”
“고등학교 때 나한테 고백 비슷하게 한 적이 있었어. 내가 안 좋게 찼고.”
“뭐?”
시현은 그제야 놀라서 태하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까지는 몰랐다.
“이보라한테 내가 물어봤었어. 대체 당신에게 왜 이러는 거냐고. 그때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답했어. 잘못한 건 강시현이 아니라고, 나라고.”
태하의 얼굴에 음영이 짙어졌다.
“그땐 그게 무슨 얘긴가 했는데…… 고등학교 때 일이 최근에 와서야 기억났어.”
그러고 보니 보라는 시현에게도 얘기한 적이 있었다.
[대리님, 옛날에 본부장님 과외 하셨었죠?]
[사실은 저 고등학교 때 본 적 있거든요. 카페에서 두 분이 같이 공부하는 거.]
그러면 벌써 십 년 가까이 된 일이다. 오래전에 한 번 본 사람 얼굴을 용케도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눈치챘던 것 같아.”
“그리고 나중에 우연히 회사에서 나를 만나서 알아보고, 일부러 내 결혼을 깼다? 너 때문에 화가 나서?”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시현은 눈을 감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보라는 처음부터…….
[강 대리님!]
생글거리며 강아지처럼 졸졸 따르던 보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다 거짓이었다는 건가. 동생처럼 귀여워했던 걸 떠올리니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파왔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보라는 당신 남자를 건드리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다 내 탓이야.”
조금 시간을 두었다가, 그는 다시 말했다.
“당신 탓이 아니야.”
시현은 알았다. 결국 태하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거구나. 내가 부족해서, 내가 매력이 없어서 약혼자가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구나.
“그러게, 듣고 보니까 내 결혼 깨진 게 네 책임 맞네.”
웃자고 한 말에 태하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책임질게, 내가.”
하여튼 무슨 농담을 못 해. 시현은 눈을 흘겼다.
“나 파혼한 지 아직 몇 시간도 안 지났는데 벌써 훅 들어온다?”
태하는 역시 웃지도 않고 말했다.
“약해져 있을 때를 노려야지, 그럼.”
시현은 웃어 버렸다. 늘 저 표정이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알 수가 있나. 자꾸만 웃는 시현을, 태하는 아픈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억지로 웃지 말고.”
고개를 젓고, 시현은 중얼거렸다.
“근데 있잖아, 나 생각보다 되게 괜찮아.”
물론 배신감도 들고 화도 났지만,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심정이라든가, 결혼이 깨져서 억울하다든가, 그런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하기까지 했다. 술이 는 것은 벌써 한참 전부터의 일이었다. 애써 피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마음속 어딘가에 늘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게 맞을까. 시간이 지나서 서로에게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이 식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미 끝나 버린 파티에, 언제까지나 눈치 없이 앉아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좀 더 나를 소중하게 생각했더라면. 술이나 잠 따위로 도망치지 말고, 좀 더 빨리 내 마음을 진지하게 마주 봤더라면 어땠을까.
“너 때문이 아니야.”
시현은 똑바로 누워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한참 전에, 우리는 끝나 있었어.”
몸은 죽도록 쑤시고 아팠지만 마음만은 상쾌했다. 마치 길고 긴 마라톤을 끝내고 난 후처럼. 비록 완주는 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달리는 동안은 죽을힘을 다했으니까. 눈을 감는 시현의 이마에, 태하는 조심스럽게 물수건을 얹어주었다.
“약 먹었으니까 이제 좀 자. 열 내리게.”
“응.”
조용히 지켜보아 주는 눈길을 느끼며, 시현은 깊고 편안한 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 얼마나 잤을까. 딩동, 딩동, 딩동. 급하게 연거푸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서 시현은 눈을 떴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졸던 태하가 덩달아 눈을 번쩍 뜨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 곁에 있어줬구나, 계속. 초인종 소리에 이어 현관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시현아, 나야! 문 좀 열어봐!”
우진의 목소리였다.
“잠깐 얘기 좀 해!”
순간 태하의 눈초리가 확 날카로워졌다. 턱이 굳어지면서 말 그대로 얼굴에 살기가 돌았다. 여태 태하를 십몇 년 동안 봐 왔지만 이렇게 무서운 표정은 시현도 처음이었다.
“누워 있어.”
말하자마자 태하는 벌떡 일어나서 현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