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 애타게 찾는 사람 (51/181)

#51. 애타게 찾는 사람202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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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50298653.jpg“아드님과는 언제 마지막으로 보신 겁니까?”

수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16551950298658.jpg“낳자마자 한 달 만에 미국으로 보내고, 그 후로는 한 번도 못 봤어요.”

태하는 내심 놀랐다. 아들이 나와 동갑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오래 못 봤다니.

16551950298658.jpg“그 애 아버지가, 꼭 부모님한테 허락 받아서 날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었어요.”

수연이 한숨을 지었다.

16551950298658.jpg“그런데 웬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아이를 내놓으라지 뭐예요. 잘은 모르지만 그 집안이 대단한 집안이었나 봐. 그러니까 그 집에서 절대 나 같은 여자랑은 결혼 못 시키겠다고, 아이만 데려오라고 보낸 거예요.”

그러면 아이를 빼앗겼다는 거 아닌가. 태하는 진심으로 수연에게 연민을 느꼈다. 동시에 무정한 남자에게도 화가 치밀었다.

16551950298653.jpg“그런데도 아드님 아버지 되시는 분은 가만히 계셨단 말입니까?”

16551950298658.jpg“부모님이 무척 무서운 분들이라고 했었거든요. 아마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수십 년 전의 일인데도, 수연은 금세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을 했다.

16551950298653.jpg“많이 힘드셨겠습니다.”

16551950298658.jpg“처음 몇 년 동안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죠. 근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렇더라고. 나 같은 엄마 밑에서 자라는 것보다야, 부잣집에서 좋은 교육 받으면서 자라는 게 아이를 위해서도 훨씬 좋은 길이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지 뭐.”

다행이라 말하면서도 수연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태하는 아픈 곳을 건드린 자신을 후회했다.

16551950298653.jpg“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려서…….”

16551950298658.jpg“아니에요. 내가 누구한테 이런 얘기를 해보겠어? 시현이한테도 그냥 아들이 있다는 말만 했지, 여태 자세한 얘긴 못 했어요.”

수연이 앞치마 자락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16551950298658.jpg“지금은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한 번은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희망으로 살아요. 그래서 나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우리 아들은 한국말을 못 할 거 아니에요?”

그 말에 태하는 레온을 떠올렸다. 아버지도 수연과 같은 마음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던 걸까. 문득 지구 저편에 있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그런 태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수연이 물었다.

16551950298658.jpg“참. 태하 씨는 고등학교 때 아버지를 찾았다고 시현이가 그러던데. 가끔 만나기도 하나요?”

16551950298653.jpg“예. 1년에 한두 번씩 저를 보러 한국에 오시는데, 올해도 곧 오신다고 하네요. 오시면 아버지하고 한번 같이 놀러 오겠습니다.”

수연이 손뼉을 쳤다.

16551950298658.jpg“어머나, 영어로 얘기해볼 일이 생겼네? 회화 연습 열심히 해둬야겠어요.”

저희 아버지 한국말 잘하십니다, 하고 대답하려다 태하는 입을 다물었다. 모르고 있는 편이 실제로 만났을 때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인 레온과 수연이 마침 동갑이었다.

16551950298653.jpg‘어쩌면 두 분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즐겁게 생각하다, 시현이 떠올라 태하는 또다시 마음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혹 시현과 제 사이가 영영 틀어져버리면 이 가게에도 더는 오기 힘들어질 것 아닌가.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아서 숟가락을 놓아 버리는 태하를, 수연이 상냥하게 위로했다.

16551950298658.jpg“너무 걱정 말아요. 우리 시현이도 태하 씨를 꼭 알아봐 줄 테니까.”

태하는 불쑥 말했다.

16551950298653.jpg“제가 아드님과 동갑이고 하니까, 괜찮으시다면 말씀 놓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름도 시현 씨 부르시듯 편하게 불러주시고요.”

16551950298658.jpg“그래도 우리 시현이 상사 되시는 분인데 어떻게 그래요.”

16551950298653.jpg“저는 편하게 대해주시는 쪽이 더 기쁠 것 같습니다.”

16551950298658.jpg“정말 그래도 될까요?”

한참을 망설이던 수연은, 기쁜 듯한 얼굴로 조심스레 태하를 불렀다.

16551950298658.jpg“……태하야.”

애정이 담긴 목소리. 왠지 이상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태하는 얼른 숟가락을 도로 들어 밥을 먹는 척했다. * 태하는 수연의 가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밤 열두 시 넘어서까지 기다렸는데도 시현은 끝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봤지만 휴대폰은 아예 꺼져 있었다.

16551950298653.jpg“대체 어디를 간 거야…….”

태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걱정도 되고, 한편으로는 절망에 가슴이 무너졌다. 나와 키스한 것이 그렇게까지 싫었나. 내가 꼴 보기 싫어서 집에도 안 들어올 정도로. 마침 선물 받은 위스키가 집에 있었다. 속이 상한 나머지 태하는 밤늦게 혼자 술을 마셨다.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에 몇 잔 못 가서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평소 무뚝뚝하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남자는, 술기운에 마음이 약해지자 새삼스레 허전함을 느꼈다. 누구에게라도 이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데 그럴 상대라곤 없다. 강시현의 시간을 따라잡고 싶은 마음에 늘 인생을 숨 가쁘게 살아오느라, 친한 친구 한 명 만들지 못했다. 그러다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레온이었다. 아버지라면 갑자기 연락해도 반갑게 받아주지 않을까. 그래도 새벽 한 시인데 너무 늦지 않았을까, 생각하다 아버지가 있는 곳은 지금 아침이라는 것이 뒤이어 떠올랐다. 태하는 조금 망설이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1655195032972.jpg- 아들?

