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이미 끝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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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이미 끝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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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이미 끝난 사이
2022.04.19.
“뭐, 뭐 하는 거야?”
“만지고 싶어 했잖아.”
“그러니까 그건 실수라고……!”
시현의 손목을 잡아서 제 가슴으로 가져가며, 태하가 속삭였다.
“어디 마음 놓고 실수해봐, 그럼.”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문득 머리 위에서 쿡쿡, 하고 소리 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태하가 눈이 한껏 가늘어진 채로 웃고 있었다.
“장난이야.”
그는 시현을 소파로 데려갔다. 어리둥절한 시현을 소파에 눕히고, 그는 옆에 걸터앉아서 베개 대신 제 허벅지를 내주었다.
“잠깐이라도 누워서 눈 좀 붙이라고 불렀어. 너무 피곤해 보여서.”
시현을 내려다보며, 태하는 미안한 얼굴을 했다.
“나 때문에 어젯밤에 제대로 못 잤지?”
말을 듣자마자 잊고 있었던 피곤이 확 몰려왔다. 그야 반쯤은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까.
테이블에 있던 서류를 집어 들고 보기 시작하는 태하에게, 시현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화 안 내?”
“왜?”
“내가 우리 사이, 사람들한테 사실대로 말 안 했잖아.”
태하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당신이 여기, 내 옆에 있는 게 중요하지.”
제 허벅지에 얹혀 있는 시현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태하는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곁에만 있어 줘. 나는 더 이상 바라지 않을 테니까.”
*
태하의 무릎을 베고 삼십 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 몸이 많이 가뿐해져 있었다. 덕분에 활기차게 오전 근무를 끝내고, 시현은 미주와 함께 밖에 나와서 점심을 먹었다.
역시 눈치 빠른 미주는 다 꿰뚫고 있었다.
“왜 사실대로 말 안 했어? 어제 사건으로 둘이 잘된 거 아냐?”
하기야 이쯤 되면 그 ‘코인 동생’이 태하라는 걸 눈치 못 채는 편이 더 이상하다. 미주를 붙들고 태하와 키스한 얘기까지 했던 게 떠올라서 시현은 새삼 민망해졌다.
“미주 씨도 아까 분위기 봤잖아. 어떻게 말해?”
“하긴, 완전 날도둑 취급이던데.”
“일단 입 다물고 있다가 기회 봐서 사실대로 말하려고.”
“그럼 지금 둘이 연애하는 거 아는 사람은 나뿐이네. 앞으로 상담할 거 있으면 나한테 해. 내가 다 들어줄게.”
대신에 커피 쏴, 하면서 미주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시현 씨,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이따 오후 회의 준비가 아직 덜 돼서.”
“어, 들어가. 내가 커피 사가지고 올라갈게.”
미주를 보내고 시현은 혼자서 근처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사러 온 회사원들로 줄이 꽤나 길었다.
“맞다, 나 오늘 아침에 그 여자 봤잖아.”
“누구?”
“왜 어제 난리 났던 3층 사건!”
앞에 줄을 서 있는 두 여자의 대화를 듣고 시현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내 얘기잖아?
바로 뒤에서 시현이 듣고 있는 것도 모르고, 두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땠어? 예뻐? 일곱 살이나 많다며, 본부장님보다.”
“뭐 얼굴은 예쁘장하던데, 별로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고. 근데 손이 확 깨더라.”
“손?”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 무슨 살림하는 아줌마 손 같더라고.”
“뭐야, 파혼했다더니 그게 아니라 설마 갔다 온 건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시현은 조용히 줄에서 빠져나았다.
커피숍 밖으로 나온 시현은 물끄러미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
그렇지 않아도 손이 콤플렉스인 시현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집에서 가정부 취급을 받아서 일찌감치 거칠어진 손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친구인 우진조차도 가끔씩 시현의 손을 보고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오죽했을까.
의기소침해진 채 회사로 돌아온 시현은, 엘리베이터에 타려다 흠칫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하필이면 태하가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시현을 향해 태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태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시현의 손을 꼭 잡아왔다.
“점심 먹고 오는 길인가 보네. 뭐 먹었어?”
“메밀국수.”
“시원한 거 먹었구나. 그럼 이따 저녁엔 좀 따뜻한 거 먹을래?”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괜히 이유도 없이 목이 메었다.
“아직도 피곤해 보이네. 오늘은 바보 같은 투정 안 부릴 테니까, 일찍 퇴근해서 푹 자.”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태하는 잡고 있는 시현의 손을 들어 올려 가만히 손등에 입술을 가져갔다.
손등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순간, 문득 아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무슨 살림하는 아줌마 손 같더라고.]
시현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손을 확 빼서 등 뒤로 감췄다. 그가 제 거친 손에 입 맞추는 게 싫었다. 이런 망가진 손 따위, 좋아하는 남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흠칫 놀란 태하의 표정을 보고서야 시현은 아차 싶었다.
“저기, 날이 더워서. 손에 자꾸만 땀이 나서 그래.”
다행히 태하는 금세 미소 짓는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렇구나.”
*
퇴근 시간 무렵, 우진은 미래은행 본사 건물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시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주머니에는 시현에게 돌려줄 전세금이 들어있었다.
물론 돈을 돌려준다는 것은 핑계고, 사실은 시현을 만나고 싶어서 온 거였다. 만나서 직접 주겠다고 하면 그냥 계좌로 입금하라고 할 게 뻔하니까.
