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어머니와 아들 (39/181)

#39. 어머니와 아들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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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이 집을 나가자마자 보라도 벌떡 일어나서 옷을 입고 나가버렸다.

16551948217995.jpg“다신 나한테 연락하지 마요.”

텅 빈 신혼집에 홀로 남은 우진은 어쩔 줄을 몰랐다. 분명 어제만 해도 시현과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신이라도 시켜서 보라를 잡아 볼 셈으로 만난 건데, 정작 시현에게 들켜 파혼 선언을 당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16551948217999.jpg[넌 바람을 피웠고, 그러다 나한테 들켰고, 그래서 내가 결혼 깬 거야.]

이미 다 돌린 청첩장은? 신혼집은? 신혼여행은? 예약해둔 회사 결혼식장은 어쩌고? 직장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릴 걸 생각하자 식은땀이 났다. 새삼 제 나이도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결혼 여부는 은근히 중요한 것이었다. 벌써 서른다섯인데, 또 어느 세월에 다른 여자를 만나 연애해서 결혼까지 하나. 우진은 안절부절못했다.

16551948218005.jpg‘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정임이 원망스러웠다. 시현이랑은 그냥 잠깐 싸운 것뿐인데, 괜히 엄마가 바람을 넣어가지고! 생각할수록 시현이 아까웠다. 착하고, 야무지고, 알뜰하고, 그만한 여자가 없는데. 이제는 보라를 준대도 시현과 바꾸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이보라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여자가 아니었다. 이백만 원짜리 목걸이를 걸어줘도 심드렁하지 않던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데. 나한테는 시현이가 딱인데.

16551948218005.jpg‘내가 눈에 뭐가 씌었지!’

팬티 바람으로 멍하니 앉아 있던 우진은, 아침이 되어서야 문득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라도 매달려볼 수밖에 없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주워 입고 방을 뛰쳐나왔다.

16551948218005.jpg“……!”

거실을 지나다 우진은 문득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분명 어제만 해도 거실 벽에 멀쩡히 걸려 있던 웨딩사진 액자가, 박살이 난 채로 바닥에 나뒹굴어 있었다. 산산이 흩어진 유리조각과 함께 주변에 깨진 꽃병 조각이 보였다. 시현이 나가면서 액자에 꽃병을 집어던진 게 틀림없었다. 진짜로 결혼을 깰 생각이구나! 마음이 더욱더 조급해졌다. 일단 집을 나와서 시현에게 전화를 하려다 우진은 뒤늦게 떠올렸다.

16551948218005.jpg‘참, 시현이 휴대폰 내가 박살 냈지?’

택시를 잡아서 그대로 시현의 집을 향해 달렸다.

16551948218005.jpg“빨리 좀 갑시다, 예?”

택시 안에서도 우진은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회사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 오로지 시현의 마음을 돌리는 것만이 급했다. 시현의 집에 도착한 우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아까워서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워낙 운동이라곤 부모의 원수처럼 멀리하다 보니 겨우 3층 올라가는데 숨이 턱에 닿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진은 초인종을 마구 눌렀다.

16551948218005.jpg“시현아, 나야! 문 좀 열어봐!”

대답이 없어서 다급한 김에 현관문을 쾅쾅 두들겼다.

16551948218005.jpg“잠깐 얘기 좀 해!”

잠시 후 드디어 문이 열렸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확인하기 전에, 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6551948218005.jpg“시현아, 어제는 내가……!”

대답 대신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와서 우진의 뺨을 강타했다.

16551948218005.jpg“억!”

그대로 뒤로 붕 날아가 나동그라진 후에야 우진은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태하가 지옥에서 온 사신 같은 표정을 한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기 어린 표정에 우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난 오늘 죽었구나! 덜컥 겁을 먹고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슬슬 피하는데, 그제야 태하의 등 뒤에 시현이 나타나서 그의 팔을 붙들고 말렸다.

16551948217999.jpg“때리지 마, 태하야.”

시현이 전에도 이렇게 막아줬던 걸 떠올리고, 우진은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시현이 너는 아직도 나를……! 우진이 왈칵 눈물을 흘릴 뻔한 순간, 시현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16551948217999.jpg“……네 주먹만 아프잖아. 차라리 발로 차.”

말하고 나서 시현은 쿨하게 태하의 손을 놓아버렸다.