레온이 놀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그야 태하가 먼저 전화를, 그것도 화상통화를 걸어온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1655195032972.jpg- 무슨 일 있니? 거기는 지금쯤 한밤중일 텐데.

당장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는 레온에게, 태하는 위스키 잔을 들어 보였다.

16551950298653.jpg“별일 아닙니다. 그냥, 아버지하고 술 한잔하고 싶어서요.”

술기운 덕분일까. 처음 부를 때는 무척이나 어색했던 아버지라는 말이, 두 번째는 제법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레온은 놀란 얼굴로 화면 너머의 태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서둘렀다.

1655195032972.jpg- 잠깐 기다려주겠니? 나도 술 좀 가져올게.

16551950298653.jpg“괜찮아요. 거기는 아직 아침이잖아요.”

1655195032972.jpg- 무슨 소리야? 아들이 처음으로 한잔하자는데, 당연히 마셔야지.

뛰다시피 화면에서 사라진 레온이, 잠시 후 위스키 병과 잔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1655195032972.jpg- 자, 건배.

지구 저편에 있는 아버지와 건배를 하고, 태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16551950298653.jpg“아버지. 아버지도 사랑을 해본 적이 있으시겠죠?”

1655195032972.jpg- 당연하지. 그러니까 네가 태어났지 않니?

장난기 어린 표정이 같은 남자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부자 사이인데 왜 나는 이렇게 무뚝뚝하기만 하고, 아버지는 저렇게 매력적일까. 이래서 시현이 아버지를 좋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태하는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렇다고 전처럼 아버지가 밉지는 않고, 그저 한없이 부럽기만 했다.

16551950298653.jpg“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여태 태하는 한 번도 레온에게 어머니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다. 알고 있는 거라고는 레온이 처음에 해 준 간단한 얘기가 전부였다. 스무 살 때 한국에 잠시 여행을 왔다가 어머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것. 그 후 아버지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오랫동안 아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 정도.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까지 차마 묻지 못한 것은, 혹시 어머니 얘기를 하면 아버지가 슬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1655195032972.jpg-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어.

다행히 아버지에게 있어 어머니는 아픈 기억만은 아닌가 보다. 태하는 마음을 놓고, 역시 궁금했지만 여태 한 번도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16551950298653.jpg“혹시 어머니 때문에 아직까지 혼자이신 건가요?”

아버지는 20대 때 한 번 부모의 권유로 다른 여자와 비즈니스 차원의 결혼을 했다가 몇 년 못 가 이혼했다고 들었다. 그 후 4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독신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가 어머니 때문인지 궁금했다. 수십 년 전에 잠시 사랑했던 여자 때문에 여태 혼자라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갈 법도 했다. 하지만 태하는 이해할 것 같았다. 만약에 시현이 끝내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자신도 아버지처럼 그냥 혼자서 나이를 먹어갈 것 같다. 어쩌면 나의 그런 면은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닐까. 레온은 대답 대신 웃으며 되물었다.

1655195032972.jpg- 우리 아들이 내 러브스토리에 관심을 다 갖는 걸 보니까 연애를 하는 모양이구나?

16551950298653.jpg“짝사랑입니다. 연애가 아니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짓고 빈 잔을 채우는 태하에게, 레온이 놀리듯 물었다.

1655195032972.jpg- 왜, 시현이가 잘 안 넘어오니?

태하는 놀라서 입으로 가져가던 잔을 멈췄다. 시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아버지가 눈치채고 있었던 줄은 미처 몰랐다. 레온은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1655195032972.jpg- 내가 너를 찾았을 때, 너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 그때부터 벌써 사랑에 푹 빠진 눈으로 시현이를 바라보고 있던데.

그렇게까지 뻔히 보였나. 민망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 눈에는 그토록 잘 보이는 걸 혼자만 모르고 있었던 둔한 여자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1655195032972.jpg- 그래서 네가 어른이 되면 둘이 서로 사랑하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지. 내 아들에게 시현이만큼 어울리는 짝은 세상에 또 없을 테니까 말이야.

태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작 그때 시현은 아버지에게 반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16551950298653.jpg“그건 아버지가 틀리셨네요.”

태하는 한입에 위스키를 털어 넣고 중얼거렸다.

16551950298653.jpg“시현 씨는 제가 남자로 안 보인답니다. 그냥 어린애일 뿐이래요.”

1655195032972.jpg- 저런.

레온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1655195032972.jpg- 어쩔 수 있겠니.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상대가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수밖에.

레온은 아들을 격려하듯 화면에 잔을 갖다 댔다.

1655195032972.jpg- 힘내서 기다려보자. 너도, 그리고 나도.

레온의 마지막 말에 태하는 위화감을 느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니까, 기다린다고 해서 돌아올 수 있는 분이 아닌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레온은 금세 아차, 하듯 당황한 얼굴을 했다.

1655195032972.jpg- 아. 그게…….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리는 레온을 보고, 태하는 눈치를 챘다. 아버지도 좋아하는 여자 분이 있는 거구나.

16551950298653.jpg“저는 괜찮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분이라면 분명 좋은 분이겠지요.”

아직도 젊고 매력적인 아버지가 여태 혼자인 것이 은근히 안타까웠던 차다. 싫기는커녕,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16551950298653.jpg“저도 언젠가 그분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1655195032972.jpg- 그래.

잔을 비우고, 레온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1655195032972.jpg- 그녀도 너를 만나면 무척 기뻐할 거야.

태하는 꿈에도 몰랐다. 네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말을, 방금 아버지가 위스키와 함께 꿀꺽 삼켜버린 것을. 아버지가 오랫동안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실은 그 어머니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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