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내가 당신한테 갈 테니까.2022.02.22.
“팔꿈치가 자꾸 뒤로 가잖아.”
누군가가 시현의 한쪽 어깨를 붙잡고는 등 한복판을 살며시 밀었다.
“가슴 펴고, 허리 뒤로 너무 빼지 말고.”
귀에 익은 목소리에 시현은 깜짝 놀라서 그립을 놓쳐버렸다. 돌아보자 역시 등 뒤에 태하가 서 있었다.
“……!”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시현이 놀라서 쳐다보는 가운데, 태하는 느긋하게 시현의 앞으로 돌아가서 원래 세팅되어 있던 중량을 반이나 덜어냈다.
“이 정도부터 시작해야 할 만할 거야.”
평소에는 늘 와이셔츠를 입은 모습만 봐서 몰랐는데, 운동복을 입고 있으니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근육이 새삼 눈에 띄었다. 아까 본 그 팔뚝, 그 가슴이다. 그럼……! 그제야 시현은 아까부터 사람들이 쳐다보던 그 남자가 바로 태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온몸이 따가운 것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자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이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아까 얘기를 나눴던 예인이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시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하는 시현을 향해 말했다.
“자, 다시 해봐.”
모르겠다, 태하는 워낙 평생 남의 시선을 받고 살아온 사람이니까 이런 눈길 속에서 운동하는 게 아무렇지 않을지도. 하지만 그래본 적이 없는 시현은 부담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운동은커녕 온몸의 근육이 다 굳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됐으니까 넌 가서 네 운동이나 해. 내 운동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참견하지 말고.”
“어지간히 못 해야 참견을 안 하지.”
“뭐?”
노려보는 시현에게, 태하가 그립을 끌어당겨 강제로 쥐여주었다.
“자, 시작.”
* 결국 시현은 한 시간 가까이 이 기구 저 기구 옮겨 다니며 태하에게 지도를 받았다. 어찌나 깐깐하게 자세를 잡아 주는지, 하루 이틀 운동을 한 게 아닌 티가 났다. 어쩐지 몸이 좋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예인은 먼저 집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팔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내일은 분명히 근육통 크리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현은 비틀거리며 피트니스 클럽을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태하가 다가왔다.
“가자.”
[결혼은 안 할 거지만, 그렇다고 너한테 가지도 않을 거야.]
어젯밤에 시현이 한 말 따위는 벌써 다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태도였다. 시현은 한숨을 쉬고 가방을 받아들려는 태하의 손을 피했다.
“박힌 돌은 너니까 웬만하면 내가 다른 데로 옮기고 싶은데, 3개월 치 한꺼번에 끊어서 좀 아깝네.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혹시 마주쳐도 그냥 모른 척하자.”
차갑게 말하면서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태하는 자신에게 끝없이 고맙고 미안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대체 몇 번이나 모진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말하는 쪽도 힘들어 죽겠으니까 제발 좀 작작 알아들어 줬으면 싶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무척이나 힘 빠지는 것이었다.
“저녁은?”
태하는 마치 방금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말했다.
“가는 길에 마트 들르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만들어줄게.”
“너 진짜 왜 이래?”
시현은 얼굴을 굳혔다. 분명히 알아듣게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마치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벽 같았다.
“너한테 오지 않아도 된다며, 그냥 그 결혼만 하지 말라며. 분명히 네 입으로 말해놓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나한테 오지 않아도 돼.”
고개를 끄덕이고, 태하가 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갈 테니까.”
시현은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니?”
“난 한 번도 당신한테 장난이었던 적 없어.”
잘라 말하고, 태하는 등을 돌렸다.
“먹고 싶은 거 없으면 내가 알아서 만들게. 배고프면 언제든 먹으러 와.”
*
[배고프면 언제든 먹으러 와.]
어젯저녁에 태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물론 시현은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온 신경이 다 옆집에 가 있었다. 무슨 음식을 만들었을까. 내가 안 와서 다 버렸을까. ……대체 언제까지 저럴 셈일까.
[강시현 대리님, 내일 회의 자료 미리 좀 부탁합니다.]
[예. 곧 올리겠습니다, 본부장님.]
회사에서는 일 얘기 이외에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치는 기분이었다. 퇴근 후에 피트니스 클럽에서 또 마주칠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운동이고 뭐고 확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시현은 꾹 참고 집을 나왔다. 작심삼일도 아니고 작심1일은 너무하지 않은가.
“시현 언니이이이!”
탈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저만치서 예인이 달려왔다.
“어제 뭐예요? 언니 그 오빠랑 아는 사이였어요?”
“어. 저기…… 그냥, 아는 동생이야.”
“대박! 되게 친해 보이시던데!”
예인이 눈을 빛내고는 속사포 랩을 하듯 질문을 쏟아냈다.
“그 오빠 이름이 뭐예요? 몇 살이에요? 직업은요?”
“윤태하. 스물여섯. 개발자.”
엉겁결에 대답하면서도 시현은 알쏭달쏭했다. 근데 내가 이걸 왜 말해주고 있지?
“어, 생각보다 되게 어리네요. 혹시 나이 차이 많이 날까 봐 살짝 걱정했는데. 그럼 여친은요?”
“……없어.”
“앗싸!”
예인이 팔짝 뛰며 좋아했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와 길쭉길쭉 늘씬한 몸매를 보면서 시현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태하랑 잘 어울릴 것 같다. 예쁘고, 미래의 의사고, 나이도 태하보다 세 살 어리고, 성격도 시원시원하니 좋아 보이고. 그래, 태하에게는 이런 상대가 어울린다.
