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봄나들이2022.03.01.
아들의 파혼 소식을 들은 우진의 어머니 정임은 몸져누워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내가 동네 창피해서 못 살아.”
누운 채로 앓는 소리를 내는 정임에게, 곁에 있던 우진이 벌컥 화를 냈다.
“아니, 엄마가 보라 확 임신시켜서 데려오라고 부추겨놓고 이러면 어떡해?”
하필 결혼식장이 회사 복지회관이라, 예약 취소와 동시에 회사에 소문이 쫙 퍼지는 바람에 창피해서 연차 내고 집에만 처박혀 있는 중이었다. 정임이 드러누운 채로 바락 소리를 쳤다.
“그럼 데리고 오든가!”
그럴 생각이었다. 아직 결혼식은 두 달 정도 남았으니까, 그전에 혹시 보라가 임신이라도 하면 멋지게 딱 갈아타려고 나름대로는 머리를 굴려서 벌인 일이었다. 현장을 시현에게 딱 걸려버린 게 문제지. 정임이 새삼 한심하다는 듯이 막내아들을 타박했다.
“그러게 이 녀석아, 바람을 피워도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신혼집에까지 여자를 끌어들여, 응?”
“아 나는 싫다고 했어! 보라 걔가 그러자고 우긴 거지.”
거짓말이었다. 보라가 먼저 제의하긴 했지만 냉큼 오케이 한 것은 우진이었다. 신혼집 안방에서 다른 여자를 안는다니, 그 자체로 어찌나 흥분이 되던지. 그날 밤은 꼭 이십 대 팔팔한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시현이 마음 돌려보면 안 되겠니?”
“걔는 텄어. 벌써 나보다 훨씬 잘난 새끼가 채 갔다고.”
우진은 퉁명스레 중얼거리며 슬그머니 가랑이에 손을 가져갔다. 태하에게 걷어차인 부분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날 아침, 놈은 분명 시현의 집에 함께 있었다. 파혼을 선언한 게 바로 그날 새벽의 일인데, 몇 시간이나 됐다고 다른 놈을 끌어들이다니. 마치 자신이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 같지 않은가.
“어쩌면 시현이 걔도 진작 바람피우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우진이 씹어뱉듯 말하자 정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걔한테 남자가 있었단 말이야?”
“있어, 나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놈. 말로는 옛날부터 친한 동생이라고 하는데, 바로 옆집에 살면서 시현이한테 아침밥까지 해다 바치고 있더라고, 그놈이.”
“뭐야?”
정임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럼 갈 데까지 간 사이라는 거잖아!”
“그치, 엄마? 엄마가 생각해도 보통 사이가 아니지?”
“당연하지!”
정임은 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세상에, 뻔뻔하기도 하지. 그 주제에 감히 남의 집 귀한 아들하고 결혼을 하려고 들었단 말이야?”
그러더니 갑자기 제 아들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
“너는 이놈아, 그걸 알면서도 그냥 결혼을 하려고 했어?”
“아 나는 걔가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 그냥 믿었지!”
“어이구, 순진해 빠진 녀석아!”
가슴을 치는 제 엄마를 보고 있자니 우진은 그나마 조금 있던 죄책감도 날아가 버렸다.
‘젠장, 괜히 나만 걸리는 바람에 혼자 욕먹고 독박 썼잖아?’
하지만 어디까지나 걸린 쪽이 등신인 건 사실이었다. 시현은 파혼의 책임이 우진에게 있으니 일체의 위약금을 이쪽이 지불하라고 통보했다. 생각 같아서는 ‘너도 바람피웠잖아!’하고 따지고 싶은데, 이미 시현의 손에 증거사진이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다. - 결혼식 두 달 앞두고 신혼집 침대에서 제 후배와 뒹군 약혼자를 고발합니다! 요즘 네티즌 수사대가 얼마나 무서운데, 자칫 시현이 인터넷 게시판 같은 데 이런 식으로 글이라도 올렸다간 자신은 사회적으로 사망이다.
“하여튼 시현이랑은 끝났으니까, 엄마도 그렇게 알아.”
