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공개 선언 (53/181)


#53. 공개 선언
202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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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반가운 얼굴로 다짜고짜 덥석 손을 잡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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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김우진이 엄마예요.”

보라는 제 귀를 의심했다. 김우진의 어머니가 왜 나를?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다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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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현 대리님 찾아오셨나 봐요. 금세 불러드릴 테니 잠시만 앉아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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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내가 걔를 왜 만나? 이제 와서 할 말이 뭐가 있다고.”

우진의 어머니, 정임이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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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우진이는 그 물건하곤 영영 끝났으니까, 아가씨는 전혀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러더니 정임은 새삼 눈을 가늘게 뜨고 흡족한 듯이 보라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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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우리 우진이가 예쁘다, 예쁘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얘기를 하더니 사실이었네. 젊은 아가씨가 어쩌면 이렇게 귀티가 줄줄 흐를까, 응?”

더할 수 없이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보라는 식은땀이 나는 것을 애써 꾹 참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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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저는 아드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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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 없어요. 내가 다 알고 왔으니까.”

솥뚜껑같이 두꺼운 손으로 보라의 손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며, 정임은 비밀을 속삭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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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우진이하고 깊은 사이라지요?”

보라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미친 작자가 자기 엄마한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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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잘못 아신 것 같네요. 강시현 대리님 약혼자 분하고 제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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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내 앞에선 그렇게 시치미 뗄 거 없다니까. 아니한 말로다가 유부남 건드린 것도 아니고,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이니 멀쩡한 총각인데 정분 좀 났기로서니 그게 무슨 흉이라고?”

정임이 보란 듯이 한쪽 눈을 끔뻑, 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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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렇게 촌스러운 여편네 아니야. 그 정도 센스는 다 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마음 푹 놓고 털어놔 봐요. 응?”

대체 뭘 털어놓으라는 건가. 보라는 어떻게든 잡힌 손을 빼려 했으나 정임의 손아귀는 무식할 정도로 힘이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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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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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요. 몸살이 난 것처럼 자꾸 으슬으슬 춥다든가, 속이 울렁거리다든가, 아니면 뭐 음식 냄새가 유난히 거슬린다든가. 그렇지 않아요?”

단서라도 찾듯 표정을 살피는 눈빛에, 그제야 보라는 정임의 의도를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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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임신했는지를 묻는 거야?’

김우진과 그의 신혼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가 강시현에게 딱 걸렸던 그날. 사실은 우진이 피임 실수를 하긴 했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제 어머니에게까지 했다니. 서른다섯 살씩이나 먹은 남자의 짓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생각하니 실수도 아니었던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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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번만 자자고 매달리더니, 날 임신시키려고 일부러 그랬던 거였어?’

수치심과 분노에 어쩔 줄 모르는 보라의 표정을 잘못 해석했는지, 정임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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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듣고 보니까 짚이는 게 있지? 응?”

오래 기다린 손자 소식을 들은 할머니처럼, 정임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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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우리 집안이 씨가 워낙 튼튼하거든. 원래 나도 아들 형제 낳아놓고는 아주 죽을 맛이어서 셋째는 죽어도 안 가지려고 한 것을, 바깥양반이 하도 알아서 잘하겠다고 사탕발림을 하기에 딱 한 번 넘어갔다가 그만 우진이가 떡하니…….”

혼자 멋대로 떠들어대던 정임이 순간 어머나, 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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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참, 주책을 떨었네. 미안해요, 호호호.”

보라는 진심으로 구역질이 났다.

조한신문 사주의 막내딸로 여태 곱게만 자라온 보라였다. 이따위 천박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반박조차 쉬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비틀거리는 보라를, 정임이 얼른 부축해서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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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이제 입덧 시작인가 보네. 잠깐 앉아 있다가 좀 나아지거든 나하고 같이 산부인과 가 봐요. 어디 애기집이 이쁘게 잘 잡혔나, 할머니가 직접 봐야지.”

보라는 팥죽색 립스틱을 두껍게 바른 정임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징그러울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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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갔다가 나랑 한의원도 좀 들르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잘 몰라 그러는데, 약 한 제 제대로 잘 해 먹으면 입덧이고 뭐고 고생 하나도 안 하고 지나갈 수 있거든.”

그러더니 정임은 갑자기 고개를 뒤로 빼고 실눈을 뜨고는 새삼스레 보라를 머리끝부터 찬찬히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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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쯧, 모유 수유는 그럭저럭하겠는데, 골반이 좁아서 나중에 낳을 때 고생깨나 하겠네. 자연분만하려면 지금부터 운동 많이 해야겠어요.”

