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마음 놓고 실수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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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마음 놓고 실수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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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마음 놓고 실수해봐
2022.04.15.
“또 실수해줘.”
뒤에서 시현을 단단히 껴안고, 태하가 귓가에 속삭였다.
“자꾸자꾸, 더 많이.”
“…….”
“나한테 실수해줬으면 좋겠어.”
기쁜 듯한 목소리에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너무 떨린 나머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시현은 더럭 무서워졌다.
“저기, 그럼 나 이만, 출근 준비해야 돼서!”
시현은 새빨개져서 황급히 도망을 나오고 말았다.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로.
*
시현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먼저 출근길에 올랐다. 아까 일 때문에 태하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였다.
- 나 먼저 출근할게. 천천히 와.
태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시현은 단단히 결심을 하고 출근했다. 어제는 어떻게 잘 넘어갔다고 하지만, 오늘은 분명히 질문이 쏟아질 테니까.
누가 묻거든 사실대로 말해줄 생각이었다. 본부장님 혼자 짝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우리 서로 좋아한다고.
그렇게 되면 파혼의 이유에 대해서 역시나 시현의 책임이 아니냐는 식으로 뒷얘기가 돌겠지만, 이제는 그것도 별로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누구 탓이라고 하면 어떤가. 중요한 건 태하와 내가 서로 좋아한다는 것뿐인데.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은 원래 소속이었던 개발팀 정 과장이었다. 시현은 활기차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어, 강시현 씨.”
상대의 입에서 강시현이라는 세 글자가 나온 순간, 갑자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이쪽을 돌아보는 바람에 시현은 당황했다.
누군가는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또 누군가는 확인하듯 시현이 걸고 있는 사원증을 들여다보았다.
심지어 엘리베이터에 뒤늦게 탄 사람은 맨 앞에 있던 시현의 사원증에 쓰인 이름을 보고 헉, 하는 소리까지 내고는 자기가 더 놀라서 얼른 입을 가렸다.
채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시현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이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유명인이 되었다는 것을.
그나마 모르는 사람들은 수군거리거나 쳐다보는 게 전부였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걸로 넘어가 주지 않았다. 시현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팀원들이 일제히 달려와서 둘러쌌다.
시현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다 사실대로 말해 버리고 편해져야지.
“저기, 어제 일은…….”
그러나 동료들은 뭐라고 채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시현을 마구 몰아붙였다. 특히 여자 동료들은 아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아니 시현 씨는 대체 본부장님 왜 싫다는 거야?”
“그러게. 본부장님이 대체 어디가 부족해서?”
시현이 심호흡을 하고 저도 본부장님 좋아해요, 하고 말하려는 순간.
“우리 강시현이가 그렇게 양심이 없는 줄 알아?”
별안간 팀장이 끼어들어 말했다.
“한참 어린 사람이 철없이 들이댄다고 연장자가 돼서 양심도 없이 옳다구나, 하고 덥석 물면 쓰나? 나는 우리 강시현이가 아주 처신을 잘하고 있다고 봐. 암, 당연히 그래야지!”
마침 양심 없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던 시현은 그만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팀장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거들었다.
“그러게, 너무 다그치지 마. 시현 씨 파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사람을 좋아하겠어?”
“당연히 마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쯤 되자 차마 말이 안 나왔다. 등골에 식은땀이 나는데 하필이면 그때 태하가 들어왔다.
얼굴을 보자마자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방금 한 얘기, 다 들은 걸까?
“그럼 회의들 시작하지요.”
태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시현에게는 물어도, 감히 그에게 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회의는 더없이 진지한 분위기에서 흘러갔다.
“강시현 대리님.”
회의를 마치고 모두들 자료를 정리해서 일어나려 할 때쯤, 태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시현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예, 본부장님!”
“이따가 리서치 계획안 가지고 내 사무실로 오세요.”
일어나면 다 꿈일 것 같아서 무섭다더니.
오히려 이쪽이 ‘꿈이었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지없이 사무적인 말투였다.
*
우진은 집주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드디어 신혼집에 다른 세입자가 들어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전세를 들어와야 해서 여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연락을 받고도 정작 우진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현과의 사이는 모두 정리되었다. 아직까지 얽혀 있는 건 오로지 이 전세로 얻은 신혼집뿐.
즉 이 전세금을 받아서 시현에게 반을 돌려주고 나면, 정말로 그녀와의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가슴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혹시 보라가 임신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했던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제 어머니인 정임이 보라의 회사에 찾아갔었다는 얘기를 그날 저녁에야 듣고 우진은 펄쩍 뛰었다.
[엄마 미쳤어? 왜 나한테 말도 없이 그런 짓을 해?]
[아, 네 애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니까 내가 직접 확인해보려고 한 거지!]
보라에게 무슨 봉변을 당하고 온 건지, 정임은 치를 떨었다.
[아이고 부처님, 애가 없기 망정이지. 너 하마터면 발목 잡힐 뻔했어. 제가 부잣집 딸이면 뭘 하고 얼굴이 예쁘면 뭘 하니? 제 부모 뻘도 더 되는 사람한테 도끼눈을 뜨고 욕을 해대는데!]
[뭐? 보라가 엄마한테 욕을 했단 말이야?]
[이 미련한 녀석아. 세상에 어디 여자가 없어서 그런 독하디독한 물건을 만났어, 그래. 응?]
대체 보라가 어떻게 했길래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우리 엄마가 저렇게 화를 내실까. 우진은 새삼 지난 일이 후회스러웠다.
