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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태하의 첫 데이트 (43/181)

#43. 태하의 첫 데이트2022.02.25.

커피 세례를 얻어맞은 보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자그마치 월급의 반이나 주고 산 새 원피스였는데, 커피에 젖은 건 둘째 치고 너무 세게 넘어지는 바람에 팔꿈치 쪽이 찢어져서 아주 망가져 버렸다. 분명 그때 이미주는 일부러 발을 걸었다.

16551948835718.jpg[왜 걷다가 혼자 자빠지고 그래? 뭐 찔리는 거 있는 사람처럼.]

시현이 저와 친한 미주에게 일러바친 게 틀림없다고 보라는 생각했다. 현장을 걸렸을 때만 해도 증거를 잡혔으니 일단 싹싹 빌었지만, 이제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을 생각해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 보라는 결국 씩씩거리며 시현을 찾아 나섰다.

16551948835722.jpg“혹시 강 대리님 못 보셨어요?”

사람들을 붙잡고 물으니 아까 옥상 정원으로 올라가는 걸 봤단다. 당장 쫓아 올라가자 정원 구석에서 통화하고 있는 시현이 보였다.

16551948835726.jpg“정말 죄송합니다. 위약금은 그쪽에서 곧 입금해드릴 거예요. 네, 네.”

그런 시현의 등 뒤에서 보라는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치고 한숨을 지으며 돌아서던 시현이, 보라를 보고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16551948835722.jpg“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 왜?”

보라는 시현을 똑바로 노려보며 비웃었다.

16551948835722.jpg“왜, 자기 얼굴에 똥칠하는 거 같아서 그건 차마 못 하겠어?”

16551948835726.jpg“무슨 헛소리야?”

시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대꾸하는 바람에 보라는 더욱더 열이 올랐다.

16551948835722.jpg“시치미를 떼시겠다?”

16551948835726.jpg“어디서 뭘 듣고 와서 이 난리인지 모르겠는데, 별로 너랑 상대하고 싶은 기분 아니야.”

무시하듯 지나쳐 가려는 시현의 팔을, 보라는 붙잡았다.

16551948835722.jpg“그렇게 분하면 그냥 내 머리채를 잡든지 해. 비열하게 뒤에서 남이나 조종하고, 뭐 하는 짓이야? 유치하게.”

16551948835726.jpg“넌 내가 분해 보이니?”

시현이 픽 하고 웃었다. 정말로 분한 기색이라고는 티끌만치도 보이지 않아서, 보라는 도리어 초조함을 느꼈다. 약혼자 뺏긴 주제에 왜 저렇게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쯤 반쯤 미쳐 있어야지. 나만 보면 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야지. 매일 밤 술에 절어 살다가 아침에 다크 서클이 발등까지 내려와서 겨우 출근해야지!

16551948835726.jpg“너 내 거라면 다 좋아 보인다며. 그러니까 너 가지라니까. 필요하면 너희 결혼식에 내가 축가도 불러줄게. ‘꺼져줄게 잘 살아’ 부를까? 어때?”

시현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놀리듯 말하는 바람에 보라는 흠칫해서 몸을 뒤로 뺐다. 미쳤나, 이 여자가.

16551948835726.jpg“그리고 너. 내 약혼자랑 한 침대 위에 있는 사진이 엄연히 나한테 있는데 개념 좀 챙기자. 네 말대로 지금은 내가 내 얼굴에 똥칠하는 거 같아서 입 다물고 있지만, 이러다 혹시 눈이 확 돌아버리면 또 모르잖니?”

시현이 손을 뻗어 보라의 얼굴에 뭔가를 바르는 듯한 시늉을 했다.

16551948835726.jpg“그 똥, 그냥 확 내 얼굴에 칠해버리고 네 얼굴에도 똑같이 칠해주고 싶을지.”

16551948835722.jpg“꺅!”

정말로 얼굴에 오물이 묻는 것 같은 느낌에, 보라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16551948835726.jpg“쫄기는.”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시현은 얼굴을 굳히고 경고를 날렸다.

16551948835726.jpg“봐주고 있을 때 작작 까불어라.”

여유롭게 보라를 지나쳐 옥상을 나가는 시현을, 보라가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바로 며칠 전에 약혼자의 바람으로 파혼한 여자가 저렇게까지 괜찮을 수는 없다. 이건 분명 윤태하와 잘돼가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다면 벤츠 어서 오라고 똥차 치워 준 격 아닌가. 내 손으로 직접!

