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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새로운 시작 (40/181)

#40. 새로운 시작2022.02.15.

꼬박 이틀 밤낮을 앓고 사흘째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열이 다 내려 있었다. 날아갈 듯이 가뿐했다. 몸도, 마음도. 시현은 몸을 일으켰다. 잔뜩 웅크린 채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잠들어 있는 커다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밤새 곁을 지키다 지쳐서 잠든 게 틀림없었다.

16551948361664.jpg‘하필이면 날 좋아하게 돼서 너도 참 고생이구나.’

시현은 태하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지었다. 너 좋다는 여자 한 줄로 세우면 지구 한 바퀴쯤 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필 나를. 창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태하의 얼굴을 비췄다. 마치 능숙한 화가가 그려낸 필생의 역작 같은 얼굴에서, 시현은 한참 동안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16551948361664.jpg‘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용기 못 냈을 거야.’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입속으로만 가만히 중얼거렸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고. 태하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끝내 아무것도 모른 채 결혼이라는 이름의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잠시 후, 시현은 기지개를 켜며 활기차게 말했다.

16551948361664.jpg“본부장님, 일어나. 오늘은 출근해야지!”

  * 짙은 네이비의 H라인 스커트에 가벼운 소재의 블라우스를 차려입은 시현이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크리스털 귀걸이가 경쾌하게 달랑거렸다. 화사한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과 입술, 상큼하게 뿌려대는 미소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놀라서 한 번씩 쳐다보았다.

16551948361679.jpg“와우, 시현 씨. 오늘 왜 이렇게 예뻐?”

16551948361664.jpg“제가 언제는 안 예뻤나요?”

16551948361679.jpg“이야, 강 대리 시집간다더니 아주 얼굴이 확 피었네.”

16551948361664.jpg“곧 좋은 소식 들려드릴 테니 기대하세요!”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칭찬에 눈웃음과 함께 일일이 화답해주며, 시현은 원앱팀 사무실에 도착했다.

16551948361664.jpg“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이틀이나 결근하고 돌아온 시현에게, 팀원들이 각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16551948361679.jpg“오, 강시현이! 몸은 이제 괜찮은가?”

16551948361679.jpg“웬일로 강 대리가 결근을 다 하고, 많이 아팠나 봐.”

16551948361679.jpg“어디가 그렇게 안 좋으셨어요? 걱정 많이 했어요.”

시현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16551948361664.jpg“몸살이 심하게 나서 그랬는데 이제 괜찮아요. 저 지금 커피 가지러 갈 건데, 모닝커피 아직 안 하신 분들?”

나, 나, 하고 여기저기서 팀원들이 손을 들었다. 숫자를 하나하나 세고 나서 시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16551948361664.jpg“참. 그리고 저, 파혼했어요.”

그 순간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보던 모니터에서, 휴대폰에서, 자료에서 일제히 고개를 들어 시현을 바라보았다.

16551948381587.jpg“……!”

커다래진 눈들을 돌아보며, 시현은 말했다.

16551948361664.jpg“일일이 말하고 다니기 입 아프니까 부디 저 대신 많이많이 좀 퍼뜨려 주세요. 날짜는 이틀 전, 사유는 성격 차이. 부탁드릴게요!”

돌아서서 경쾌하게 휴게실을 향해 가는 시현의 뒷모습을, 팀원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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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1948361664.jpg“전세금 돌려받기. 퀵으로 예물 부치기. 결혼식장 예약 취소하기. 스냅이랑 본식 촬영 예약도 취소하기.”

할 일 리스트를 엑셀로 정리해서 하나씩 중얼중얼 읽어내려가는 시현을, 옆자리에 앉은 미주가 빤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정신병원 전화번호를 검색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지어 시현은 혼자 중얼대다 미주에게 묻기까지 있다.

16551948361664.jpg“또 뭐가 있을까, 미주 씨?”

미주는 대답 대신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16551948381607.jpg“괜찮아?”

16551948361664.jpg“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이혼하는 사람도 수두룩 빽빽인데.”

눈 꼬리를 한껏 접으며 미소를 짓던 시현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16551948361664.jpg“아, 맞다. 작은아버지 댁에도 알려야지? 그러려면 먼저 휴대폰부터 새로 사야겠고.”

시현이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컴퓨터로 ‘최신형 휴대폰’을 검색하는 바람에 미주는 더욱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노래가 나와?

16551948381607.jpg“시현 씨, 잠깐 나 좀 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미주는 시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본인이 얘기하지 않는 이상 안 묻고 싶지만, 이건 속으로 곪아 가고 있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누구한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자칫 정신병 걸릴지 모르니 나라도 들어 줘야겠다. 회의실로 데려가서 취조할 셈으로 시현의 손목을 끌고 복도를 지나는데, 마침 개발팀 사무실에서 나오던 보라와 마주쳤다.

