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밀어내려 해봐도2022.02.18.
“태하야.”
시현은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이렇게 나 기다리고 그러지 마.”
태하가 흠칫 놀라며 시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러느냐는 듯, 매달리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동자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 왔다. 몸도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어엿한 남자가 된 주제에, 왜 눈빛만은 어릴 때와 똑같은 건지. 그렇게 다짐을 했는데도 또 흔들리기 시작하는 제 마음이 싫어서, 시현은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앞으로 거리를 좀 두자. 만약에 내가 너랑 가까이 지내는 게 사람들 눈에 띄면, 사람들은 너 때문에 파혼한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남의 눈이 그렇게 중요해?”
“결혼 깨진 것도 억울한데, 내가 바람피운 거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기 싫어. 뒤에서 너 손가락질 받게 만들기도 싫고.”
[그 남자 때문에 결혼 깬 거지?]
아까 아현의 말을 듣고 시현은 깨달았다. 자칫 보라가 있어야 할 더러운 자리에 태하를 갖다놓게 될 수도 있다는 걸.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태하가 성큼 다가섰다.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커다란 두 손으로 감싸고, 그는 가까이서 시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난 괜찮아. 손가락질 당해도,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어.”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며, 시현은 달래듯 말했다.
“전에 얘기했었지? 우리가 남녀사이가 되면, 남들은 내가 이럴 작정으로 널 키웠다고 생각할 거라고. 네가 미성년자일 때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그래서 너하고는 안 되는 거라고.”
태하의 고백을 받았을 때 시현은 결심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태하를 키웠는데, 이제 와서 그 마음에 손가락질 받을 짓은 할 수 없다고. 그건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그건 우진 오빠랑은 상관없는 결정이었어. 그러니까 파혼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알아듣게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태하는 여전히 손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꼭 잡으면서 필사적으로 시현과 눈을 맞추려 노력했다.
“남의 생각, 남의 말들 말고. 제발 좀 당신 눈으로 날 봐주면 안 돼?”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이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해야 할 것 같다.
“너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태하야.”
태하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시현은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아니야.”
남자여서는 안 돼. 뒷말은 입속으로만 삼켰다.
“너 나한테 그랬었지? 너한테 오지 않아도 좋다고, 그런데 그 결혼만은 하지 말라고.”
“…….”
“그 말이 맞아. 결혼은 안 할 거지만, 그렇다고 너한테 가지도 않을 거야.”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호함을 담아서, 시현은 말을 맺었다. 그때까지 시현의 손을 매달리듯 꼭 잡고 있던 태하의 손에 스르르 힘이 빠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시현은 손을 빼냈다.
“빌린 돈은 조금만 기다려줘. 전세금 돌려받으면 네 돈부터 갚고 다른 데로 이사 갈 거야.”
돌아서며 시현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부디 너를 밀어내는 게 오늘로 마지막이길. 한 번 한 번이, 나는 너무 힘에 부치니까. * 점심시간, 휴게실에서 커피와 함께 여사원들끼리 수다가 한창이었다. 화제는 현재 한창 핫한 강시현 대리의 파혼 사유.
“강 대리 말이야. 청첩장까지 다 돌려놓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그러게 말이에요. 성격 차이라고 하던데, 사실일까요?”
“이미주 대리 뭐 아는 거 없어? 강 대리랑 친하잖아.”
“제가 뭘 아나요. 아무리 친해도 그런 얘기까진 안 하죠.”
미주가 심드렁하게 말을 돌리는데, 마침 보라가 휴게실에 들어왔다. 마치 사람들을 피하듯, 보라는 눈인사만 대충 하고는 얼른 커피머신으로 향했다.
“웬만하면 성격 차이 같은 문제로 다 된 결혼을 엎진 않을 텐데, 대체 뭐지? 혹시 둘 중에 누가 바람이라도 났나?”
“바람이 났다면 저쪽이겠죠. 시현 씨 그런 성격 아닌 거 아시면서.”
커피를 뽑고 있는 보라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주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혹시 시현 씨랑 아는 여자와 바람이 났다든가, 그런 거 아니었을까요?”
보라가 흠칫하며 미주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 도로 고개를 돌리는 보라를 보고, 미주는 마지막 1퍼센트의 확신을 얻었다. 역시 너였구나, 그 목걸이.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새하얗게 질린 보라가 커피잔을 들고 황망히 휴게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게요, 제가 상상력이 너무 풍부했나 봐요.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하겠어요, 하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미주는 슬그머니 한쪽 발을 쭉 뻗었다.
“꺅!”
미주의 발에 걸린 보라가 비명을 지르며 붕 하고 허공에 떴다.
“어머, 보라 씨! 괜찮아?”
미주가 호들갑을 떨며 얼른 보라에게 달려들었다. 어찌나 크게 넘어졌는지, 보라는 아파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더불어 입고 있는 명품 브랜드의 원피스는 완전히 커피 범벅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예쁜 옷 다 버렸네. 어쩜 좋아?”
옷에 묻은 커피를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척, 마구 문질러 스며들게 하면서 미주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쯧쯧, 몸이 허한가 보다. 왜 걷다가 혼자 자빠지고 그래?”
손을 뻗어 보라를 일으켜 주며, 미주는 귓가에 속삭였다.
“……뭐 찔리는 거 있는 사람처럼.”
