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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나 김우진이 엄마예요. (52/181)

#52. 나 김우진이 엄마예요.20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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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하가 밤늦게까지 집에서 술을 마시며 아버지를 상대로 연애 상담을 하는 동안, 시현은 엉뚱한 곳에서 취조를 당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미주의 집이었다.

16551950436326.jpg“그러니까 왜 집에를 못 들어가느냐고.”

16551950436331.jpg“그냥 좀 모른 척하고 하루만 재워주면 안 돼?”

16551950436326.jpg“재워는 주겠는데 사정은 알아야지!”

집주인은 잠도 안 재우고 시현을 들들 볶아댔다. 좀처럼 시현이 불지 않으니 소설까지 써댔다.

16551950436326.jpg“혹시 그 미친놈이 자꾸 집에 찾아와서 빌고 그래? 그런 거야?”

16551950436331.jpg“아냐. 태…… 읍.”

하마터면 ‘태하한테 두들겨 맞고 쫓겨난 후로는 얼씬도 안 해’ 하고 말해버릴 뻔하고 시현은 허둥지둥 제 입을 막았다.

16551950436331.jpg“그런 거 아니야. 요즘은 코빼기도 안 보여.”

16551950436326.jpg“그런 것도 아니면 대체 멀쩡한 집에를 왜 못 들어가는데?”

집요한 미주를, 시현은 한숨을 짓고 바라보았다. 미주가 내 편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내 입으로 뭐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알아서 눈치채고 보라에게 대신 복수해준 것도 무척이나 고마웠다. 사이다 원 샷 한 기분이었다. 그런 미주니까, 확 사실대로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은데. 문제는 태하가 현재 미주의 상사이기도 하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상대를 숨긴 채 얘기하자니 그것도 역시 못 할 노릇이었다. 이제 겨우 파혼한 지 2주밖에 안 됐는데, 벌써 다른 남자와 키스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나. 심지어 그 남자 얼굴만 봐도 자꾸 심장에서 전장의 북소리가 들려와서 고민인데, 하필 그 남자가 바로 옆집에 살고 있고 지금쯤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해서 차마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얘기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16551950436326.jpg“좋아, 말 안 하면 아침까지 안 재운다. 어디 나랑 둘이 밤을 불태워 보자고.”

마치 집착광공 같은 미주의 대사에, 결국 시현은 제한적으로나마 입을 열고 말았다.

16551950436331.jpg“그, 저기, 사실은…… 나 좋다는 사람이 있어.”

딱 그 말만 했는데, 미주는 당장에 눈을 번득였다.

16551950436326.jpg“아니 그새 남자를 만났단 말이야?”

참으로 재주도 좋다는 듯이 쳐다보는 바람에 시현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16551950436331.jpg“아니야! 내가 무슨 정신으로 누굴 만나, 지금. 그냥 옛날부터 알던 사람인데…….”

16551950436326.jpg“그 코인 동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주가 외치는 바람에 시현은 소름이 다 돋았다. 보라 때도 그렇고, 촉이 장난이 아니다.

16551950436331.jpg“미주 씨, 혹시 신기 같은 거 있어?”

16551950436326.jpg“복채 달라고는 안 할 테니까 얼른, 당장에 털어놓아 봐. 내가 다 들어준다.”

미주가 귀를 바짝 들이댔다.

16551950436331.jpg“저기…… 그게…….”

결국 시현은 더듬거리면서 있었던 일의 대부분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 상대가 바로 윤태하 본부장이라는 것만 빼고. 민망한 나머지 두서없이 주절거린 말을, 미주는 귀신같이 정리해서 되물었다.

16551950436326.jpg“그러니까, 그 코인 부자 동생이 사실은 옛날부터 시현 씨를 좋아했다?”

16551950436331.jpg“으, 응.”

16551950436326.jpg“근데 어쩌다 그 동생이랑 키스를 했는데 그 후로 자꾸 심장이 나대서 고민이다?”

16551950436331.jpg“그런 것 같…… 악!”

갑자기 미주가 등짝을 매섭게 후려갈기는 바람에 시현의 대답은 비명으로 끝났다.

16551950436326.jpg“그걸 지금 고민이랍시고 하고 있어?”

어찌나 야무지게 얻어맞았는지 눈물이 다 찔끔 났다. 하필 등이라 문지를 수도 없어서, 시현은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벽과 등을 마주대고 부비부비를 했다.

