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언제든 안아줄게, 누나 (47/181)

#47. 언제든 안아줄게, 누나.202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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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49632021.jpg“아, 예. 실은 제 조카 놈이 장가 갈 때가 됐는데 아직 여자친구가 없어서요.”

팀장이 시현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16551949632021.jpg“이따 강 대리랑 만나서 밥 한번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하.”

얼어붙어 있는 시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팀장은 윙크까지 해 보였다.

16551949632021.jpg“전화번호 알려줬으니까 좀 이따 연락 갈 거야. 그럼 불금 보내고!”

태하에게 고개를 숙이고, 팀장은 휘파람을 불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16551949632036.jpg“…….”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현은 태하의 눈치를 보았다.

1655194963204.jpg“저기, 일단 나가는 봐야 할 것 같아.”

거절만 하고 얼른 돌아올게, 하고 말하려는데 문득 태하가 미소를 지었다.

16551949632045.jpg“잘 갔다 와.”

듣기에는 태연한 목소리였지만,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다는 걸 시현은 금세 알아챘다. 미소 짓는 입가가 미세하게 굳어 있었으니까.

16551949632045.jpg“이따 밤에 비 많이 온다니까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

16551949632055.jpg“뭐, 소개팅?”

얘기를 들은 미주는 귀가 번쩍 띄어서 자기가 더 좋아했다.

1655194963204.jpg“가서 그냥 죄송하다고 사과만 하고 일어날 거야.”

16551949632055.jpg“무슨 소리야? 이왕 만나는 거, 잘해봐야지!”

1655194963204.jpg“내가 지금 무슨 정신에 사람을 만나? 파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16551949632055.jpg“얼마 안 됐으니까 그것들 보란 듯이 새 남자 만나야지! 나이도 동갑이고, 능력도 있고. 딱 좋다, 딱 좋아.”

됐다는데도 강제로 신상 립스틱까지 꺼내서 발라주면서, 미주는 호들갑을 떨었다.

16551949632055.jpg“아유, 예쁘다. 오늘 잘해보는 거야. 알았지?”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미주는 태하에 대한 일은 모르니까. 어쨌든 이미 약속을 잡아놨다고 하니, 팀장님을 봐서라도 일단 얼굴은 보고 직접 이야기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정작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 상대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리다 결국 시현은 팀장을 찾아 나섰다. 연락이 없는데 어떡할까요, 하고 물을 셈이었다.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니다 시현은 빈 회의실 창가에 혼자 서 있는 팀장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1655194963204.jpg“저어, 팀장님…….”

부르며 다가가는데, 갑자기 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16551949632021.jpg“야 인마, 벌써 얘기 다 해놨는데 이제 와서 못 만나겠다고 하면 어떡해?”

다시 보니 팀장은 통화 중이었다. 시현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16551949632021.jpg“아니 서른셋이 어때서? 너야말로 서른셋이나 처먹고 여태 철없이 어린 여자 타령이나 하고 있냐? 이 한심한 놈.”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16551949632021.jpg“그 친구 내가 입사 때부터 데리고 일했는데, 아주 사람이 진국이라니까. 남자는 그런 여자를 만나야 인생이 확 피는 거야. ……아 부모 없는 게 어때서! 그게 그 친구 잘못이야?”

팀장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고마운 마음과 민망한 마음이 교차했다. 그러게 왜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하셨어요.

1655194963204.jpg“팀장님.”

뒤에서 가만히 부르자 팀장이 흠칫 놀라며 얼른 전화를 끊었다.

16551949632021.jpg“어, 어. 강시현이. 아직 퇴근 안 했나?”

1655194963204.jpg“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은 정말로 누굴 만날 여유가 없어서요. 귀한 조카님이신데, 만나 봤자 실례만 될 것 같아요.”

시현은 고개를 숙였다.

1655194963204.jpg“조카 되시는 분께도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16551949632021.jpg“그,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괜히 내가 오지랖을 떨었구먼.”

얼굴이 벌게져서 고개를 끄덕이는 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시현은 회사를 나왔다. 집에 갈까 하다가 시현은 근처 식당가로 향했다. 저녁 약속 있다는 걸 태하가 뻔히 알고 있는데, 도저히 만나기도 전에 거절을 당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현은 혼자 식당에 들어가서 일부러 제일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시켰다. 그러나 무슨 맛인지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반대로 거절을 당하고 나니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고무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고기 조각을 억지로 넘기며 시현은 생각했다.

1655194963204.jpg‘내가 그렇게 별론가?’