16551948381607.jpg“어, 보라 씨.”

미주는 별생각 없이 인사했다. 그러나 보라는 선배가 먼저 알은체를 하는데도 왠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허둥지둥 시선을 피했다. 왜 저러나, 싶어서 쳐다보자 시현이 보라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차디찬 눈빛이었다.

1655194839804.jpg‘강 대리님!’

16551948361664.jpg‘어, 보라 씨! 어디 가?’

평소 같으면 이산가족 상봉한 듯 손을 맞잡고 반가워했을 두 사람인데. 인사는커녕 한 사람은 뚫어져라 쳐다보고, 한 사람은 죄지은 것처럼 어쩔 줄 모르며 시선을 피한다. 보라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제 갈 길을 가버렸고, 시현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16551948381607.jpg‘잠깐, 이건……?’

시간으로 따지면 3, 4초나 될까 말까 하는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미주는 방금 두 여자 사이에 오간 이상한 낌새를 놓치지 않고 정확히 포착해냈다. 회의실에 도착하자 시현이 한숨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물었다.

16551948361664.jpg“무슨 얘기인데 그래?”

16551948381607.jpg“어, 물어볼 게 있었는데.”

미주는 고개를 저었다.

16551948381607.jpg“생각해보니까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아.”

  * 시현은 하루 종일 바빴다. 우선 우진에게 메일로 파혼 관련 사항을 정리한 문서를 보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자신의 계좌로 정확히 전세금의 반을 입금할 것. 결혼식장과 신혼여행은 우진이 직접 예약했으니 알아서 취소할 것. 받은 예물은 내일 퀵으로 보낼 테니 그렇게 알 것. 모든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 일체는 파혼의 원인인 우진이 부담할 것. 등등의 사항을 지극히 사무적으로 적어놓은 메일이었다. 점심시간에는 밖에 나가서 새 휴대폰도 구입했다. 그것으로 시현은 작은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51948361664.jpg“오늘 작은아버지 몇 시쯤 들어오세요? 저 퇴근하고 저녁때 잠깐 찾아뵐게요.”

16551948412042.jpg- 아니, 이미 상견례도 했고 신랑 얼굴도 봤는데 굳이 또 왜?

작은어머니는 노골적으로 귀찮아했지만 시현은 일방적으로 통보하다시피 말했다.

16551948361664.jpg“뵙고 꼭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저녁 먹고 가려는 거 아니니까 따로 준비 안 하셔도 돼요.”

퇴근 후에 시현은 작은집으로 향했다.

16551948361664.jpg“저 왔어요, 작은어머니.”

16551948412042.jpg“아니, 신랑은 어쩌고 혼자 왔어?”

작은어머니가 거실로 나오며 물었다. 당연히 우진과 같이 방문하려니 했나 보다. 열 평짜리 원룸에 익숙해진 눈에, 작은아버지 댁인 단독주택은 새삼 넓어 보였다. 이 넓은 집에서 시현이 쓸 수 있는 공간은 가정부와 함께 쓰는 쪽방 하나뿐이었지만. 마침 작은아버지도 일찍 퇴근해 있었다. 시현은 소파에 작은아버지 부부가 와서 앉기를 기다려 말을 꺼냈다.

16551948361664.jpg“저 우진 오빠랑 파혼했어요.”

두 사람은 마치 아침에 얘기를 들은 팀원들 같은 표정을 했다. 방금 내가 뭘 들었나, 하듯 멍하니 쳐다보는 작은아버지 부부에게, 시현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16551948361664.jpg“그냥 잠깐 싸운 거 아니고 이미 결혼식장도 다 취소했어요.”

작은어머니는 이유도 묻기 전에 자기 딸 걱정부터 했다.

16551948412042.jpg“그럼 우리 아현이는 어쩌라고? 올해 안에는 꼭 시집보내야 하는데!”

16551948361664.jpg“저 언제 결혼할지 몰라요. 어쩌면 평생 안 할지도 모르고요. 그러니까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좋은 사람 있거든 아현이 먼저 결혼시키세요.”

16551948412079.jpg“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작은아버지가 벌컥 역정을 냈다.

16551948412079.jpg“부모 없는 조카는 노처녀로 늙히면서, 내 딸부터 덜컥 시집보내면 대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을 하겠어?”

여전히 남의 시선 외에는 안중에 없는 작은아버지가 우스웠다. 여태 자신이 집에서 무슨 일을 당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은 주제에.

