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너만 보면 심장에서 북소리가2022.03.22.
“무슨 일입니까?”
미주를 등 뒤에 숨기듯 가로막고 서서 묻는 사람은 바로 윤태하 본부장이었다. 방금까지 곧 미주를 잡아먹을 것처럼 펄펄 뛰던 성 과장은, 본부장을 보고는 흠칫 놀라 금세 꼬리를 내렸다.
“별일 아닙니다, 본부장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얼버무리고 재빨리 도망가려 했지만 본부장은 놓아주지 않았다.
“별일이 아닌데 왜 고성까지 내는 건지, 좀 들어나 봅시다.”
어쩔 수 없이 성 과장은 사정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본부장이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UI 디자이너한테 스토리보드 검수까지 하라는 말입니까?”
“아니, 검수까지는 아니라도 눈에 보이는 오탈자는 좀 잡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정보구조의 흐름, 브랜드 아이덴티티, 시인성. UI 디자이너는 이런 고민들만으로도 이미 머리 터지게 바쁜 사람입니다. 심지어 지금은 원앱팀 일로 정신이 없는데 그런 사람한테 오류 검수까지 떠맡기고, 정신이 있습니까? 대체 담당자가 누굽니까?”
“저, 접니다.”
“그럼 본인이 담당자인데 일은 다른 사람한테 다 미뤄 놓고 확인조차 안 하셨다는 겁니까?”
본부장은 매섭게 질책했다. 미주가 옆에서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지금은 원앱팀이 최우선입니다. 앞으로 이미주 대리님한테 일절 다른 일 부탁하지 말고 개발팀 안에서 알아서 해결하세요.”
“예, 시정하겠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겠군요. 가서 개발팀 팀장님께 제 사무실로 좀 오라고 전해주십시오.”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돌아서는 성 과장을, 본부장은 끝까지 매섭게 노려보고 나서야 등을 돌려 미주에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언제 그랬느냐는 듯, 부드러운 말투였다.
“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본부장이 격려하듯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거든 주저 말고 나한테 얘기하도록 하세요.”
저만치 멀어지는 커다란 뒷모습이 세상에 둘도 없이 믿음직해 보였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주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옛날에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첫 키스를 할 때는 귓가에서 종소리가 울린다나. 비록 첫 키스는 아니었지만, 시현은 어제 분명히 어떤 소리를 들었다. 종소리가 아니고 북소리였다. 둥둥둥둥. 마치 전장의 북소리 같은 그 소리가, 바로 제 심장 소리였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야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였으니까. 덕분에 월요일 아침, 시현은 팀원 중 맨 먼저 출근하는 쾌거를 거뒀다. 태하가 아침에 밥 먹으라고 말하러 오기 전에 일찌감치 회사로 도주했기 때문에. 어젯밤에 그렇게 뜨겁게 키스해놓고, 도저히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수고가 많습니다.”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소리로 태하가 사무실에 들어왔다는 걸 알았지만 시현은 모르는 척, 더없이 일에 열중한 척 모니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일은 잘돼 갑니까? 강시현 대리님.”
바로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또 북소리가 울렸다. 둥!
“아 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차마 얼굴을 못 쳐다보겠어서 그의 슈트 두 번째 단추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 시현은 얼른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휴, 바쁘다, 바빠. 이걸 어느 세월에 다 하지?”
시현이 일부러 외면하는 걸 눈치챘는지, 다행히도 태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태하가 가고 나서도 둥둥둥, 북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바람에 시현은 제 심장을 야단쳤다.
‘너 돌았니? 저 핏덩이를 상대로 나대는 게 말이 돼?’
그러나 정신 차리자 싶어서 커피를 가지러 휴게실에 가는 그 짧은 사이에도 또 떠올리고 있었다. 뒷머리를 단단히 받쳐 주던 커다란 손과, 뜨거운 입술과, 씁쓰레한 향기와…….
“와 미치겠다!”
혼자 외치며 복도 벽에 머리를 박는 시현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안됐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어쩜 좋아. 강 대리, 많이 힘든가 봐.”
“그러게. 청첩장까지 돌리고 파혼이 어디 쉽겠어, 쯧쯧.”
다행히도 남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든, 이미 딴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시현의 귀에는 손톱만치도 들리지 않았다. 나대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주은이었다. 시현은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주은아. 어젠 잘 들어갔어?”
- 나야 잘 들어갔지. 너야말로 괜찮아?
“응?”
- 걔, 아니 참, 이제 그렇게 부르면 안 되지. 태하 씨 많이 화났지?
주은이 깔깔대고 웃었다.
- 참 연기 더럽게 못 하더라, 강시현.
시현은 얼굴에 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이미 다 들킨 것도 들킨 거지만, 간밤의 키스가 또 떠오르는 바람에 차마 아무 사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사이 아닌 사람에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북소리가 들리진 않을 거 아닌가.
“그게, 저기…….”
- 이제 안 놀릴 테니까 걱정 말고 잘해봐. 요즘 세상에 까짓거 일곱 살 연하가 뭐라고 그렇게 부끄러워해?
의외로 쿨하게 나오는 바람에 시현은 도리어 어리둥절했다.
“저기, 좀 그렇지 않아? 내 손으로 키운 애인데.”
- 키웠지, 낳았니?
주은이 수연과 정확히 똑같은 말을 하는 바람에 잠시 소름이 돋았다.
- 걔, 아니 태하 씨 낳아준 어머님도 지금쯤 하늘에서 잘됐다고 박수 치고 계실걸? 네가 여태 자기 아들한테 하는 걸 다 보셨을 텐데.
그래도 시현은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도 모르게 변명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있잖아. 태하가 나 좋아하는 건 사실인데, 파혼한 건 진짜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바람은 진짜로 저쪽이…….”