마치 우시장의 암소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치욕에 떨던 보라의 입에서 한참 만에 겨우 나온 첫 마디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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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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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정임이 흠칫 놀라 보라를 바라보았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하듯 멀거니 쳐다보는 얼굴에 대고 보라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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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꺼지라고, 미친 아줌마야.”

정임이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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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예쁘다, 예쁘다 해줬더니 젊은 사람이 무슨 말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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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더 찾아와서 개소리 지껄여봐.”

당황해서 번들거리는 정임의 눈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보라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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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훼손죄로 감방에 집어처넣어 버릴 테니까!”

 

*

보라가 목발을 짚은 채 미팅 룸을 나가 버리고, 혼자 남은 정임은 기가 막혀 어쩔 줄 몰랐다.

세상에 저런 막돼먹은 계집애가 다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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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부처님, 아이고 예수님. 말세다, 말세야. 아니 세상에, 제 어미 뻘 되는 사람한테 어떻게 저런 막말을, 응? 천벌을 받으려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참 이 신 저 신 찾아가며 혼자 푸념하던 정임은, 결국 터덜터덜 미팅 룸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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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임신이 아니란 말이야?’

김칫국 마신 꼴이 됐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아무리 집안이 좋고 미모가 뛰어나도, 어른한테 대놓고 욕설을 하는 며느리를 얻을 뻔한 생각을 하니 끔찍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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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휴, 여자 복도 지지리 없는 녀석!”

정임은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먹으로 제 가슴을 쾅쾅 쳤다.

구관이 명관이라더니, 저 독한 계집애보다는 차라리 전 며느릿감이었던 시현이 훨씬 낫게 느껴졌다. 나이도 많고 애교가 없는 건 맘에 안 들지만, 그래도 어머님, 어머님 하면서 공손한 맛은 있었는데.

걔를 놔두고 저런 독한 계집애랑 바람을 피우다니, 하고 속으로 아들을 탓하다 정임은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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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바람은 고것이 먼저 피운 거라고 했잖아?’

이번에는 시현에게 분통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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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깟 것이 감히 금쪽같은 내 아들을 두고 다른 놈이랑 바람을 피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아들이, 하루아침에 파혼을 하고는 도저히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다며 일주일이나 회사를 쉬었다.

요즘도 아침에 어깨가 축 늘어진 채로 출근하는 걸 보면 정임은 억장이 다 무너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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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저도 결국 다 그 물건 때문 아냐?’

방금 보라에게 봉변을 당한 분노까지도 모두 시현을 향해 폭발했다.

씨근덕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정임을, 지나다니던 미래은행 직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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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무슨 일로 오셨나요?”

사람들이 물었지만 정임은 들은 체도 않고 사무실 여기저기를 거침없이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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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망할 물건이 어디로 숨은 거야?”

내 아들 앞날을 망쳐 놨으니 응당 저도 톡톡히 망신을 당해야 옳지 않겠는가.

아주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 줄 테다. 그렇게 다짐하며, 정임은 시현을 찾아 헤맸다.

*

시현은 미주의 집에서 자고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했다.

친절한 미주 씨는 아침을 직접 차려준 것도 모자라서, 어제랑 똑같은 옷 입고 출근하면 자칫 오해받는다며 자기 옷까지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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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놓고 안 어울려서 한 번도 안 입고 나갔던 건데, 시현 씨한텐 딱이네. 마음에 들면 시현 씨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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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긴 한데,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줘?”

미주는 보살 같은 미소를 만면에 띠고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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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투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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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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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그 코인 동생하고 잘되면 나 잊지 말라고.”

아, 그거였나.

태하를 볼 생각을 하니 또 심장이 수상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시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출근길에 올랐다.

오늘은 태하를 보면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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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하고 키스한 거, 싫지 않았어.’

말을 할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숨이 다 가빠져 왔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고 시현은 결심했다.

문제는 출근길에 미주의 고물차가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서비스를 부르느라 나란히 삼십 분이나 지각을 했다.

출근해서 태하를 볼 생각을 하니 또 심장이 수상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시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출근길에 올랐다.

오늘 태하를 보면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야겠다. 어제 미주가 해준 얘기 덕분에 새롭게 용기가 솟아났다.

미주의 고물차가 오는 길에 말썽을 좀 부려서, 지각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회사에 도착했다.