십 분 정도 기다리자 시현이 나오는 게 보였다. 시현아, 하고 부르며 다가가려다 우진은 멈칫 했다.
분명히 6년 동안이나 만난 여자인데. 심지어 결혼식장 들어가기 직전까지 갔던 여자인데. 마치 오늘 처음 보는 여자 같았다.
딱히 옷을 차려입거나 화장에 공들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분위기가 예전과는 확 달랐다. 표정부터가 생기에 차 있었다.
‘시현이가 저렇게 예뻤나?’
새삼스레 가슴이 뛰는 것을 감추며, 우진은 시현에게 다가갔다.
“시현아.”
“오빠?”
우진을 본 시현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무슨 낯짝으로 뻔뻔하게 날 찾아왔느냐고 화내기 전에, 우진은 얼른 봉투를 꺼내며 용건부터 말했다.
“전세금 돌려받았거든. 그거 주려고 왔어.”
“그냥 계좌로 보내지 그랬어, 바쁜데.”
예상과는 달리 시현이 화를 내지 않아서 우진은 내심 안도했다. 동시에 가슴 속에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역시나 시현이는 아직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어쨌든 고마워. 짐 빼느라 고생했겠네.”
봉투를 받아드는 시현에게, 우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시현아. 게임기 잘 받았어.”
“게임기?”
시현이 마치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이 되물어서, 우진은 구차함을 무릅쓰고 설명했다.
“네가 침실 장롱 속에 넣어둔 거 있잖아. 나한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쓰여 있던데.”
“아, 그거.”
그제야 떠올랐는지,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산 거니까 잘 써. 갖고 싶어 했잖아.”
“고마워.”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하고 나서, 우진은 심호흡을 했다.
솔직히 고백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그 선물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깊이 반성했는지. 얼마나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러나 시현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봉투를 가방에 넣자마자 돌아서려 하는 것이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오빠.”
“시현아!”
우진은 황급히 시현을 붙잡았다. 미리 생각해둔 것은 온갖 로맨틱한 말들이었는데, 정작 입에서 나온 것은 구차한 애원이었다.
“나, 딱 한 번만 더 용서해주면 안 될까?”
시현이 당황한 듯이 우진을 바라보았다.
“보라하고는 완전히 끝났어. 그날은 진짜 마지막으로 만났던 거야.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보라한테 물어보면 알 거 아냐?”
처음으로 시현의 얼굴에 짜증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다급해진 우진은 매달리듯 말했다.
“너도 아직 나 못 잊고 있잖아. 그러니까 아직도 그놈이랑 안 만나고 있는 거잖아!”
그녀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 태하 좋아해, 오빠.”
우진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니었잖아!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그놈이 자기 혼자 널 짝사랑하는 거라고 했다며?”
“태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봐.”
시현의 예쁜 입술 사이에서 가벼운 바람이 새어나왔다.
“오빠 어머님한테 감사해야겠네. 덕분에 나도 내 마음을 확실히 깨달았거든.”
우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구나. 이미 그놈한테 마음이 다 가버렸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견딜 수 없이 비참해졌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주먹을 불끈 쥐고, 우진은 시현을 향해 따지다시피 말했다.
“우리 6년 동안이나 만났잖아. 어떻게 하루아침에 마음이 변해버릴 수가 있느냐고!”
시현은 입을 다문 채 우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지도, 분노에 차 있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기만 한 시선에 오히려 우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시현을 기다리면서 우진은 단단히 결심했었다. 시현이가 화를 내면 다 들어줘야지. 욕을 하더라도 그저 내가 다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혹시 울거든 꼭 안고 달래줘야지.
그러나 시현은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조용히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티끌만 한 원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더 이상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감정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진은 깨달았다.
시현에게 있어 자신은 화를 내거나 경멸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아예, 아무 관심도 없다.
“그래. 어떻게 보면 오빠나 나나 별다를 것 없을지도 몰라.”
한참 만에야 시현이 입을 열었다.
“나도 오빠랑 결혼 진행하면서, 사실은 계속 태하한테 끌리는 걸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미안해, 난 네 탓을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 그냥 비긴 걸로 치자.”
시현이 어깨를 펴고 우진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나 오빠 원망 안 해. 그러니까 오빠도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그냥 오빠도,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고, 시현은 문득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늦겠다. 나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
“…….”
“조심해서 들어가.”
그대로 등을 돌려 버리는 시현을, 우진은 차마 붙잡지도 못하고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도 그저 구차할 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시현아……!’
멀어지는 시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진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미칠 것만 같은데, 그렇다고 시현을 욕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것쯤은 우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슬픔과, 미련과, 원망과, 분노 따위의 복잡한 감정들이 갈 곳을 잃은 채 어지럽게 소용돌이쳐서,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우진의 눈에, 마침 미래은행 건물에서 나오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보라였다.
우진이 저만치서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보라는 회사 앞에서 웬 남자와 만나더니 반가운 얼굴을 했다.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요, 준영 씨.”
애교 섞인 목소리에, 우진의 눈빛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내 결혼을 깨 놓고, 벌써 딴 남자를 만난단 말이야?’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 걸까. 보라가 이쪽을 쳐다봤다가 우진과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왜 그래요, 보라 씨?”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남자가 보라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라는 금세 상냥한 얼굴로 돌아가 방긋 웃고는,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아 보란 듯이 그의 차에 올라탔다.
빌어먹게 멋진 스포츠카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우진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