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끝나고 나서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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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끝나고 나서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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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끝나고 나서 때려
2022.04.22.
퇴근 후 시현은 버스에 탔다. 평소처럼 집 앞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쭉 타고 가서 회차 지점이 되어서야 내렸다.
시현은 휴대폰을 꺼내 근처 영화관을 찾아서 그쪽으로 향했다. 사람이 꽤나 많았는데도 태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냥 여자들의 시선이 꽂혀 있는 곳을 따라가니 역시나 거기 서 있었다.
퇴근하고 바로 오느라 슈트 차림 그대로인데,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인데. 딱 태하가 있는 곳만 공기가 달랐다.
당당한 체격과 아름다운 얼굴. 조금 초조해 보이는 표정마저도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금 더 감상하고 있고 싶다.
시현은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서 태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초조해 보였던 얼굴에 꽃이 활짝 피는 것처럼 반가움이 확 번졌다.
“이제 왔어?”
얼른 달려와서 시현의 손을 잡으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오는 줄 알고 걱정했어.”
내가 늦어서 불안했구나. 사랑스러운 마음에, 시현은 그의 손을 힘주어 마주 잡아주었다.
“버스 타고 오느라 늦었어. 미안.”
태하와 첫 데이트로 함께 영화를 보기로 한 날.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서 최대한 회사에서 멀리 온다고 온 게 이거였다.
사실 이게 첫 데이트긴 하지만 같이 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우리 마지막으로 같이 봤던 영화, 기억 나?”
시현이 쿡쿡 웃으며 묻자 태하가 대답했다.
“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벤져스 봤었지.”
“정답. 그럼 처음 봤던 영화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린이날. 디즈니 애니메이션.”
그 아이가 커서 이렇게 손을 맞잡고 있다니,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영화는 요즘 박스오피스 1위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태하는 시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땀이 나서 슬쩍 놓으려고 해도 어딜, 하듯이 금세 도로 잡아 왔다.
덕분에 시현은 영화 내용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5월 말, 해는 길어질 대로 길어져 가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는데도 아직 주위가 환했다.
문득 영화관에서 남자친구와 팔짱을 끼고 나오는 여자의 목에서 클로버 모양의 목걸이를 발견하고 시현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사실은 아까도 같은 목걸이를 걸고 있는 다른 여자를 보았다. 정작 우진에 대한 감정은 다 정리되었는데도, 볼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앞으로도 어디선가 저 목걸이를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 되어야 하는 걸까. 속으로 한숨을 쉬며 시현은 눈을 돌렸다.
“뭐 먹고 싶어?”
태하의 질문에 시현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떡볶이.”
전에 태하가 우진이 사다 준 떡볶이를 쓰레기통에 통째로 버리면서 무척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더 좋은 것도 많은데 떡볶이 같은 거나 먹고 있지 말란 말이야.]
게다가 오늘은 첫 데이트다.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하면 핀잔을 들을 줄 알았는데, 태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먹으러 가자.”
“웬일이야? 왜 하필 떡볶이냐고 할 줄 알았는데.”
“사람이 죄지 떡볶이는 죄가 없잖아.”
시현은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뷔페식으로 된 즉석떡볶이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태하는 양배추와 삶은 계란, 그리고 튀긴 만두를 산더미같이 쌓아 갖고 왔다. 하나같이 시현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이거.”
떡볶이를 다 먹어갈 때쯤 시현은 미리 준비한 봉투를 꺼내 태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네 돈, 3천만 원. 신혼집에 전세금 들어갔던 거 이제야 돌려받았거든. 늦어져서 미안해.”
태하가 한숨을 쉬었다.
“갚으라고 준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래도 계산은 똑바로 해야지.”
“계산 똑바로 하려면 내가 가진 거 당신한테 몽땅 다 줘도 모자라.”
잠시 받으라는 둥, 싫다는 둥 실랑이가 오가다 갑자기 태하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뭔가 생각한 끝에 태하는 물었다.
“전세금, 다 돌려받았다고?”
“응. 3억 원 중에 내가 반 보탠 거 돌려받았으니까 1억 5천.”
“그럼 지금 1억 5천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시현은 영문도 모르고 대답했다.
“응. 수표로 받았거든.”
태하가 불쑥 말했다.
“그거, 나 줘.”
“응?”
시현은 조금 당황했다.
“지금 당장 쓸 데 있는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나 줘.”
왠지 태하는 평소에 없이 고집을 부렸다.
돈도 많은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럴까 싶었지만 시현은 금세 생각을 바꿨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사업하는 사람이니 갑자기 잠깐 현금이 부족해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주식 같은 걸 해서 불려 주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어쨌든 태하가 달라니까 그냥 주고 싶었다. 이유가 뭐든 상관없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시현은 순순히 가방에서 나머지 수표를 꺼내서 봉투에 넣어 내밀었다.
“자.”
먼저 달라고 한 주제에, 태하는 봉투를 받아들고는 머뭇거렸다.
“이거, 당신 전 재산일 텐데 이렇게 막 줘도 돼?”
시현은 웃었다.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해. 더 있었으면 그것도 다 줬을 텐데.”
태하는 조용히 기쁜 얼굴을 했다.
식사가 끝난 후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을, 태하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너 옆집에 이사 온 거, 나 때문에 일부러 온 거 맞지?”
“그걸 이제야 알았어?”
태하가 웃었다.
당시에는 우연이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이제 생각하니 하나하나 다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다. 둔한 자신을, 시현은 새삼 탓했다.
