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 자꾸자꾸, 더 많이 (56/181)


#56. 자꾸자꾸, 더 많이
202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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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밖으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고백했을 때는 현관 앞이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태하와 나란히 무작정 길을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아마 태하도 모를 게 틀림없었다.

저녁을 걸렀지만 배고픈 것도 몰랐다. 오직 보이는 것은 옆에 있는 남자뿐이었다.

시현의 손을 잡은 채 묵묵히 걷던 태하가, 한참만에야 불쑥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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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내가 끼어들어서 화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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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화가 나? 나 감싸주려고 그런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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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했었잖아. 다른 사람들이 우리 사이 아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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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고 하지 뭐.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시현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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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서주지 않았으면 내가 혼자 다 뒤집어쓰고 말았을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쪽으로든 입방아에 오르는 건 싫다. 하지만 자신이 바람을 피워서 파혼한 거라는 누명을 쓰는 것보다야 윤태하의 짝사랑 상대라고 알려지는 게 훨씬 나았다.

미주가 그렇게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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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뒷말 들을 거, 저 여자 청첩장까지 돌려놓고 파혼했다는 소리 듣느니 능력 있는 연하남이랑 연애한다는 소리 듣는 게 백번 낫지 않아?]

백번 옳은 말이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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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야말로 괜찮아? 지금쯤 디지털전략본부장이 짝사랑이나 하는 불쌍한 처지라고 회사에 소문 쫙 났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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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인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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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사실이야? 나도 너 좋아한다니까.”

태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조각같이 생긴 데다 늘 차분하고 냉정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원래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던 얼굴이, 느슨한 표정을 하자 그제야 제 나이처럼 보여서 시현은 새삼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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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내 입으로 말해놓고도 양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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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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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야. 넌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데.”

태하는 조금 심술궂은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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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당신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데도 좋아했으면서, 그까짓 일곱 살 차이가 뭐라고.”

또 그 얘긴가. 이제야말로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아서, 시현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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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희 아버지 좋아한 적 없어.”

이제는 여유가 좀 생긴 건지, 태하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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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그렇게 심각한 감정은 아니었다는 거. 그냥 설렜던 거겠지. 내가 봐도 멋있는 남자니까, 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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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런 거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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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버지 한국 오실 때마다 나 빼고 둘이서 자주 만났던 건 뭔데?”

시현은 결심했다. 레온과 약속한 게 있어서 여태 입 다물고 있었는데, 이 지경까지 오니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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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때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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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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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한국말로 얘기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과외 해드렸던 거야.”

태하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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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저씨는 너에 대해서 뭐든지 알고 싶어 하셨어. 네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뭘 못 먹는지. 무슨 운동을 잘하는지, 무슨 게임을 좋아하는지. 무슨 과목을 잘하는지, 앞으로 뭐가 되고 싶어 하는지. 내가 말하는 거, 종이에 일일이 적어 가면서 들으셨어.”

그러면서도 레온은 부탁했다. 친하지도 않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을 갖는 걸 태하가 알면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까 비밀로 해달라고.

그래서 여태 시현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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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씬 진심으로 네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셨고, 난 그걸 도와드리고 싶었어. 좋아해서 만났던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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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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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하야.”

시현은 조금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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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구도 될 필요 없어. 난 있는 그대로의 널 좋아하니까.”

잠시 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하가 불쑥 제 팔을 내밀었다. 어쩌라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 시현에게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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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꼬집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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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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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꿈인지 뭔지 모르겠어서.”

내가 널 어떻게 꼬집겠니, 쳐다보기도 아까운데. 시현은 내민 팔뚝을 꼬집어주는 대신에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눈을 감고 커다란 강아지처럼 순순히 머리를 맡기고 있던 남자가, 잠시 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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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일,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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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얼굴 보면 살짝 설렜던 건 사실이긴 해. 레온 아저씨, 워낙 멋있잖아.”