16551950436326.jpg“나니까 들어줬다. 어디 나가서 그런 고민 얘기 절대 하지 마. 괜히 욕먹어.”

16551950436331.jpg“왜?”

16551950436326.jpg“나가서 아무 여자나 붙잡고 얘기해 봐. 부자에다 일곱 살 어린 연하남이 나 좋다고 목매달고 쫓아다녀서 고민이다, 키스했는데 막 두근거려서 고민이다, 해보라고!”

시현은 눈을 깜빡였다. 객관적으로 들으니 정말 미주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라도 누가 그걸 고민이랍시고 털어놓으면 ‘차라리 그냥 대놓고 자랑을 해라’ 하고 말할 것 같다. 물론 이쪽은 그리 간단한 사정이 아니지만.

16551950436331.jpg“말했잖아, 걔는 내가 키운 거나 마찬가지…….”

16551950436326.jpg“아니 키웠지 낳았냐고? 낳은 거 아닌데 뭐가 문제냐고!”

주은과 수연에 이어 세 번째로 똑같은 말을 들은 시현은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16551950436326.jpg“그래, 시현 씨가 그 동생 어렸을 때부터 본 건 알겠어. 근데 지금 어린애 아니면 된 거 아냐? 지금 남자로 보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미주는 시현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다시피 했다.

16551950436326.jpg“대체 누가 손가락질을 하고, 누가 흉을 본다는 거야? 요즘 세상에 그까짓 일곱 살 차이가 뭐라고, 촌스러워 죽겠네, 정말!”

16551950436331.jpg“그런가?”

16551950436326.jpg“그리고 어? 혹시 남들이 뒤에서 말 좀 하면 어때? 욕이 배 뚫고 들어와? 어차피 뒷말 들을 거, 저 여자 청첩장까지 돌려놓고 파혼했다는 소리 듣느니 능력 있는 연하남이랑 연애한다는 소리 듣는 게 백번 낫지 않아?”

미주는 참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방금까지 머리 터지게 고민했던 것이, 점점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참 설교를 한 끝에 미주는 알아서 결론까지 내려주었다.

16551950436326.jpg“잔말 말고 그냥 그 동생이 시현 씨 좋다고 할 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고 덥석 물어. 그러다 괜히 놓치기라도 하면 평생 땅 친다.”

16551950436331.jpg“고마워, 미주 씨. 새겨들을게.”

시현은 진심으로 말했다. 고민상담을 하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마치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551950436326.jpg“고마우면 나도 좀 소개시켜 달라니까 글쎄. 주식이나 코인 좀 물어보게.”

미주가 흘겨보았다. 그 ‘코인 동생’이 바로 태하라는 걸 알면 미주는 어떤 표정을 할까.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현기증이 일어서, 시현은 애써 생각을 떨쳐 버렸다.

16551950436331.jpg“나중에. 기회 되면 꼭 소개시켜 줄게.”

지금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 새벽에 미주는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혼자 사는 집이라 좁은 침대에서 둘이 잤더니 아무래도 잠이 깊이 들 수가 없었다. 슬쩍 바라보니 시현은 세상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시현을 바라보며 미주는 슬며시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16551950436326.jpg‘역시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야.’

이보라 그 계집애가 도끼눈을 뜨고 지껄이던 것을 떠올리면 당사자도 아닌 제가 다 분통이 터졌다.

16551950476629.jpg[뺏긴 년이 멍청한 거지. 그러게 누가 자기 남자 간수 하나 똑바로 못 하래?]

그런데 정작 시현은 그 연놈들 따위는 벌써 안중에도 없고, 부자에 연하남과 한창 썸을 타고 있다니 세상에 이런 경사가 없었다. 이거야말로 똥차 가고 벤츠 온 사례의 교과서 아닌가.

16551950436326.jpg‘내가 응원한다, 시현 씨.’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미주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가물가물 도로 잠이 들려고 할 무렵, 갑자기 시현이 미주의 등을 손으로 힘껏 밀어냈다.

16551950436326.jpg“아 밀지 좀 마, 나도 좁아.”

잠결에 미주가 투덜거리는데, 시현이 역시나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1950436331.jpg“이러면 안 돼, 태하야…….”

미주는 잠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

16551950476648.jpg[그러게 같은 회사에서 잘 지내야지, 왜 상사랑 싸우고 그래?]