하기야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면 당연히 더 어리고 조건도 좋은 여자를 만나려고 하겠지. 머리로는 이해해도 씁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1655194963204.jpg‘그래도 태하는 내가 좋다는데…….’

어느덧 태하의 존재를 마음의 위안으로 삼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시현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너는 남자도 아니라고 제 입으로 말해놓고 이게 무슨 이기적인 마음인지. 결국 시현은 음식을 채 반도 먹지 못하고 식당을 나왔다. 나오는 길에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잡으며 시현은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태하가 나를 좋아했던 게.

16551949632045.jpg[기억도 안 나. 너무 오래돼서.]

태하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순간, 기억나는 게 있었다. 태하가 고등학교 1학년 올라가던 겨울방학에,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시현에게 운동화를 사준적이 있었다. 그것도 이십만 원 가까이나 하는 비싼 운동화여서, 시현은 크게 화를 냈었다.

1655194963204.jpg[누가 너한테 이런 거 사달랬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결국은 백화점에 가서 환불을 받아다가 그 돈으로 태하가 쓸 문제집 따위를 한 아름 사다 안겼던 기억이 난다.

1655194963204.jpg[자, 이거나 풀어. 한 번만 더 쓸데없는 거 사 오면 너 진짜 혼난다.]

태하는 그로부터 열흘 넘게 시현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사춘기라 반항하는 건 줄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알 것 같다. 그 돈을 모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선물을 받고 기뻐할 나를 떠올리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을까. 그렇게 사 온 선물을, 화까지 내면서 내면서 문제집으로 바꿔 왔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이제 와서 시현은 마음 깊이 후회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고맙다고, 너무 예쁘다고, 아껴서 잘 신겠다고 말해줄 텐데. ……하지만 시간을 돌릴 수는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어디선가 태하가 우산을 들고 뛰어왔다.

16551949632045.jpg“식사는 잘했어?”

차분한 목소리 안에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여태 태하가 얼마나 불안해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우습고도 창피했다. 바람이나 맞고 오는 여자가 뭐가 대단하다고, 너 같은 남자가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려.

1655194963204.jpg“만나지도 못했어.”

16551949632045.jpg“왜?”

1655194963204.jpg“그쪽에서 아무래도 내가 너무 아니다 싶었나 봐.”

시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1655194963204.jpg“하긴 내가 뭐 볼 거 있니. 나이도 많고, 부모님도 안 계시고.”

어쩔 줄을 모르는 태하에게, 시현은 한숨을 짓고 말했다.

1655194963204.jpg“있잖아, 태하야. 정말 너한테 나는 아닌 거 같아.”

16551949632045.jpg“갑자기 왜 그래. 이제 나 싫다고 안 하기로 했잖아.”

태하는 금세 불안한 얼굴을 했다.

1655194963204.jpg“싫다는 게 아니야. 그냥,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

16551949632045.jpg“그게 무슨 소리야?”

1655194963204.jpg“넌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잖아.”

제게 쏟아주는 진심마저 아까웠다. 너라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할 자격이 있는데, 왜 하필 나한테. 한 방울이라도 젖을까, 시현의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우산을 받친 채로 태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16551949632045.jpg“나는 살면서 당신보다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어. 당신처럼 다정한 사람도, 진실한 사람도 몰라.”

1655194963204.jpg“…….”

16551949632045.jpg“한순간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당신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려고 죽도록 노력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당신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해?”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시현은 목덜미부터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우진과 처음 사귈 때조차 이런 고백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눈앞에 바로 태하의 넓은 가슴이 있었다. 그 품에 뛰어들어 안기고 싶은 자신을 깨닫고, 시현은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1655194963204.jpg“……비 점점 많이 온다. 올라가서 쉴게.”

  * 저녁 무렵부터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굵어졌다. 밤이 깊어지자 천둥번개까지 치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 할 때마다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다 시현은 문득 태하가 걱정되었다. 어릴 때, 태하는 유독 천둥번개를 무서워했었다. 그래서 그런 날이면 집에다가는 친구 집에서 잔다고 거짓말을 하고 태하 집에서 둘이서 나란히 누워 자곤 했었다. 아무래도 잘 있나 가 봐야겠다, 싶어서 시현은 몸을 일으켜 신발을 신었다. 밖으로 나오는데 문 앞에 바로 태하가 지키듯 우두커니 서 있어서 깜짝 놀랐다.

1655194963204.jpg“너 왜 나와 있어?”

16551949632045.jpg“자꾸 천둥번개가 치잖아. 혹시 당신이 무섭지 않을까 해서…….”