16551948835722.jpg‘대체 난 무슨 짓을 한 거지?’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에, 보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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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일 아침. 시현이 잠에서 깬 순간 제일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16551948835726.jpg‘아, 오늘 태하 데이트하는 날이네.’

눈뜨자마자 든 생각이 그거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아니 내가 왜? 어제 예인은 한껏 들떠서 시현에게 물었다.

16551948851051.jpg[언니, 태하 오빠 말이에요.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콘셉트 좀 잡아보게요.]

같이 영화 보기로 했다더니, 어느새 ‘저 오빠’에서 ‘태하 오빠’로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대답을 해 주고 싶어도 태하가 누구를 만나는 걸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이번이 처음이었다. 괴롭힘을 당하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를 빼고는 늘 인기가 많았던 태하다. 특히 고등학교 때부터는 하루아침에 부잣집 도련님이 되는 바람에 말 그대로 인기 폭발이었던 모양이다. 생일이나 시험 전날마다 운전기사와 비서가 아예 자루를 가져가서 선물을 쓸어 담아 왔다고 하니까. 아무리 거절해도 그렇게 몰래 놓고 도망들을 간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태하가 어떤 여자아이를 좋아한다거나, 연락한다거나 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그땐 왜 저러나 싶었는데…….

16551948835726.jpg‘정말 옛날부터 나를 좋아하긴 했나 보구나.’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짓다가 시현은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

16551948835726.jpg‘아니, 내가 왜 한숨을 쉬어? 축하는 못해줄 망정!’

그래, 축하할 일이다. 이제 태하도 드디어 자신과 어울리는 상대와 연애할 마음이 든 거 아닌가. 스물여섯에 첫 연애라니,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게다가 태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더는 멀리하지 않아도 된다. 예전처럼 다시 친한 누나 동생으로 지낼 수 있다. 그럼 굳이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니까, 수연의 가게와도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16551948835726.jpg“그래, 잘된 거야. 이따 데이트 끝나고 태하 오면 축하해줘야지!”

일부러 소리 내어 중얼거리고, 시현은 기지개를 쭉 폈다. 파혼하고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 바로 지난 주말까지는 계속 드레스 투어다, 웨딩촬영이다, 매일 눈코 뜰 새가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한가해지니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참에 대청소나 하자 싶어서 시현은 앞치마를 두르고 팔을 걷어붙였다. 우선 냉장고 정리부터 시작했다. 작은 냉장고 안의 반쯤은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이 점령하고 있었다. 시현은 워낙 어릴 때부터 집에서 가정부를 도왔고, 또 태하를 돌보느라 요리를 많이 해와서 요리 자체는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혼자 살게 된 이후로는 주로 인스턴트나 배달 따위로 때우는 일이 많았다. 묵은 음식들을 쓰레기봉투에 담다가, 시현은 문득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16551948835726.jpg‘근데 일도 바쁜 애가 언제 그렇게 요리를 배웠지?’

여태 몇 번 밥을 얻어먹었는데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먹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보낸 비빔밥조차도 무척 예쁘게 만들어 놓은 걸 보면, 아마도 정식으로 요리를 배운 것 같았다.

16551948835726.jpg‘여친 생기면 앞으로 편하게 얻어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가슴이 철렁했다.

16551948835726.jpg‘잠깐, 근데 태하 여자친구가 싫어하지 않을까?’

아무리 친한 누나로 돌아간다 해도 태하가 오랫동안 자신을 좋아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옆집에 살면서 밥까지 얻어먹고 있으면 여자친구 입장에서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도 그랬다. 나 같아도 내 남자친구에게 그런 사이인 누나가 있다면 무척 신경 쓰이고 싫을 것 같다.

16551948835726.jpg‘만나지 못하게나 안 하면 다행이겠네.’

그래도 예인이라면 성격도 시원시원해 보이고, 나하고 안면도 있으니까 좀 봐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시현은 그만 서글퍼졌다. 내 손으로 키운 태하인데, 여자친구가 싫다고 하면 얼굴도 보기 힘들어지는 건가.

16551948835726.jpg‘어쩔 수 없지 뭐. 태하 연애하는 데 내가 방해가 될 순 없잖아.’