모닝커피를 가지러 휴게실로 향하는데, 웬일인지 여사원들이 복도에 떼로 모여서 뭔가 진지한 어조로 논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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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옛날부터 남자는 갈색 머리가 좋더라. 만화를 봐도 꼭 갈색 머리 캐릭터에 꽂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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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병 걸렸어? 남주는 역시 흑발이지, 암.”

무슨 소린가, 하고 듣고 있는데 문득 나이 많은 여자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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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여기 있었구나?”

뒤를 돌아봤다가 시현은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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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잠깐 나 좀 보자.”

우진의 어머니, 정임이 서 있었다.

시현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시간이 멈춰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진의 어머니가 대체 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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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어붙어 있는 시현의 얼굴을, 정임이 천하에 얄밉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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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신수가 훤해 보이는구나. 넌 밥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다니나 보다?”

저도 모르게 어머님, 하고 부를 뻔했다가 시현은 겨우 입을 다물었다. 이젠 그렇게 부를 이유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들에게 정임이 누구인지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데리고 나가는 게 급선무라고 시현은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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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서 얘기하세요.”

시현이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지만 정임은 매섭게 손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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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뭐 켕기는 거라도 있니?”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각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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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들 하고 섰어? 들어가서 일들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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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닌데.”

금세 복도에는 시현과 정임, 두 사람만 남았다.

그러나 자리를 피하는 척만 했을 뿐 각자 휴게실에, 혹은 모퉁이에 숨어서 다 듣고 있을 거라는 걸 시현은 뻔히 알고 있었다.

정임은 복도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선 채 전투적인 표정으로 시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테니 어디 끌어낼 테면 해 봐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것만은 확실히 느껴져서, 시현은 어떻게든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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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로 오셨어요? 오빠하고는 거의 다 정리됐는데요.”

결혼식에 따르는 모든 계약과 준비가 이미 다 파기된 후였다. 이제 전세금만 돌려받으면 우진과의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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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라니, 넌 참 쉽구나? 우리 우진이는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살이 쑥 내렸는데.”

자업자득이죠. 그렇게 말하려다 시현은 꿀꺽 삼켜 버렸다. 회사에서는 미주를 제외한 그 누구도 파혼의 이유를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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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바빠서요. 용건만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려 애쓰는 시현을 향해, 정임이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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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새파랗게 어린놈하고 뒹구니까 좋든?”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현이 가증스럽다는 듯, 정임은 흰자위 가득한 눈으로 시현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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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고아 신세나 다름없는 걸, 그저 우리 우진이가 좋다니까 눈 딱 감고 받아주려고 했더니. 주제도 모르고 바람을 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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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그러던가요? 제가 바람을 피웠다고요?”

이 비겁한 작자가 나한테 뒤집어씌운 건가. 너무 기가 막혀서 목소리가 다 벌벌 떨렸다.

회사 동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시현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애를 썼다. 망신은 피할 수 없게 됐다 해도 파혼의 책임까지 뒤집어쓸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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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다시 물어보세요. 오빠가 무슨 짓을 하다가 저한테 들켰는지 말이에요.”

그러나 정임은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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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쌍방과실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네가 먼저 저지른 짓인데, 어떻게 우리 우진이한테만 홀라당 뒤집어씌우려고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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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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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이 네 옆집에 이사까지 와서 살고 있다던데, 그래도 계속 오리발 내밀 거야?”

시현은 손아귀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꼈다. 제 망신이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치지만, 태하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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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이 아니에요!”

상대를 밝힐 수 없으니 제대로 해명할 길도 없었다. 결국 입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오로지 궁색한 변명 같은 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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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런 사이가 아닌데 아침밥까지 해다 바쳐? 우진이가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데, 대질신문이라도 시켜 주랴? 응?”

당장 아들을 부를 것처럼, 정임은 휴대폰을 꺼내 드는 시늉까지 했다.

벌써부터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귓가에 선하게 들려오는 것 같아서, 시현은 현기증이 다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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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앱팀 강시현 씨 파혼한 거 말이야. 강시현 씨가 바람피운 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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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랗게 어린 남자가 있었대!’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하면 믿어주기는 할까?

시현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을 때, 문득 정임과의 사이에 커다란 벽이 생겼다. 누군가가 사이에 끼어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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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현 씨는 저한테 아무 감정도 없습니다.”

정임에게서 시현을 가리듯 제 몸으로 가로막은 채, 태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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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혼자서 좋아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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