“어차피 난 곧 결혼해서 이사 갈 거였는데, 왜 그렇게까지 했어. 그래 봐야 네 마음만 아팠을 텐데.”
“그때까지만이라도 옆에 있고 싶었어.”
농담으로 건넨 말에, 태하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게 제일 무서웠거든.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 거. 당신은 내 누나도, 친척도 아니니까, 언제든 당신 마음이 변하면 영영 못 볼 수도 있는 거잖아.”
시현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당신이 매일 와주는 게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하루하루 불안했어. 내일도 와줄까, 언제까지 와 줄까. 어느 날 갑자기 안 오게 되면,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면 어떡해야 하지?”
태하는 어릴 때부터 치대거나 응석을 부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시현을 따르기는 했지만 귀찮게 군 적은 없었고, 시현이 늦어도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
그런데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어린아이가. 새삼 마음이 아파서 시현은 태하의 손을 꼭 잡았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그랬어. 난 너 때문에 하루하루 견디고 살았는데.”
작은아버지 집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던 시절, 태하는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도 태하가 없었으면 그 나날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을 정도다.
“그랬어?”
놀란 듯이 묻는 걸 보면 정작 본인은 몰랐나 보다.
“그럼 뭐, 내가 무슨 마더 테레사라도 되는 줄 알았니? 자비와 희생의 아이콘으로 보였어?”
시현은 웃었다.
“난 부모님도 없고, 집에서는 구박만 받았잖아. 근데 너는 나를 꼭 세상의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대해 줘서 그게 무척 행복했었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비록 말수는 많지 않은 아이였지만, 태하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게.
“지금도 그래, 나는.”
태하가 걸음을 멈췄다.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시현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도 나한테 당신은 세상의 전부야.”
진심이 담긴 고백에 그만 시현은 울컥했다. 사랑한다는 단어는 들어 있지도 않은데,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전해져 와서 그녀의 심장까지도 떨리게 만들었다.
“…….”
시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곧 닿아 올 입술을 기다리면서.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입술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에 손을 잡아끄는 느낌이 나서 눈을 뜨자, 태하는 벌써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뭐야, 나 김칫국 마신 거야?’
얼굴이 빨개진 채로 시현은 얼른 태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태하와 손을 잡고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해서 언제까지나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문제는 데이트라고 평소에 안 신던 높은 구두를 신었더니 슬슬 발이 아파서 견디기 힘들어졌다.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는 시현을 깨달았는지, 어느 순간 태하가 걸음을 멈추더니 등을 돌려댔다.
“업혀.”
시현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나 걸을 수 있어!”
“당신도 나 어릴 때 업어줬었잖아.”
“너는 그때 어려서 가벼웠잖아. 난 엄청 무겁단 말이야.”
“봤잖아, 헬스장에서 훨씬 무거운 것도 드는 거.”
태하는 끝내 고집을 부렸다.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기세라, 어쩔 수 없이 시현은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 몸을 기댔다.
태하는 힘든 기색도 없이 시현을 가볍게 업고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태하가 불쑥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수학여행도 못 갔었지, 그때.”
시현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태하가 열 살 때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태하가 고열을 내고 쓰러지는 바람에 놀라서 근처 소아과로 업고 뛰었었다.
다행히 단순한 열감기였지만, 열이 잘 안 떨어지는 바람에 태하는 며칠 입원을 해야 했다. 결국 병원비를 내느라 시현은 제주도로 예정되어 있던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되었다.
집에서는 물론 수학여행을 간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간병도 할 겸 시현은 태하의 병실에서 2박 3일을 보냈었다.
“그때 당신이 나랑 병실에서 같이 있어 준 2박 3일이, 나한테는 세상에 태어나서 두 번째로 행복했어.”
“그럼 첫 번째는?”
“지금.”
시현은 달아오른 뺨을 태하의 넓은 등에 살며시 기댔다. 심장 소리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아서 덩달아 제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더 많이.
태하는 그대로 시현을 업어다가 차에 태웠다. 집에 도착해서는 아예 공주님 안듯이 안아서 현관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오늘 즐거웠어.”
시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는 말했다.
“……나도.”
시현은 살짝 그의 입술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이만하면 노골적으로 신호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고지식한 남자는 눈치도 없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자.”
“저기, 잠깐만!”
돌아서려는 태하를, 시현은 황급히 불러 세웠다.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베어야 하지 않겠는가.
“들어와서 커피 한잔할래?”
그러나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자야 하는데 커피는 좀.”
“그럼 과일 먹고 가든가.”
“괜찮아. 아까 저녁 많이 먹어서 배불러.”
어떻게든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태하는 그대로 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들어온 시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가 아니라 라면 먹고 가라고 했어야 알아들었을까?’
그런데 아까 라면 사리 왕창 넣어서 떡볶이 먹어 놓고 또 라면은 좀 그렇잖아.
여자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좀 알아들어야지. 눈치라고는 없는 남자를, 시현은 벽 너머로 흘겨보아 주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씻고 잠이나 자자.
시현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가물가물 잠이 들 무렵. 문득 똑똑, 하고 작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잠이 확 달아났다. 문을 열어 보니 아까 헤어져서 집에 들어간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도로 왔어?”
대답 대신에 태하는 말했다.
“혹시 내가 착각한 거라면, 끝나고 나서 때려.”
무슨 소리야, 하고 생각하는데 태하가 갑자기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뜨거운 것이 입술을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