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고백 대신,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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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고백 대신,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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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고백 대신, 키스
2022.04.05.
“강시현 씨는 저한테 아무 감정도 없습니다.”
정임에게서 시현을 가리듯 제 몸으로 가로막은 채, 태하는 말했다.
“저 혼자서 좋아한 겁니다.”
시현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태하는 계속해서 말했다. 시현의 눈에 보이는 것은 뒷모습뿐이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처음부터 제 짝사랑이었고, 계속 제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녔습니다. 강시현 씨는 파혼하기 전에도, 물론 지금도 저한테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보고 정임은 움찔했다.
시현에게 남자가 있다는 얘기를 아들에게 듣고 정임이 상상했던 것은, 여자 등쳐먹는 비리비리한 백수 정도의 이미지였다.
그러니까 새파랗게 젊은 놈을 샛서방으로 따로 두고서 결혼은 능력 있는 우리 아들이랑 하려고 했겠지.
그런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잘 차려입은 슈트하며, 자신 있는 태도와 목소리하며, 누가 봐도 엘리트처럼 보였다.
심지어 얼굴은 깎아놓은 것 같이 생겼고, 체격은 당당하고, 키는 제 아들보다 10센티미터 이상 큰 것 같았다.
“뭐야. 그럼 그쪽이 저, 거시기, 그……?”
“윤태하입니다. 이 회사에서 디지털전략본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는 정임은 그게 뭔지 잘 몰랐지만 어쨌든 대리나 과장 같은 것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제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철석같이 믿는 정임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애초에 우리 우진이하곤 게임조차 안 되는 상대다.
기가 죽어버린 것을 감추려고, 정임은 어떻게든 뻗댔다.
“아니,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니지. 결혼할 사람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남의 여자한테 그랬단 말이야?”
그러나 태하는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제가 먼저 좋아했습니다.”
“뭐요?”
“아드님이 강시현 씨와 만나기 훨씬 전부터 제가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정임에게 시현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게 하겠다는 듯, 태하는 시현의 앞을 단단히 막아서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강시현 씨 빼앗고 싶었던 거, 인정합니다. 그래서 옆집에 이사도 간 겁니다. 결국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만.”
“…….”
“강시현 씨는 진심으로 아드님을 사랑했고, 바람을 피운 걸 알고도 한 번은 용서하면서까지 결혼을 지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도 또다시 배신한 건 아드님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 지적당해서, 정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파혼에 강시현 씨의 책임은 없습니다. 이 부분은 아드님께 다시 한번 확인해보시고, 그래도 계속 허위 주장을 계속한다면 저도 명예훼손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담담하고도 냉랭하게 경고를 날리고, 태하는 조금 떨어져 있던 비서를 향해 말했다.
“모시고 내려가요. 안 가시겠다고 버티면 보안팀 부르고.”
*
패악을 부리던 아주머니는 본부장 비서에게 끌려 나가고, 본부장은 자기 사무실로 가 버리고, 강시현 대리는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등장인물들이 모두 퇴장하고 나서도 곳곳에 숨어 있던 목격자들은 너무 놀라 한참 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놀라지 않은 것은 오로지 미주 하나뿐이었다.
“들으셨잖아요. 바람피운 건 시현 씨 약혼자 쪽이고, 시현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녀는 제 일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본부장님이 시현 씨한테 목매달고 쫓아다니는 중이고요!”
사실 시현의 파혼 이후로 미주는 은근히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강시현 대리 요즘은 좀 어때?]
[결혼한다고 그렇게 신이 나 있었는데, 내가 다 속상하다.]
친하다는 이유로 미주에게 와서 그렇게들 묻는데, 본인들은 걱정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듣는 미주는 짜증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 남의 일에 오지랖들이 넓어?
시현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여자 취급받는데, 그 결혼 깨뜨린 상대가 제일 친한 후배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확 대신 까발려 주지도 못하고, 미주는 남몰래 가슴만 치고 있었다.
그래서 간밤에 그 코인 동생의 정체가 다름 아닌 윤태하 본부장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하루빨리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청첩장도 빨리 돌려주면 더 속이 시원하겠다.
강시현 대리 불쌍해서 어떡해, 하면서 은근히 남의 불행을 즐기는 사람들 코가 단체로 납작해지게.
무엇보다 이보라 그 망할 계집애가 배 아파서 뒤집어지게!
그런데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알려지게 됐으니 이 이상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요 망할 것이 안 보이네?’
미주는 주위를 둘러보며 보라를 찾았다. 아까까지 분명히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
제 사무실로 돌아온 태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은 도저히 나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시현이 얼마나 힘들게 우진을 용서했었는지, 그러고도 또다시 배신을 당해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태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있잖아, 나 생각보다 되게 괜찮아.]
시현은 열이 올라 파리해진 입술로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태하가 모를 리 없었다.
신혼집 침대에서 제 약혼자와 뒹구는 친한 후배를 목격했을 때 그녀의 기분이 어땠을까. 그 사진을 찍어서 제 휴대폰으로 전송하면서, 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차라리 울었으면 싶어서 가슴이 찢어질 것같이 아팠었다.