미주를 건드렸다가 윤태하 본부장에게 된통 혼이 난 성 과장은 돌아와서 보라에게 화풀이를 했다.

16551950476648.jpg[이미주 대리가 이유 없이 뭐라고 할 사람이 아닌데, 보라 씨가 뭘 잘못했겠지. 어쨌든 둘이 무슨 일이 있든 앞으로 나한테 일러바치고 그러지 마. 알았어?]

보라는 이래저래 분통이 터졌다. 날은 더워 죽겠는데 깁스한 채로 절뚝거리며 다녀야 하는 것도 그렇고, 명색이 미래은행 여신인데 이미주에게 찍힌 이후로 사람들 태도가 미묘하게 변한 것도 화가 났다. 그러니까 성 과장 같은 냄새 나는 아저씨 따위까지 날 우습게 보는 거 아닌가!

16551950476629.jpg‘이게 다 강시현 그년 때문이야.’

엉뚱하게도 보라는 화살을 시현에게 돌렸다. 그녀의 결혼을 망쳐놓은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애초에 강시현이 먼저 내 것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나도 김우진처럼 별 볼 일 없는 남자랑 엮이지 않아도 됐을 것 아닌가. 오히려 그런 인간이랑 결혼을 안 하게 만들어 줬으니 이쪽이 감사인사를 받아야 할 지경이다. 그뿐인가. 겉으론 우아하게 입 다물고 있는 척하면서 뒤에서 슬슬 소문을 내고 다니는 눈치였다. 이미주에게 말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할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사실상 시현은 미주에게 아무 말도 한 적이 없고, 미주 역시 혼자서 눈치를 챘을 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 외의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속담처럼, 켕기는 데가 있는 보라는 괜히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나 모르게 뒤에서 소문이 돌고 있는 거 아냐? 불청객이 찾아온 것은 보라가 점점 초조해지고 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16551950476648.jpg- 이보라 씨, 손님이 오셨는데요.

밑에서 연락을 받고 보라는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16551950476629.jpg‘설마 김우진이?’

김우진은 뻔뻔하게도 얼마 전부터 다시 연락해 오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메시지가 쏟아졌다.

16551950491599.jpg- 보라야, 잘 지내?

16551950491599.jpg- 우리 만나서 얘기 좀 하자. 잠깐이면 돼.

신혼집에서 바람을 피우다 강시현에게 현장을 딱 걸렸던 그날, 이 남자는 뭐라고 하면서 싹싹 빌었던가.

16551950491599.jpg[난 너밖에 없어, 시현아. 얘랑은 그냥 잠깐 호기심에 만난 거야. 믿어줘!]

16551950491599.jpg[야, 나도 너랑 결혼할 생각 없었거든?]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뻔뻔하게 연락이라니. 꿩 대신 닭이라는 건가, 생각하니 한층 더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럼 강시현이 꿩이고 내가 닭이란 말이야? 아무리 강시현에게 모욕을 주고 싶었다지만, 이렇게 볼품없는 남자와 뒹굴었던 걸 생각하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다. 그래서 보라는 아예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하고, 우진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

16551950476629.jpg‘혹시 연락 안 받으니까 회사까지 찾아온 거 아냐?’

순간적으로 겁을 먹은 보라는 전화에 대고 물었다.

16551950476629.jpg“손님이요? 누구신데요?”

담당 직원이 대답했다.

16551950476648.jpg- 나이 지긋하신 여성분인데, 친척분이라고 하시네요. 3층 미팅 룸으로 안내했으니 그쪽으로 가보시면 됩니다.

보라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긴 강시현하고 오래 만나서 회사에도 김우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사무실까지 날 찾아왔을 리가. 그나저나 친척이라니 누구지, 하고 생각하면서 보라는 미팅 룸으로 향했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보라를 보고 반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16551950509737.jpg“아가씨가 이보라 양?”

두꺼운 목에 걸린 샛노란 금목걸이, 요란한 꽃무늬의 프린트 블라우스. 먼 친척 중에라도 있을 것 같지 않은 타입이었다.

16551950476629.jpg“네, 그런데요.”

보라는 경계하듯 몇 걸음 떨어져서 물었다.

16551950476629.jpg“죄송하지만 누구시죠?”

상대가 반가운 얼굴로 다짜고짜 덥석 손을 잡아 왔다.

16551950509737.jpg“나 김우진이 엄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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