“언니,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셋이 술 한잔해요, 네?”
아무리 그래도 그건 태하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현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미안, 내가 남의 연애에는 끼지 않는 주의라. 멀리서 응원할게.”
“치.”
꽤 쿨한 성격인 듯, 예인은 아쉬운 표정을 하면서도 더 이상 조르지는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그새 태하가 와 있었다. 시현을 발견하자마자 태하는 하던 운동을 집어치우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머, 하고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예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태하는 시현을 향해 말했다.
“가자. 오늘은 하체운동 가르쳐줄게.”
이럴 것 같아서 미리 생각해둔 게 있었다. 시현은 태하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헬스 트레이너에게로 다가갔다.
“저 아무래도 PT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오늘 바로 수업 가능할까요?”
마침 수업이 빈 시간이었는지 트레이너는 반갑게 승낙했다.
“물론이죠. 먼저 등록부터 도와드릴게요.”
시현은 그 길로 PT 10회를 끊었다. 카드가 비명을 질렀지만 자신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태하를 피할 수 있다면 이쯤이야 감수할 수 있다. 처음에는 태하가 신경이 쓰였는데, 곧 다른 생각 따위 할 겨를은 없어져 버렸다. 트레이너는 처음부터 빡세게 굴리는 스타일이었다.
“강시현 회원님 잘하고 계십니다! 스쿼트 마지막 두 개만 더, 하나! 둘!"
한 시간 수업을 마치고 나니 눈앞에 별이 보였다. 샤워까지 한 후 지친 몸으로 피트니스 클럽을 나오면서도 마음은 상쾌했다. 오늘은 태하도 기다리고 있지 않아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 내가 이쯤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집에 돌아온 시현은 옷만 갈아입고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저녁을 걸렀으니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요리할 기운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시현은 배달앱을 켰다. 치킨을 시킬까, 떡볶이를 시킬까. 아니 비싼 돈 주고 운동하고 와서 치킨이나 떡볶이는 좀 그런가,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쟁반을 든 태하가 서 있었다.
“이게 뭐야?”
“아직 저녁 안 먹었잖아. 나 먹을 거 하는 김에 같이 했으니까 먹어.”
쟁반 위에 얹혀 있는 것은 비빔밥이었다. 오색 나물과 계란을 예쁘게 얹고 참깨까지 뿌려 놓은 걸 보자 군침이 도는 게 아니라 한숨이 나왔다. 대체 이 정성을 왜 엉뚱한 데 쏟고 있는 거야. 이래 봐야 시간 낭비일 뿐인데.
“너 좋다는 여자 많잖아, 예쁘고 어린 여자도 많고.”
시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헬스장에서도 봐, 너 쳐다보는 여자가 한둘인가. 그 여자들 다 놔두고 왜 하필 나한테 이래?”
태하는 잠시 물끄러미 시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내가 다른 여자한테 갔으면 좋겠어?”
순간 움찔했지만 시현은 금세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어, 그래. 제발 좀 가라. 귀찮아 죽겠으니까!”
쏘아붙이듯 말하고, 시현은 현관문을 쾅 닫아버렸다. * 아무래도 태하와 옆집에 사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러니까 집에서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운동하러 가서까지 얽히는 것 아닌가. 얼른 신혼집에 들어간 돈을 돌려받아서 태하 돈도 갚아주고, 좀 떨어진 곳으로 이사도 가야겠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 전세금 빠른 반환 요망. 미반환시 법적으로 조치하겠음. 시현은 우진에게 독촉 메일을 보냈다. 전셋집을 얻자마자 도로 빼려면 쉽지 않을 테지만 그거야 시현이 알 바 아니었다. 집이 안 빠지면 빚이라도 얻든가 말든가. 돈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소송이라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이사를 가게 되면 수연의 가게와는 자연히 멀어진다. 서운하지만 일단은 태하를 멀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이대로는 태하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파혼한 후로 수연에게는 아직도 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파혼한 경위를 들으면 수연이 얼마나 속상해할까, 싶어서였다. 그래도 언제까지 말하지 않을 순 없으니까 주말에는 꼭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시현은 퇴근 후 피트니스 클럽으로 향했다.
“시현 언니!”
오늘도 예인이 먼저 와 있었다. 어제보다 확실히 화장에 공들인 티가 났다. 그렇지 않아도 예쁜 애가, 꾸미니까 더 예뻤다.
“오늘 너무 예쁜 거 아니야? 걸 그룹 해도 되겠다.”
“오늘은 꼭 번호 딸 거예요.”
예인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저 까이면 이따 우리끼리 맥주 한잔해요, 언니. 그 정도는 괜찮죠?”
어차피 결과는 뻔하다.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는 기분이라, 솔직히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은 쟤가 나를 좋아하거든’ 하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 그래. 파이팅.”
어쩔 수 없이 파이팅을 외쳐 주면서도 속으로는 무척 안타까웠다. 아무리 봐도 괜찮은 아가씨인데, 잘 만나 보면 좋을 텐데. 잠시 후 태하가 도착했다. 예인이 심호흡을 하고 긴장한 얼굴로 태하에게 다가가는 것까지 보고 시현은 등을 돌렸다. 차마 내 눈으로 못 보겠다.
“언니!”
잠시 후, 예인이 얼굴이 상기된 채 뛰어왔다.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예인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저 토요일 날 오빠랑 영화 보기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