16551948217999.jpg“그럼 난 좀 가서 누워야겠다. 수고.”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고, 시현은 약간 비틀거리며 도로 집 안으로 사라졌다. 태하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와서 현관문을 쾅 닫았다. 여태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우진은 공포에 질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저번에 한번 맞아 봐서 알고 있었다. 저 커다란 주먹은 보기에도 무섭지만 실제로 맞으면 더 아프다는 것을.

16551948218005.jpg“자, 잘못했어.”

우진은 태하를 올려다보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16551948218005.jpg“다신 시현이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제발, 제발 때리지만 마!”

태하의 갈색 눈동자에 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감이 어렸다. 나동그라진 우진에게 주먹을 날리는 대신,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우진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우진이 다리 사이를 부여잡고 눈을 크게 떴다.

16551948218005.jpg“……!”

끔찍한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우진을 내려다보며, 태하가 낮게 읊조렸다.

16551948232736.jpg“꺼져.”

  * 시현은 이틀째 앓고 있었다. 비록 몸은 아파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6년 동안이나 만난 사이인데, 몸살 한번 앓지 않고 끝나면 오히려 예의가 아니지 않겠는가. 끝내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현은 태하가 병원 가서 수액 맞자고 권하는 것도 끝내 거절했다. 이 몸살을 제대로 앓고 끝내야 진짜로 끝났다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태하는 내내 회사도 쉬고 시현의 곁을 지켰다. 식사도 꼬박꼬박 챙기고 약도 먹였다.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출근하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16551948217999.jpg“너 나랑 똑같이 결근했다가 똑같이 출근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16551948232736.jpg“의심해주면 나야 고맙지.”

시현은 포기해버렸다.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니.

16551948217999.jpg“많이 때렸어?”

처음에 한 대 맞는 것까지는 봤는데, 태하가 나가서 현관문을 닫아버린 후로는 어찌 됐는지 모른다. 태하는 역시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16551948232736.jpg“2세까지 때려줬어.”

이건 무슨 소린지 몰라서 웃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앓고 있다가, 문득 수연이 떠올라서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맞다, 그 돈 내가 해드린다고 약속했는데! 자신과 연락도 안 돼서 수연이 지금쯤 어쩔 줄 모르고 있을 게 뻔했다.

16551948217999.jpg“태하야, 나 부탁 좀 할게.”

16551948232736.jpg“뭔데?”

16551948217999.jpg“네가 줬던 돈, 저기 서랍 안에 들어 있거든. 그거 수연 이모한테 좀 갖다드려.”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태하는 끝내 시현에게 봉투를 쥐여주고 제집으로 들어가 버렸었다. 어쩔 수 없이 봉투째 그대로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16551948217999.jpg“미안하지만 먼저 좀 쓰자. 신혼집 전세금에 넣은 돈 돌려받으면 꼭 갚을게.”

16551948232736.jpg“갚으라고 준 거 아니라고 했잖아.”

태하는 딱 잘라 말했다. 더 실랑이할 기운도 없어서 시현은 일단 물러났다.

16551948217999.jpg“하여튼 가게가 이 근처니까 좀 갖다 드려줄래? 나랑 연락도 안 돼서 이모가 지금쯤 무척 곤란하실 거야.”

16551948232736.jpg“혼자 있을 수 있겠어?”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구는 바람에 웃음이 났다.

16551948217999.jpg“내가 애야?”

16551948232736.jpg“애야, 나한테는.”

언젠가 자신이 우진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태하의 입에서 나오자 기분이 묘해졌다. 혹시 그 말을 태하가 들었나? 눈치를 봤지만 차분한 얼굴에서는 늘 그렇듯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시현의 이마에 손을 짚어 열을 재어 보고 나서야 태하는 몸을 일으켰다.

16551948232736.jpg“자고 있어. 얼른 갔다 올 테니까.”