애써 그렇게 생각해도 한번 가라앉은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알고 있다. 오래 만난 친구보다, 만난 지 며칠 안 된 연인이 훨씬 소중할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나와 태하는 특별한 사이 아닌가. 그런데도 역시 여자친구가 만나지 말라고 하면 태하는 그 말에 따를까? 머리로는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타임라인에 따라 두 사람의 데이트를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 지금쯤 둘이서 무슨 영화를 보고 있을까. 멜로 영화일까, 아니면 액션 영화일까. 영화 끝나고 밥 정도는 같이 먹겠지. 첫 데이트인데 어디서 먹으려나. 지난번에 태하가 데려가 줬던 그 프렌치 레스토랑일까? 태하는 지금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무뚝뚝해 보이지만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대놓고 다정하니까, 이것저것 잘 챙겨주고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베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6551948835726.jpg‘미쳤나 봐. 너 지금 질투하니?’

시현은 이를 악물고 싱크대를 박박 닦았다. 추해도 이렇게 추할 수가 없다. 다시 태어나라는 둥, 넌 나한테 남자 아니라는 둥, 귀찮으니까 제발 좀 다른 여자한테 가라는 둥, 갖은 모진 소리를 다 해놓고. 정작 태하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니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16551948835726.jpg‘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깝다는 거야?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강시현?’

지금까지 태하가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으로 자신을 봐주었는데, 그 보답이란 게 겨우 이런 추한 감정인가. 이제야 드디어 어울리는 여자를 만났는데, 축하해주지는 못할망정! 시현은 자기혐오에 빠졌다.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하루 종일 대청소를 하고 나자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종일 먹은 거라고는 겨우 빵조각 한 개가 전부였지만 이상하게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저녁도 거른 채로 시현은 피트니스 클럽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늘은 PT 수업이 없었지만, 가서 좀 뛰기라도 해야 잡념이 날아갈 것 같았다.

16551948851051.jpg“언니!”

탈의실로 향하는데, 운동복 차림의 예인이 반갑게 부르며 뛰어와서 시현은 깜짝 놀랐다. 지금쯤 같이 식사 중일 줄 알았는데.

16551948835726.jpg“뭐야, 오늘 태하 만나는 거 아니었어?”

16551948851051.jpg“벌써 만나고 왔죠.”

16551948835726.jpg“근데 왜 벌써 헤어졌어? 영화 보고 밥이라도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16551948851051.jpg“영화는 패스하고 식사만 했거든요.”

예인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16551948851051.jpg“저 태하 오빠한테 갑자기 고백받는 바람에 깜짝 놀랐잖아요, 첫 데이트인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표정 관리를 하느라 시현은 애를 썼다.

16551948835726.jpg“그랬어? 잘됐네!”

16551948851051.jpg“겉으로는 되게 무뚝뚝해 보이는데 어찌나 로맨틱한지. 좀 들어보실래요?”

솔직히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싫다고 하기도 전에 예인은 멋대로 시현의 손목을 잡더니 피트니스 클럽 구석의 벤치로 끌고 갔다.

16551948835726.jpg“태하가 뭐라고 했는데 그래?”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시현은 물었다.

16551948851051.jpg“있잖아요.”

예인이 소곤거리듯 말했다.

16551948851051.jpg“자기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한 여자만 봤대요. 근데 그 여자가 자기한테 전혀 관심이 없어서 화가 난대요.”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놀라서 쳐다보자 예인이 종알거렸다.

16551948851051.jpg“그래서 질투 좀 했으면 싶어서 홧김에 저랑 데이트하기로 한 건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저한테는 되게 실례인 거 같다고 미안하대요. 그래서 영화 대신 삼겹살 얻어먹었어요.”

16551948835726.jpg“…….”

16551948851051.jpg“운동도 그 여자 때문에 시작한 거래요. 그 여자가 옛날에 짐승돌을 좋아했었다나 어쨌다나? 그래서 죽도록 고생해서 몸 키운 건데 정작 이제는 취향이 변했는지 거들떠도 안 봐서 속상하다네요.”

시현은 어쩔 줄을 몰랐다.

16551948835726.jpg“저기, 예인아…….”

16551948851051.jpg“지금도 그 여자가 좋아서 죽을 것 같대요.”

활짝 웃고 나서, 예인은 시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16551948851051.jpg“부러워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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