얘가 뭘 잘못 기억하나. 어이가 없어서 시현은 되물었다.

1655194963204.jpg“내가 왜 무서워? 무서워했던 건 너…… 엄마야!”

갑자기 귓가에 쾅, 하고 천둥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시현은 말하다 말고 기겁을 해서 태하의 품에 숨듯이 바짝 기댔다.

16551949632045.jpg“그것 봐.”

태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시현을 품에 끌어안았다.

16551949632045.jpg“당신도 무서웠잖아, 그때.”

넓고 따뜻한 가슴에 안겨 있자 옛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래, 사실은 무서웠던 것 같다. 태하도 어렸지만 시현도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1655194963204.jpg[괜찮아, 누나 여기 있어.]

안고 달래주면서도, 한편으로는 태하가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천둥이 칠 때마다 잠에서 깨어 겁을 먹고 시현의 품에 파고들던 어린아이는, 이제는 바로 귓가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도 어깨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그녀를 굳세게 껴안고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며, 태하는 속삭이듯 말했다.

16551949632045.jpg“이제 무서울 때는 언제든 내가 안아줄게.”

조금 망설이다, 그는 덧붙였다.

16551949632045.jpg“……누나.”

그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어릴 때와는 전혀 다른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누나, 하는 말에 또다시 천둥이 쳤다. 이번에는 시현의 가슴 속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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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날은 거짓말처럼 날이 맑게 개어 있었다. 휴일이라 느지막하게 눈을 뜬 시현은 옆집으로 향했다.

1655194963204.jpg“본부장님! 이따 수연 이모네 카레집이나 같이 갈래?”

괜히 데이트 신청하는 것 같은 기분에 좀 민망해서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16551949632045.jpg“미안. 오늘은 내 회사에 일이 있어서.”

마침 넥타이를 매고 있던 태하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새하얀 와이셔츠가 눈부셨다.

1655194963204.jpg“아, 유니온TA.”

우리 본부장님께서 엄연히 본인 회사 대표님이기도 하다는 걸 깜빡했다. 바쁘신 분에게 한가하게 카레나 먹으러 가자고 했구나.

1655194963204.jpg“하긴 네 회사에도 신경 써야지. 알았어, 그럼 고생해.”

16551949632045.jpg“잠깐만!”

나가려는 시현을, 태하가 황급히 붙잡았다.

16551949632045.jpg“저녁때까지는 어떻게든 꼭 끝내고 돌아올게.”

1655194963204.jpg“됐어. 바쁜데 신경 쓸 거 없어.”

16551949632045.jpg“기다려, 최소한 다섯 시까지는 올 테니까…….”

1655194963204.jpg“글쎄 괜찮다니까. 그럼 수고!”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태하를 뒤로 하고 시현은 제 집으로 돌아왔다. 딱 한 번 본 것뿐인데, 수연은 태하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꼭 태하랑 잘됐으면 좋겠다고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번엔 둘이 같이 오라고도.

1655194963204.jpg‘이모 말도 들을 겸, 같이 갈까 한 건데 바쁘다 이거지?’

꼭 데이트 신청했다 거절당한 것처럼 괜히 기분이 꿀꿀해졌다. 시현은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심심하게 보냈다. 책도 보고, 유튜브도 보고, 가끔씩은 조용한 옆집을 살짝 흘겨보았다.

1655194963204.jpg“이제 무서울 때는 언제든 내가 안아줄게.”

목소리를 착 깔고 태하의 흉내도 내보았다.

1655194963204.jpg“그렇게 바빠서 연애는 어떻게 하겠다고 그런 소릴 해?”

갑자기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아니, 누가 보면 윤태하랑 진짜 연애하는 줄 알겠네? ‘윤태하’와 ‘연애’라니. 두 단어를 한 문장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새삼 놀라웠다. 십 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너 미친 거 아니냐고 멱살 잡았겠지. 또 머릿속이 복잡해질 것 같아서 시현은 그냥 침대에 누워 버렸다. 뒹굴뒹굴하다가 어느덧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전화가 울려서 시현은 눈을 떴다. 비몽사몽간에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자마자 대학 시절 친구인 주은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왔다.

16551949632021.jpg- 너 지금 어디야?

1655194963204.jpg“나? 나 집인데.”

16551949632021.jpg- 뭐야, 왜 아직 집이야? 설마 여태 출발 안 했어?

시현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1655194963204.jpg“응? 무슨 소리야?”

16551949632021.jpg- 오늘 청첩장 모임 하기로 했잖아, 다섯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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