[처음부터 시현이 두고 한눈팔지 말았어야 했나 봐.]
[미련 접어, 이놈아. 걔는 벌써 물 건너갔어.]
[뭐?]
정임은 푸념을 하듯 말했다.
[네가 말했던 그 젊은 놈. 그놈이 걔 앞을 딱 막아서고 나더러는 아주 말도 못 붙이게 하더라. 어찌나 싸고돌던지, 원.]
말만 들어도 우진은 질투에 심장이 다 아파 왔다. 역시나 시현은 벌써 그놈과……!
[뭐래? 둘이 사귄대? 응?]
[그거야 내가 아니? 그놈은 끝까지 딱 잡아떼더라마는.]
녀석이 시현의 앞을 가로막고는 천하에 당당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저 혼자서 좋아한 겁니다. 처음부터 제 짝사랑이었고, 계속 제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녔습니다. 강시현 씨는 파혼하기 전에도, 물론 지금도 저한테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녀석의 표정까지 흉내 내 가며 말을 전하고, 정임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였다.
[흥, 그 말을 누가 믿는다고.]
하지만 우진은 그게 사실인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놈을 놔두고 시현이 왜 저 따위와 결혼을 하려고 했겠느냔 말이다. 말마따나 바람을 피운 걸 알고도 용서하면서까지.
[나랑 결혼할 사람이야. 내 앞에서 더는 한 대도 못 때려.]
녀석과 주먹다짐을 했을 때, 얻어맞은 자신을 감싸며 무서운 표정으로 말하던 시현이 생각나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알 것 같았다. 시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것을. 그렇게 잘난 놈이 목을 매다는데도, 나만을 사랑했다는 것을.
지금쯤이면 잘 됐다고 쾌재를 부르며 그놈에게 갔을 줄 알았는데, 여태도 놈의 짝사랑이라지 않은가.
‘설마 너는, 여태까지 나를…….’
착잡한 마음을 안고 우진은 짐을 빼기 위해 신혼집으로 향했다. 사용해 보지도 못한 가구와 가전은 중고 전문 업체를 불러서 한꺼번에 처리하기로 했다.
보라와 함께 있다가 시현에게 들켰던 날 이후로 처음 와 보는 신혼집이었다.
거실의 부서진 웨딩사진 액자와, 침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 있는 시현의 망가진 휴대폰까지. 모든 것이 그날 밤 그대로여서 새삼 죄책감이 밀려왔다.
우진은 부서진 웨딩 액자를 주워들었다. 사진 속에서 제 눈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시현의 얼굴을 보자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현아…….’
혼자 감상에 젖어 있는데, 가구를 옮기던 인부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인부의 손에 커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뭡니까?”
“침실 장롱 안에 들어 있던데요.”
우진은 상자를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몇 달 전에 발매된 최신형 게임기였다. 한참 전부터 갖고 싶었지만 공급 물량이 딸려서 번번이 구매에 실패하는 바람에 여태 군침만 흘리고 있는 물건이다.
왜 집에 이런 게 있는 거지, 하고 살펴보는데 상자 뒤쪽에 작은 카드가 붙어 있었다.
- 짠! 이거 엄청 갖고 싶어 했었지? 내가 오빠한테 주는 결혼 선물이야.
우리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오빠.
나도 많이 노력할게.
단정한 시현의 글씨체를 보는 순간, 우진은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을 느꼈다.
신혼집을 얻은 건 이미 자신이 바람을 피운 걸 들킨 후다. 그런데도 시현은,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 잘 해 보고 싶어서 이렇게 깜짝 선물까지 준비했던 것이다.
너는 나 같은 놈하고, 정말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나는 이런 너한테 어떻게 했지?
너한테는 사준 적도 없는 비싼 목걸이를 다른 여자한테 사다 바치고, 너한테는 핸드크림이나 선물하고…….
“시현아……!”
게임기 상자를 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남자를, 인부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
시현은 아까 아침 회의 때 태하가 말했던 자료를 챙겨서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속으로는 살짝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이따가 리서치 계획안 가지고 내 사무실로 오세요.]
더없이 사무적인 말투인 데다가 모두가 다 있는 데서 대놓고 말을 하니까 진짜로 사심 없이 일 때문에 부르는 것 같이 들렸지만, 시현은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그러게, 너무 다그치지 마. 시현 씨 파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당연히 마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팀원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듣고도 시현은 끝내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본부장님 짝사랑 아니다, 나도 본부장님 좋아한다, 우리 만나는 사이다.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결국 끝까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태하의 심정이 어땠을까.
눈을 뜨면 다 꿈이었을 것 같다고 불안해하던 어젯밤의 그를 떠올리자 뒤늦게 마음이 아파왔다.
결국은 진짜 짝사랑이나 하는 신세가 돼 버린 거 아닌가, 본부장씩이나 돼서.
이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뭐라고 사과하지?’
시현은 고민에 빠진 채 태하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본부장님. 강시현 씨 왔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태하가, 시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저기, 태하야. 아까 아침에는…….”
미안해서 차마 눈도 쳐다보지 못한 채로 말하다, 시현은 문득 말문이 턱 막혔다. 태하가 넥타이를 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불러 놓고 갑자기 넥타이는 왜 푸는 건데?
“뭐, 뭐 하는 거야?”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자 태하가 넥타이를 풀며 대꾸했다.
“만지고 싶어 했잖아.”
시현은 얼굴에서 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건 실수라고……!”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현의 손목을 잡아서 제 가슴으로 가져가며, 태하가 속삭였다.
“어디 마음 놓고 실수해봐,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