그런데 그 일을 시현의 탓으로 뒤집어씌우려 하다니. 심지어 회사까지 찾아와서,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그래, 새파랗게 어린놈하고 뒹구니까 좋든?]
그대로 놔두면 시현이 누명을 쓸 게 뻔했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듣고도 시현은 제대로 반박도 못 했다.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만은 지켜 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태하는 시현의 등 뒤에 숨을 생각이 없었다.
[강시현 씨는 저한테 아무 감정도 없습니다.]
억울하게 파혼의 책임을 뒤집어쓰느니, 차라리 사실대로 알려지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하고 끼어들었던 건데…….
저질러 놓고 나니 뒤늦게 절망감이 밀려왔다.
‘이젠 다 끝났구나.’
허락 없이 키스했다고 화가 나서 얼굴도 안 보려고 하는 여자가, 이제는 정말 거들떠도 안 볼 것 아닌가. 우리 사이를 알면 남들이 대체 뭐라고 하겠냐고, 그토록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이제 겨우 돌아봐 줄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다 망쳐 버렸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해.’
답답한 마음에 태하가 입술을 깨물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 본부장님, 강시현 씨 왔습니다.
비서의 목소리에 태하는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
“하아, 하아…….”
옥상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온 시현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태하가 비서에게 정임을 데리고 나가라고 지시하는 것까지 보고 나서,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무작정 도망치듯 뛴 것이 그만 옥상까지 올라와 버렸다.
다행히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벤치에 앉아서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놀란 가슴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었다.
모두 다 알려져 버렸다. 파혼의 이유도, 태하와의 사이도!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늘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이미 온 회사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거라는 데, 시현은 내기라도 걸 수 있었다.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이야기할까. 당장 조금 이따가 사무실에서 어떤 얼굴로 팀원들을 봐야 할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현은 그런 골치 아픈 것들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의 신경이 온통 쏠려 있는 것은 엉뚱한 부분이었다.
방금 보았던 태하의 머리 색깔.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검은 머리였던 것이, 하루아침에 갈색이 되어 있었다.
아까 여사원들끼리 모여서 검은 머리냐, 갈색 머리냐, 한창 입방아를 찧고 있었던 게 무슨 소린지 이제야 알겠다.
어릴 때 외국인이라고 놀림 받은 기억 때문에 태하는 그렇게 보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도 염색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다. 타고난 검은 머리마저 물들여 버리면 진짜로 외국인 같아 보일 수 있으니까.
‘대체 왜 그랬지?’
시현은 입술을 깨문 채로 생각했다.
시어머니가 될 뻔했던 사람이 회사까지 찾아와서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패악을 부렸는데.
일곱 살 어린 상사와의 스캔들이 회사에 쫙 퍼지게 됐는데.
지금 이 순간, 오로지 머릿속에는 온통 윤태하, 윤태하, 윤태하뿐이었다.
한참 앉아 있다가 시현은 몸을 일으켰다.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다.
태하의 사무실로 내려가자 비서가 시현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본부장님 안에 계시나요?”
“아, 예. 계십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비서님도 옆에 계셨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도 안중에 없었다.
시현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태하가 튕기듯 일어나서 다가왔다.
“왔어?”
방금 전까지 사람들 앞에서 더없이 당당하게 말하던 남자는,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시현의 눈치를 보았다.
정면에서 얼굴을 보니까 달라진 머리가 더욱더 눈에 띄었다. 단지 머리 색깔 하나 바뀐 것뿐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하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레온처럼 보였다. 원래도 닮은 얼굴인데, 머리 색까지 같아지자 정말로 비슷해 보였다.
“갑자기 염색은 왜 한 거야?”
대답 대신에 태하는 되물었다.
“마음에 들어?”
“응?”
“당신은 이쪽을 더 좋아할 것 같아서 바꿔 봤는데.”
시현은 얼굴을 굳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대체 왜 내가 갈색 머리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현이 정색을 하고 묻자 태하는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니까?”
다그쳐 묻자 그제야 태하는 머뭇거리며 털어놓았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좋아했었잖아. 이렇게 하면 혹시 아버지하고 닮아 보일까 싶어서…….”
현기증이 일어서 시현은 눈을 감았다. 여태 그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가.
다시 눈을 뜨자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쳤다. 반쯤은 매달리듯, 반쯤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는 눈빛을 보고 시현은 깨달았다.
[저 혼자서 좋아한 겁니다.]
[강시현 씨는 파혼하기 전에도, 물론 지금도 저한테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이, 단순히 자신을 변호해 주려던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태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나는 그에게 아무 감정도 없다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해서라도 제 눈에 들고 싶어서 머리를 물들이며, 태하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에는 것처럼 아파와서 시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
아무 말도 없는 시현이 불안했는지, 태하는 필사적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려 노력하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신 안 그럴게. 앞으론 당신이 싫어하는 짓, 절대로 하지 않을게. 회사에 소문난 건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볼 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나 태하는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말하는 중간에 입술이 막혀 버렸기 때문에.
“……!”
시현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은 순간.
건전지가 다 된 인형처럼, 태하는 그대로 멈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