- 당연하지. 강시현이 어떤 앤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이 날아왔다.
- 너 아는 사람이면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왠지 울컥해서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 어제 너 가고 나서, 우리 다 너무 잘됐다고 박수쳤어. 그 똥차 놈이 바람 안 피웠으면 어쩔 뻔했니?
주은은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 다음번엔 태하 씨도 데리고 나와. 친구 잘 둔 덕분에 우리도 눈 호강 좀 하자. 앉혀놓고 하루 종일 얼굴만 봐도 재미있을 거 같다 야.
전화를 끊은 시현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남들이 알면 손가락질할 거라고, 파혼도 모조리 내 탓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반응은 예상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어쩌면 나는 지금껏,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너무 겁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에 잠겨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그만 복도에서 태하를 딱 마주치고 말았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비켜 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강시현 대리님, 잠깐 내 사무실로.”
태하는 그렇게만 말하고 따라오라는 듯 등을 돌려 성큼성큼 가 버렸다. 집이면 모를까, 회사에서는 어디까지나 까마득한 상사다. 싫다고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시현은 태하의 뒤를 따라갔다. 태하의 사무실에 들어서면서도 시현은 바닥을 쳐다본 채로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확 끌어안겼다.
“화났어?”
시현을 제 품에 꼭 안아 가두고, 태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작 어제 화를 낸 건 자기면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시현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화 안 났어. 안 났으니까 이것 좀 놓고…….”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바르작거리는 시현을, 태하가 온몸으로 꽉 껴안았다.
“내가 잘못했어.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글쎄 화 안 났다니까?”
“그럼 왜 하루 종일 내 얼굴도 안 쳐다보고 있는데.”
바위처럼 단단한 가슴.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센 팔. 온몸의 체온이 10도 정도 일시에 상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시현은 안긴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잠깐,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놓고!”
“싫어.”
시현을 단단히 안은 채, 태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놔 주면 도망갈 거잖아.”
딱 걸렸다. 시현은 그물에 걸린 새처럼 태하의 품 안에서 덧없이 파닥거렸다.
“당신이 나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 거 알아. 알면서도 어제는 너무 화가 났어. 그래서 그만 실수했어.”
태하는 빠르게 말했다.
“그렇다고 또 나는 안 된다고, 그만하자고 할 거 아니지?”
그제야 시현은 태하가 왜 이렇게 겁을 내는지 알았다. 겨우 밀어내지 않기로 했는데, 어제 일로 화가 나서 없던 일로 하자고 할까 봐 그러는 거구나. 그럴 생각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얼굴에 먼저 불이 나는 바람에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시현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하는 불안해 죽겠는 모양이었다.
“화를 내도 좋으니까 뭐라고 말 좀 해봐, 응?”
더 세차게 끌어안으면서 속삭이는데, 숨이 다 안 쉬어졌다. 둥둥둥, 심장에서 북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서 이러다가 태하에게까지 들릴까 봐 무서울 지경이었다. 문득 태하의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태하는 도망갈까 두렵다는 듯이 한 팔로 시현을 단단히 안은 채 나머지 한쪽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 본부장님. 대표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시현의 귀에까지 들렸다.
“곧 올라가겠다고 전해줘요.”
대꾸하느라 잠시 팔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시현은 재빨리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아차, 하는 표정을 하는 태하를 뒤로 한 채 꽁무니가 빠져라 사무실을 도망쳐 나왔다. * 종일 제 얼굴도 안 쳐다보는 시현 때문에, 태하는 어쩔 줄을 몰랐다. 허락도 안 받고 키스한 건 물론 잘못했다. 변명을 좀 하자면, 좀 놀란 것 같긴 했지만 싫다고 밀어내지는 않아서 그만 충동이 시키는 대로 거침없이 입을 맞춰 버렸다. 정신이 든 것은 시현이 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도망쳐 버린 후였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무릎이라도 꿇고 싹싹 빌 각오로 퇴근하고 내내 기다렸는데도 시현은 귀가하지 않았다. 저녁 여덟 시가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아서, 태하는 생각다 못해 수연의 카레 가게로 향했다. 혹시 시현이 거기 있나 해서였는데, 시현은 보이지 않고 혼자 뒷정리를 하고 있던 수연이 태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마침 닫을 시간인 줄 모르고……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안 되지. 어서 와서 앉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폐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지 말고, 응?”
수연이 하도 권하는 바람에 태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습니다.”
시현을 기다리느라 여태 저녁도 굶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요.”
수연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시현이는요? 같이 오지 않고, 왜.”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 그릇을 태하 앞에 놓아 주며 수연이 물었다.
“그게…… 시현 씨가 화가 많이 났습니다.”
“아니, 무슨 일로?”
차마 허락 없이 키스했다고 말은 못 하고, 태하는 한숨을 지었다.
“제가 잘못한 겁니다. 시현 씨는 아직 저한테 아무 감정도 없는데…….”
“시현이도 태하 씨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닐 거예요. 단지 파혼한 지도 얼마 안 됐고 하니까, 생각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수연의 말에 태하는 귀가 번쩍 띄었다.
“그럴까요?”
“그럼. 태하 씨처럼 잘생기고 멋진 청년을 누가 싫어할까?”
태하를 바라보는 수연의 눈빛에 정이 담뿍 느껴졌다.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어머니가 자식을 바라보는 눈빛이 저렇지 않을까, 하고 태하는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겨우 두 번째 만난 것뿐인데, 수연이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태하는 싫지 않았다. 나에게도 이런 어머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래서일까. 태하는 저도 모르게 주제넘은 질문을 했다.
“아드님과는 언제 마지막으로 보신 겁니까?”
수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낳자마자 한 달 만에 미국으로 보내고, 그 후로는 한 번도 못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