* 지금껏 시현이 결혼에 집착해 온 이유는 그랬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 내 자리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어서, 빨리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헛된 것에 목매달아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우진과 무사히 결혼했다면 자신은 과연 행복해졌을까? 그래서 시현은 인생의 목표를 수정하기로 했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게 아니라, 일단은 나 혼자서도 행복한 사람이 되기로. 그래야 혹시 나중에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더라도 진짜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당분간은 나 자신에 집중하자고 시현은 결심했다. 결혼 비용 모으겠다고 짠순이 노릇 하던 것도 그만두고, 외국어도 배우고. 그동안 바쁘다고 미뤄온 운동도 시작하고.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좀 멋있는 거 아냐?’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며 시현은 집 근처의 피트니스 클럽으로 향했다.
“괜찮으시면 PT 1회 무료 강습 받아보시겠어요?”
“일단 한 달만 혼자 해보고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저도 예전에 PT 받아 봐서 운동 방법은 대충 기억하고 있거든요.”
은근히 PT를 권유하는 트레이너를 요령 좋게 피해서 3개월 치를 끊고, 시현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을 시작했다. 일단 만만한 러닝머신부터 시작했는데, 조금 속도를 높였더니 금세 숨이 가빠졌다. 그동안 얼마나 운동을 안 했는지 새삼 느껴져서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다못해 걷기라도 좀 꾸준히 할걸. 당장 내려오고 싶은 걸, 오기를 발휘해서 삼십 분을 걷고 나자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러닝머신에서 내려온 시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잠시 쉬는 김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운동하나,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녁 시간의 피트니스 클럽은 퇴근하고 온 직장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주위에는 바닥에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이었고, 기구들도 모두 꽉 차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작 시선은 엉뚱한 데 가 있다. 누워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아가씨도, 러닝머신 위에서 뛰는 아저씨도, 팔운동 기구에 앉은 아줌마도, 하나같이 한 곳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뭔가 싶어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쪽을 덩달아 바라보니 웬 남자가 벤치 프레스 운동 중이었다. 벤치에 누운 채로 바벨을 들어 올리는데, 얼핏 봐도 중량이 어마어마하게 보였다. 거대한 바벨을, 남자는 기계처럼 정확한 리듬으로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누워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터질 듯한 팔뚝의 근육만은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검정색 운동복 너머로도 확연히 느껴지는 흉근의 볼륨도.
“우와.”
이거야 눈을 못 뗄 만도 하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불쑥 말했다.
“장난 아니죠? 저 사람.”
흠칫 놀라서 쳐다보니 곁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아가씨였다.
“3대 500 껌으로 친대요!”
사실 시현은 3대 500이 뭔지도 몰랐지만 말하는 뉘앙스로 보아 뭔가 대단한 건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맞장구를 쳤다.
“와, 대단하네요.”
“이 시간만 되면 저 사람 보려고 여자들 완전 미어터져요. 그러니까 사람 없을 때 운동하고 싶으시면 이 시간 피해서 오시는 게 좋아요.”
시현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얘기를 듣고 보니까 유난히 여성 회원 비율이 높은 것 같기도 하다. 말을 걸어 온 아가씨는 아직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붙임성이 꽤 좋아 보였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 스물세 살인데, 저보다 언니 맞으시죠?”
시현은 웃었다. 누가 봐도 내가 한참 언니인데 그걸 굳이 물어주다니, 마음씨가 참 기특한 아이로구나. 아가씨의 이름은 정예인이라고 했다. 보기에는 그냥 발랄한 요즘 아이들처럼 보이는데, 무려 한국대 의대 재학 중이라고 해서 시현은 깜짝 놀랐다.
“공부도 바쁠 텐데, 운동 되게 열심히 하네. 대단하다.”
“저 오빠 보려고요.”
어느 새 자리를 옮겨 레그 프레스 운동 중인 남자를 가리키며, 예인이 쿡쿡 웃었다.
“아무리 바빠도 이 악물고 나오게 되더라고요. 덕분에 몸짱 되게 생겼어요.”
자신은 그냥 헬스장에서 기본 지급하는 펑퍼짐한 반팔에 반바지 운동복 차림인데 예인은 운동용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늘씬하게 쭉 뻗은 예인의 긴 다리를 부럽게 바라보며, 시현은 물었다.
“근데 트레이너 선생님들도 몸 좋은 분들 많잖아. 굳이 저 사람 때문에 그럴 필요까지 있어?”
예인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대꾸했다.
“몸은 둘째 치고 얼굴이 대박이잖아요!”
“그래?”
시현은 타조처럼 목을 쭉 빼서 남자의 얼굴을 보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쪽에서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근데 저 오빠 진짜 철벽 쩔어요. 저 여기 다닌 지 한 달 좀 넘었는데, 가서 말 걸었다가 까인 여자 벌써 다섯 명이나 봤어요. 그중엔 되게 예쁜 언니도 있었는데.”
“그래?”
“네. 그리고 제가 여섯 명째가 돼보려고요.”
예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고 보세요, 제가 이번 주 안으로 저 오빠 번호 딸 거니까요!”
요즘 애들은 마음에 들면 적극적으로 대쉬하는구나. 우리 때는 괜히 얼굴 빨개져서 눈도 못 쳐다봤었는데. 아니면 나만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현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기구 운동을 좀 해볼까 싶었다.
“나 저거 하고 올게, 좀 이따 봐!”
가만있자, 이걸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벌써 5년 전에 받았던 PT를 떠올리며 시현은 랫 풀 다운 머신에 앉아 얼추 자세를 잡았다. 몇 번 반복하자마자 금세 팔이 뻐근해 와서 그립을 붙잡은 채 이거 너무 무거운 거 아닌가, 고민하는데,
“팔꿈치가 자꾸 뒤로 가잖아.”
누군가가 시현의 한쪽 어깨를 붙잡고는 등 한복판을 살며시 밀었다.
“가슴 펴고, 허리 뒤로 너무 빼지 말고.”
귀에 익은 목소리에 시현은 깜짝 놀라서 그립을 놓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