또 잘못 해석할까 봐 말하자마자 시현은 얼른 태하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오해하지 않은 듯, 태하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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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버지야. 널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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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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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따로 선생 붙여서까지 공부하신다고 했었거든. 마지막으로 아저씨 봤던 게 너 고 3 때인데, 그땐 벌써 한국어로 일상회화 정돈 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어떠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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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훨씬 잘하셔. 눈 감고 들으면 얼핏 한국사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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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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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해보면 놀랄걸. 곧 한국 오신다니까 그때 같이 만나.”

반가운 마음에 이어 부끄러움이 확 밀려와서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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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저씨 얼굴 차마 못 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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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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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왔다 가실 때마다 나한테 우리 태하 잘 부탁한다고 늘 말씀하셨단 말이야. 근데 너랑 사귀는 거 아시면…….”

생각만 해도 얼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레온은 자신을 태하의 보호자로서 믿고 있었는데, 남녀 사이가 된 것을 알면 뭐라고 할까.

그러나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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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이미 옛날부터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알고 계셨대. 그래서 내가 어른이 되면 우리 둘이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셨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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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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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짝이 당신이라고 하셨어.”

시현은 기뻤다. 레온이 그렇게 생각한다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남들이 뭐라면 어떤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아버지가 찬성이라는데.

나란히 손을 잡고 걷는 사이에 밤이 깊었다. 집 앞까지 다 와서, 엘리베이터 버튼까지 눌러 주고 나서 태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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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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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시간에 어디 갈 데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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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좀 더 걷다가 들어갈까 해서.”

얼버무리는 품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여태 같이 걸어 놓고 뭘 더 걷겠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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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는데? 응?”

캐물어도 그는 왠지 고개만 저을 뿐,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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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그럼 나도 너랑 같이 걸을래. 아침까지라도 괜찮으니까, 어디 너 걷고 싶을 때까지 실컷 걸어 보자.”

시현이 고집을 부리자 그제야 태하는 실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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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싶지 않아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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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잠이 안 올 것 같아? 억지로라도 좀 자야 내일 출근을 하지.”

너무 들떠서 잠이 안 올 것 같은 심정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태하도 그런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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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다 꿈일까 봐.”

시현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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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꿈일까 봐 무서워. 눈뜨면 다 없었던 일일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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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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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에 당신이 내 얼굴을 보면 꼭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아. ‘왜 그렇게 쳐다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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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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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밤은 잠들고 싶지 않아.”

시현은 어쩔 줄을 몰랐다. 사랑스러운 한편으로 심장이 쿡쿡 찌르듯 아팠다. 안아줘야 할까. 입을 맞춰줘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해야 네 불안이 좀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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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자.”

시현은 그의 손목을 붙잡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대로 올라가서, 태하의 집 문을 열고 그를 끌고 들어가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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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눈 감고 자.”

불을 끄러 가는 시현을, 태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순간도 놓치기 싫다는 듯이, 마치 제 눈 속에 시현의 모습을 담아 두려는 듯이.

불을 끄자 어둠 속에서 태하가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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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게. 바보 같은 소리 해서 미안해.”

시현은 문을 열고 나가는 대신에 태하의 침대로 돌아갔다. 곁에 눕자 태하가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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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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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아무 데도 안 가고 네 옆에 딱 붙어 있을 테니까, 마음 푹 놓고 자.”

하나밖에 없는 베개 대신에 태하의 팔을 끌어다가 베면서, 시현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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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잠만 자는 거야. 엉뚱한 짓 하면 혼난다.”

잠시 후, 등 뒤에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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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

 

*

다음 날 아침, 먼저 눈을 뜬 것은 시현이었다. 여태 태하의 팔을 베고 있는 채였다. 살짝 몸을 돌려 옆을 보자 태하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원래 태하는 아침마다 시현보다 훨씬 먼저 일어났다. 출근 준비를 하고, 아침식사까지 만들어 놓고 그녀를 깨우러 오곤 했다.

그런 태하가 오늘따라 이렇게 늦잠을 자는 이유를 시현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젯밤에 제대로 못 잤으니까.