  * 태하는 시현이 가르쳐준 카레 가게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른 전달할 것만 전달하고 시현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약혼자가 가장 친한 후배와 신혼집 침대 위에서 뒹구는 걸 제 눈으로 본 여자의 기분이 어떨까. 생각하면 제 마음이 다 찢어질 것 같았다. 병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면서도 시현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이 도리어 걱정이 됐다. 차라리 울면 위로라도 해줄 텐데, 그러지 않으니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왜 사랑하는 사람을 영어로 ‘baby’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처럼 걱정이 되고, 안쓰럽고, 응석이든 뭐든 다 받아주고 싶다. 시현이 자신을 가리키는 ‘애’라는 말에도, 조금쯤은 그런 의미가 들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태하는 생각했다. 물론 그건 말 그대로 어린애라는 뜻이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에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엄마손 카레’라고 쓰인 간판이 붙은 가게 안을, 태하는 유리벽 안으로 슬쩍 들여다보았다. 마침 방금 문을 열었는지 손님은 하나도 없고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만 테이블을 닦느라 분주했다. 시현에게 듣기로는 사십 대 중반이라고 했는데, 보기에는 그보다도 훨씬 젊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원래 태하는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이상하게도 첫눈에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시현이 어릴 때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들어서일까. 조용하고 단아해 보이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서 빨리 봉투를 전달해주고 싶어졌다.

16551948232736.jpg“실례합니다.”

태하는 유리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16551948261343.jpg“어서 오세요.”

반갑게 맞이하던 수연이, 태하를 보고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16551948261343.jpg“……!”

눈동자가 한껏 커다래진 채, 수연은 태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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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하는 조금 민망함을 느꼈다. 외모가 눈에 띄게 생긴 탓에 남의 시선은 자주 받는 편이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뚫어져라 보는 사람은 잘 없는데.

16551948232736.jpg“윤태하라고 합니다. 강시현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그제야 수연은 정신을 차린 듯, 꿈에서 깬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16551948261343.jpg“미안해요. 내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그만.”

수연이 자리에 앉는 것을 기다려서 태하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16551948232736.jpg“강시현 씨가 지금 몸살이 심해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마침 휴대폰도 고장이 나서 연락할 수가 없다고, 저한테 이걸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수연은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여전히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물끄러미 태하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 그 눈빛에서 애틋함과 간절함이 전해져 와서 태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16551948232736.jpg“강시현 씨한테 어릴 때부터 잘해주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태하는 말했다.

16551948232736.jpg“그러면 저한테도 고마운 분입니다. 혹시 제가 뭔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 주십시오.”

태하는 제 명함을 꺼내 건넸다.

16551948232736.jpg“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고 일어서서 가게를 나가려는 순간, 수연이 그를 불러 세웠다.

16551948261343.jpg“저기, 혹시 식사는 했나요?”

태하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픈 시현이 걱정돼서 사양하려 하는데 수연이 이어서 말했다.

16551948261343.jpg“꼭 우리 아들 같아서, 밥 한 끼 먹여 보내고 싶어서 그래요.”

태하는 조금 놀랐다. 아직 젊어 보이는데 그렇게 큰 자식이 있단 말인가. 간절한 눈빛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태하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 접시가 앞에 놓였다. 밥도 듬뿍, 카레도 듬뿍 얹힌 것이 마치 진짜 엄마가 집에서 해준 음식 같은 느낌이 들었다.

16551948232736.jpg“잘 먹겠습니다.”

숟가락을 들어 먹기 시작하는 태하를 바라보다,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1948261343.jpg“저기, 혹시 부모님은…….”

질문의 의도를 금세 알아듣고, 태하는 카레를 얼른 삼키고 나서 대답했다.

16551948232736.jpg“아버지가 미국인이십니다. 어머니는 한국 분이신데 일찍 돌아가셨고요.”

16551948261343.jpg“그렇구나.”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16551948261343.jpg“사실은 우리 아들도 혼혈이거든요. 나이도 태하 씨하고 동갑이고. 지금은 미국에 있어요.”

그제야 태하는 수연의 석연치 않은 태도를 이해했다.

16551948261343.jpg“우리 아들도 태하 씨처럼 멋지게 커 있으면 참 좋겠는데.”

말하는 것을 보아 만난 지 무척 오래된 모양이다. 태하는 수연에게 연민을 느꼈다.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으면 생판 남인 나를 저런 눈빛으로 쳐다볼까. 동시에 이름도 모를 그 아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내 어머니도 살아 계시면 나를 저렇게 따뜻한 눈빛으로 보아주었을까.

16551948261343.jpg“더 먹어요, 응?”

식사 내내 수연은 태하를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16551948232736.jpg“잘 먹었습니다. 그럼 나중에 시현 씨하고 또 찾아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가는 태하의 뒤를, 수연은 살짝 따라 나갔다. 그대로 길가에 선 채, 태하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낳자마자 빼앗긴, 그래서 이름조차 알 길이 없는 아들. 살면서 단 한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는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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