16551948361664.jpg“그렇게 남의 눈이 무서우면 좀 더 잘해주시지 그랬어요. 제가 밖에 나가서 작은아버지 댁에서 식모 취급받고 컸다고 얘기하고 다니면 어쩌시려고.”

이번에는 작은어머니가 펄쩍 뛰었다.

16551948412042.jpg“너, 여태 자식처럼 키워준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니?”

어릴 때부터 무서워서 한 번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었던 얼굴. 어른이 돼서도 왠지 주눅이 들어서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던 그 얼굴을, 시현은 처음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6551948361664.jpg“제 부모님 무덤 앞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어요? 내 자식처럼 키웠다고.”

16551948412042.jpg“어머, 얘, 얘 말하는 것 좀 봐. 당신 들었어요?”

작은어머니가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을 했다.

16551948361664.jpg“내쫓지 않고 집에 두어주신 건 감사해요. 은혜는 언젠가 꼭 갚도록 할게요.”

거기까지 말하고, 시현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16551948361664.jpg“앞으로는 명절에도 찾아뵐 일 없을 거예요. 아현이 결혼식 정도는 혹시 원하시면 참석하겠지만, 그 외에는 그냥 남남으로 사는 게 서로 편할 것 같아요.”

작은아버지 부부가 입을 반쯤 벌리고 시현을 올려다보았다. 쟤가 미쳤나,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야 여태 시현이 이렇게 당돌하게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16551948361664.jpg“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무쪼록 두 분 다 건강하세요.”

고개를 숙여 보이고, 시현은 그 길로 작은아버지 집을 나왔다. 정원을 걸어 나오는데 다리가 벌벌 떨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이제는 자신도 어른이 됐는데. 더는 쫓겨날까 봐, 야단맞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여태 작은아버지 부부 앞에서는 조건반사처럼 주눅이 들곤 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제 생각을 또박또박 이야기하고, 게다가 절연까지 선언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실 방금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센 척한 거였다.

16551948412042.jpg‘너 거기 서지 못해?’

작은어머니가 금방이라도 쫓아 나와서 머리채를 잡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끝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잘했어, 강시현. 대문 밖까지 나와서 시현이 겨우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말했다.

1655194842685.jpg“그 남자 때문이지?”

시현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방금 자신이 나온 대문에서, 아현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1655194842685.jpg“전에 호텔에서 마주쳐서 인사한 그 남자 말이야. 그 남자 때문에 결혼 깬 거지?”

얼굴도 안 비쳐서 집에 없는 줄 알았는데, 아까 했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디건을 걸친 아현이 팔짱을 끼고 재미있다는 듯이 시현을 바라보았다.

1655194842685.jpg“결국 더 잘난 남자 찾아갈 거였으면서, 형부만 불쌍하게 됐네. 아니, 이젠 형부도 아닌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말투에 시현은 울컥했다.

16551948361664.jpg“함부로 지껄이지 마. 바람피운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야.”

1655194842685.jpg“아, 그러셔?”

아현은 비웃듯이 말했다.

1655194842685.jpg“그럼 앞으로도 그 남자랑은 사귈 일 없겠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한편으로 시현은 깨달았다. 아, 내가 혹시라도 태하와 얽히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결국 그렇게 생각하겠구나. 결혼이 깨진 게 내 탓이라고.

16551948361664.jpg“없어.”

시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1655194842685.jpg“나한테 좀 알려줘도 되겠네, 그럼. 뭐 하는 사람이야? 나이는? 어떻게 만났고?”

딱 한 번 본 게 전부인 태하에게 관심을 품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16551948361664.jpg“내가 그걸 너한테 왜 알려줘야 하는데?”

1655194842685.jpg“어차피 언니랑 사귈 거 아니라며. 그럼 못 알려줄 이유도 없잖아?”

16551948361664.jpg“그렇다고 너 같은 애랑 얽히게 만들고 싶지도 않거든. 내가 걔랑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1655194842685.jpg“뭐야?”

아현의 눈초리가 확 치켜 올라갔다. 저럴 때는 꼭 제 엄마와 똑같다고 생각하며, 시현은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16551948361664.jpg“내가 못 한 결혼, 너는 꼭 성공하길 바랄게. 파이팅.”

  * 집에 돌아오자 태하가 원룸 건물 앞까지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16551948454868.jpg“어디 갔다 이제 와?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바라보는 눈빛에 걱정이 가득했다. 시현이 휴대폰을 새로 산 줄을 몰라서, 연락도 못 한 채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16551948361664.jpg“태하야.”

시현은 조용히 말했다.

16551948361664.jpg“앞으로 이렇게 나 기다리고 그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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