태하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돌아누워 있는 그녀의 어깨와 머리칼을 수도 없이 쓰다듬고, 소리 없이 입을 맞추고, 등 뒤에서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마치 그녀가 곁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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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사실 시현도 잠들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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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짓 하면 혼난다.]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사실 자꾸만 엉뚱한 생각이 드는 건 이쪽이었다.

안고 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손을 잡고 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곁에 누워서 잠만 잔 것뿐이지만 그 상대가 좋아하는 남자가 되고 보니 잠이 제대로 올 리가 없었다.

하필이면 침대도 싱글침대여서, 아무리 조심해도 몸이 자꾸만 닿았다. 팔도 가슴도 다리도, 맞닿는 부위마다 거짓말처럼 단단하고 강건했다. 지금 자신의 곁에 누워 있는 게 ‘남자’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닿아 오는 입술은 어쩌자고 그렇게 부드럽고 따스한지.

태하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제 머리칼과 어깨에 입 맞출 때마다, 시현은 몸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러다 갑자기 꽉 껴안아 오면 어떡하지.

키스해 오면 어떡하지.

한편으로는 그래 줬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고 있는 자신이 무섭기도 했다.

이제 겨우 서로 마주봤을 뿐인데, 마음은 스스로 생각해도 무서울 정도로 온전히 다 가 있었다. 마치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지난날들이 다 거짓말인 것처럼.

조심스러운 어루만짐을 수없이 되풀이하다 태하는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러니 피곤해서 늦잠을 잘 수밖에.

모처럼 잘 자는데 깨우고 싶지 않아서, 시현은 잠든 태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넥타이만 겨우 풀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남자는 사람 같지도 않게 아름다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것만이, 조각이나 그림 따위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밤새 조금 짙어진 수염 자국 때문에 한층 더 남자답게 보이는 얼굴을 넋을 잃고 들여다보다, 시현은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기를 재우듯 그의 가슴께를 가볍게 토닥토닥,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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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자, 나는 이만 일어나서 출근 준비할게.’

그런 뜻이었는데.

태하가 어릴 적에 해 주던 버릇대로 한 짓에, 바위처럼 딱딱한 감촉이 돌아오는 바람에 시현은 흠칫 놀라 손을 거뒀다.

상대가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엿한 남자라는 게 한순간에 확 실감이 났다.

그러고 보니 밤새 태하의 몸이 자꾸만 닿아 와서 잠을 설쳤던 게 떠올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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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넓고 두터운 가슴이 숨 쉴 때마다 고른 박자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시현은 숨죽여 바라보았다.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

결국은 유혹에 견디지 못하고 살짝 가슴께를 검지로 눌러 보았다.

단순히 딱딱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얇은 천 아래에서 탄력 있게 튀어 오르는 근육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져 와서 숨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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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얘. 사람 몸이 뭐 이래?’

예전에 딱 한 번 보았던 멋진 가슴이 기억났다. 보기에도 무척 아름다웠는데, 감촉은 그 이상이었다.

손끝으로 살짝 찔러 본 것뿐인데 새로운 세상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현은 유혹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손가락을 가져갔다. 방금 그 황홀한 감촉을 딱 한 번만 더 느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가슴께에 손가락이 닿기 직전. 시현은 왠지 얼굴이 따가운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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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잠에서 깬 걸까. 태하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시현은 현실로 돌아왔다. 동시에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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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

시현은 뜨거운 숯덩이라도 만진 사람처럼 황급히 태하의 가슴에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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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내가 그만, 어쩌다 실수로…….”

정신없이 변명을 했지만 제 귀에도 구차하게 들렸다.

이건 도망치는 수밖에 답이 없다. 얼른 몸을 일으켜 도망가려는데, 그만 손목을 꽉 붙잡혔다.

그대로 시현은 태하의 품으로 빨려 들어가듯 안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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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실수해줘.”

뒤에서 시현을 단단히 껴안고, 태하가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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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자꾸, 더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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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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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실수해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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