그러자 정임은 또다시 보라에게 집착했다.
“혹시, 조한신문 댁 아가씨가 진짜 임신했을 가능성은 없고? 요즘은 애가 들어서면 한 달 안에도 알 수 있다던데.”
그날 밤, 우진은 일부러 피임을 하지 않았었다. 마침 피임 도구가 없으니 알아서 잘하겠다고 보라를 살살 꾀어서는 중요한 순간에 실수한 척을 했다. 그러니까 가능성이 아주 없지도 않지만…….
“가능성은 있지. 근데 임신을 했더라도 걔가 나한테 말을 하겠어?”
보라는 자신을 꿈에도 결혼 상대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현장을 딱 걸렸을 때, 시현 앞에서도 대놓고 그러지 않던가.
[말도 안 돼요! 제가 왜 이런 남자하고 결혼을 해요?]
만에 하나 임신을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처리할 게 틀림없었다. 손목 붙들고 가서 임신 테스트를 해 볼 수도 없고. 이래저래 골치가 아파서, 우진은 머리를 감쌌다. * 다음 날인 일요일, 시현은 낮에 수연의 카레 가게를 찾았다.
“이모, 저 왔어요!”
마침 가게를 열 준비를 하고 있던 수연이 시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팠다더니 몸은 이제 괜찮고?”
“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가게는요? 보증금 잘 해결하셨어요?”
수연은 시현의 손을 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다 시현이가 도와준 덕분이야.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투자한 건데요 뭐. 앞으로 저도 시간 나면 가끔 나와서 도울게요.”
수연이 태하의 얘기를 꺼냈다.
“저기, 그 돈 말이야. 다른 사람이 대신 갖다 주던데.”
“아, 걔가 태하예요. 엄청 잘생겼죠?”
“그러게. 아주 멋진 청년이더라.”
왠지 수연은 태하에게 새삼스럽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시현이 상사라고 했지? 본부장이랬던가?”
“네. 저희 회사 일 도와주러 잠깐 오긴 했는데 원래는 자기 회사도 따로 있고, 어엿한 사장님이에요. 엄청 부자고, 천재 소리 듣는 개발자고요. 걔가 고등학교 때부터 앱 개발을 했는데…….”
태하의 칭찬을 듣자 으쓱해진 시현은 저도 모르게 줄줄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생판 남의 이야기인데도 수연은 지루한 표정은커녕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들었다.
“사실은 그 돈 3천만 원도 태하가 준 거예요. 이모 얘기했더니 그러더라고요. 저한테 소중한 사람이면, 자기한테도 소중한 사람이라고.”
“뭐?”
수연은 어쩔 줄을 몰랐다.
“난 그것도 모르고, 고맙다는 소리도 못 했네. 아들뻘인 사람한테 폐를 끼쳐서 어쩌지?”
“걱정 마세요. 전세금 돌려받으면 제가 갚을 거니까요. 태하는 됐다고 하지만, 그렇게 큰돈을 어떻게 그냥 받겠어요?”
“전세금이라니?”
그제야 시현은 수연에게 털어놓았다.
“이모. 저 사실은 오빠랑 파혼했어요.”
신혼집에 갔다가 바람 현장을 딱 잡은 얘기부터, 상대 여자가 다름 아닌 제일 친한 회사 후배였다는 것. 아침에 우진이 찾아왔다가 태하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도망간 얘기까지. 다 듣고 난 수연은 팔을 벌려 시현을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시현이 탓이 아니야.”
부드럽게 시현의 등을 토닥이면서, 수연은 말했다.
“시현이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어디서 들은 말이다 했더니 태하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진짜 내 편은, 이렇게 말해주는 거구나. 따뜻한 품에 안겨서 시현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수연은 태하보다 한마디를 더 했다. 잠시 후 안았던 팔을 풀더니, 시현의 눈을 들여다보며 힘주어 말하는 것이었다.
“더 좋은 사람 만나려고 이렇게 된 거야. 슬퍼할 필요도 없어.”
시현은 픽 웃었다.
“이제 와서 있겠어요, 그런 사람이.”
결혼이고 연애고, 이제 생각만 해도 지친다.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도 없고, 좋은 사람을 만날 자신도 없었다.
“왜 없어? 그 태하란 청년이 시현이 좋아한다면서.”
[지금도 그 여자가 좋아서 죽을 것 같대요.]
순간 어제 예인이 해줬던 말이 뇌리를 스쳐갔지만 시현은 애써 떨쳐버리고 힘없이 웃었다.
“말씀드렸잖아요. 태하는 안 된다고요. 그렇지 않아도 벌써 얘기했어요. 앞으로 거리 두자고, 전세금 돌려받으면 태하 돈도 갚고 다른 데로 이사도 갈 거라고요.”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어?”
단호한 말투에 시현은 놀라서 수연을 바라보았다. 여태 시현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난 시현이가 어떤 결정을 하든 응원해, 하고 말해주던 태도와는 사뭇 달라서였다.
“시현이도 태하 청년한테 마음이 없는 거 아니잖아. 그런데 왜 도망가려고 해?”
심지어 수연은 다그치다시피 했다.
“괜히 돌이킬 수 없을 데까지 가면 서로 더 힘들어지잖아요. 그렇게 되기 전에…….”
“그러니까 왜 돌이킬 생각부터 하느냔 말이야. 그 친구는 시현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시현이도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되지.”
“태하는 제 손으로 키운 아이라니까요. 어떻게 그래요?”
“키웠지, 낳았어? 엄마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딱 잘라 말하고, 수연은 시현의 손을 끌어다 꼭 잡았다.
“이것저것 머리 아프게 생각할 것 없으니까 잠자코 이모 말 들어.”
시현의 손을 꼭 잡고, 수연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 친구가 바로 시현이 짝이야, 틀림없이.”
* 수연이 만들어 준 카레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현은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수연은 태하의 마음을 받아주라고 시현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심지어 다음에는 꼭 태하와 함께 오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수연 이모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 편이다. 어떤 상황이든 내 행복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해줄 사람이다. 그런 이모가 저렇게까지 말할 때는, 어쩌면 그 말이 맞는 거 아닐까……. 어제 예인이 했던 말도 생각났다.
[태하 오빠는 언니 아니면 평생 연애 못 할 것 같던데요? 아무래도 언니가 구제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첫 데이트에서 다른 여자에 대한 구구절절한 고백을 듣고 온 것치고는 놀랍도록 너그러운 반응이어서, 시현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열 살이나 어린 예인이 오히려 어른 같고, 자신이 어린애 같았다.
[오빠가 저 만나는데 언니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으셨어요?]
아무렇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하루 종일 둘이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전전긍긍했으니까.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시현에게, 예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마음을 잘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채 한숨 돌리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태하였다.
“무슨 일이야?”
일부러 딱딱한 얼굴로 문을 열자, 태하가 말했다.
“옷 따뜻하게 걸치고 나와. 바람 쐬러 가게.”
평소에 보던 슈트나 스웨터가 아니라 스포티한 느낌의 가벼운 차림이었다. 말마따나 어디 나들이라도 가는 사람 같다.
“뭐?”
“날씨가 너무 좋잖아. 집안에만 있으면 자칫 우울해지니까 나가자고.”
태하는 시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빨리 나와. 시간 아까워.”
어차피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시현은 얼떨결에 끌려나왔다. 태하는 그대로 시현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갔다.
“아니 잠깐만! 어디 가는 건데?”
시현을 제 차에 밀어 넣고, 태하는 문을 닫았다.
“가 보면 알아.”
*
“너 빨리 차 안 세워?”
시현이 다양한 방법으로 화를 내봤지만 핸들을 잡은 태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려달라고!”
“고속도로야. 뉴스 나오고 싶어?”
“그럼 휴게소에서 내려줘.”
“뭐 먹고 싶으면 돌아올 때 사줄게.”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반응은 이런 식이라 결국 시현은 지쳐서 포기해버렸다. 대체 어디를 가는 건지, 뭔데 이렇게 서두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 어디 한번 가 보자. 그러다 드디어 도착한 곳을 보고 시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 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