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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끝없는 밤 (64/181)

#64. 끝없는 밤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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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부터 태하는 시현에게 늘 고분고분했다. 하지 말라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반대로 하라는 것은 뭐든지 했다. 타인에게 일절 관심을 갖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시현에게만은 언제나 세심했고, 그녀에게라면 뭐든 아낌없이 내주었다. 그래서 시현은 태하를 내심 세상에서 제일 만만하고 쉬운 상대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지금까지도. 그런데. 침대 위에서는 정반대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굵직한 근육질의 팔에 갇혀서, 시현은 체면도 잊고 울먹였다.

1655195257666.jpg “제발 그만, 응? 나 너무 힘들어.”

벌써 그의 품에서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울고 난 후여서 반쯤은 쉬어 버린 목소리였다. 그런 시현의 귓가에 태하가 부드럽게 입 맞추며 달랬다.

16551952576664.jpg “괜찮아, 할 수 있어.”

목소리는 한껏 다정했지만 눈빛은 포획한 사냥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마치 사로잡은 영양을 가지고 노는 사자 같았다. 차라리 목덜미를 콱 깨물어서 단번에 숨통을 끊어주면 편할 텐데, 품 안에 꽁꽁 가둬 놓고 딱 죽지 않을 만큼만 괴롭히면서 끝없이 갖고 놀고 있었다. 그렇다고 싫다는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었다. 끈질긴 주제에 어디까지나 느긋하게 굴면서 일부러 애를 태웠다.

16551952576664.jpg [이젠 내 거야.]

끝없이 속삭이면서, 제 표식을 새기듯 여기저기 입맞춤의 흔적을 남기는 데 열중했다.

16551952576664.jpg [말해봐, 응?]

시현에게도 자꾸만 조르듯 묻는 것이 뭔가 대답을 바라는 것 같은데, 애초에 뭘 묻는 건지 모르겠으니 대답할 방법도 없었다. 결국은 시현이 울먹이며 제발, 하고 빌다시피 해야 그는 소리 없이 한숨을 지으며 원하는 것을 주었다. 속절없이 쾌락에 휩쓸리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얘는 어디서 이런 걸 배웠을까? 상대가 다른 남자였다면 여자가 있어도 백 명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이 남자는 확실하게 제가 처음이다. 즉 이건 그냥 타고난 거였다. 포식자의 기질을 타고난 어린 맹수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피곤에 지쳐 축 늘어져 있는 시현을 어르고 달래서 결국은 또 불을 붙여놓았다. 천국도 지나치면 지옥이 된다. 몇 번이고 그의 품 안에서 죽었다 살아난 끝에 시현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1655195257666.jpg “나 좀 잘래, 응?”

어떻게든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는 시현을, 태하가 힘센 팔 안에 가둬 놓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분명히 얼굴은 제가 아는 윤태하가 맞는데, 눈빛은 꼭 다른 사람 같았다.

16551952576664.jpg “그래.”

역시나 입으로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행동은 정반대였다. 태하는 한쪽 팔로 시현을 종이인형처럼 가볍게 들어 올려서 제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히고 뒤에서 꼭 껴안으며 속삭였다.

16551952576664.jpg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드러난 어깨에 가만히 입을 맞추는 감각에 다 꺼져버린 줄 알았던 정열이 새롭게 타올랐다. ……그렇게 또,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달콤한 고문에 시달리다 못해 시현은 자존심도 버리고 애원했다.

1655195257666.jpg “태하야, 제발. 응?”

16551952576664.jpg “말해줘, 당신 입으로.”

당장 숨이 넘어갈 듯한 시현의 여린 목덜미에 조심스럽게 이를 세우며, 태하는 끈질기게 대답을 졸랐다.

16551952576664.jpg “말하면 쉬게 해줄게.”

그러니까 대체 나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기어이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좋아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심으로 서러워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끝나지 않는다.

1655195257666.jpg “나 정말 죽을 거 같단 말이야……!”

시현이 진짜로 울음을 터뜨리자 태하는 그제야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허둥지둥 그녀를 시트로 감싸서 침대에 눕히고, 뺨에 흐른 눈물을 제 입술로 훔쳐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16551952576664.jpg “그렇게 힘들었어?”

힘들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대체 어디로 들은 거야. 기가 막혀서 더 눈물이 났다. 아침, 점심 다 룸서비스로 시켜 먹고 하루 종일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당연히 힘든 게 정상 아닌가?

1655195257666.jpg “네가 사람이야?”

시현은 이를 악물고 넓은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때려 주었다. 아무리 세게 때려도 꿈쩍도 안 해서 더 얄미웠다.

1655195257666.jpg “너랑 괜히 사귀기로 했나 봐. 힘들어서 못살겠어!”

16551952576664.jpg “미안. 난 그냥 하는 소린 줄 알고…….”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이 아니라, 평소의 다정한 눈으로 돌아와 있어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16551952576664.jpg “안고는 있어도 돼?”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이자 태하는 등 뒤에서 시현을 끌어안고 미안해, 미안해, 하고 속삭이며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16551952576664.jpg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러니까 헤어지자는 말만 하지 마, 응?”

목소리가 진짜로 불안하게 들려서 시현은 아차 싶었다.

1655195257666.jpg “뭘 그렇게 놀라. 그냥 한 소리잖아.”

돌아눕자 지나치게 단정한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천년 묵은 원한도 단숨에 날아갈 것만 같은, 저놈의 얼굴.

1655195257666.jpg “그래도 이러다간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으니까 좀 봐주라. 내가 일찍 죽는 건 너도 싫잖아?”

태하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16551952576664.jpg “싫은 점이 있으면 이렇게 꼭 나한테 말해줘. 어떻게든 고칠 테니까.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태하는 이제 와서 새삼 부끄럽다는 듯이 시트를 끌어당겨 드러난 제 가슴을 가렸다.

16551952576664.jpg “다이어트는 시간이 걸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시현은 눈을 깜빡였다. 태하의 몸은 온통 아름답고 강인한 근육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어디를 봐도 군살 따위는 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데.

1655195257666.jpg “네가 다이어트를 왜 해?”

16551952576664.jpg “내 몸은 당신 스타일 아니라면서?”

태하가 시현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언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 잠시 생각해보다 시현은, 자신이 예전에 태하의 몸을 보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1655195257666.jpg [구경 잘했어. 근데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난 잔근육이 좋거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너무 두근거리는 바람에 그날 밤에 잠도 못 잤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참 어린 동생으로만 보고 있었으니까 민망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에 불과했다. 어우야 너무 좋다, 하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으니까. 이제 마음껏 만지고 닿을 수 있게 되자 그냥 바라보기만 할 때보다 천 배는 더 좋았다. 보기에는 강철같이 강인해 보이는 몸은, 실제로는 말도 못 하게 포근했다. 미워 죽겠다가도 품에만 안기면 금세 마음이 스르르 풀릴 정도로.

16551952576664.jpg “당신 취향이 변한 걸 진작 알았으면 몸도 좀 덜 키웠을 텐데…… 두 달 정도만 시간을 주면 원하는 대로 몸 만들어볼게.”

태하가 아쉬운 듯이 말하는 바람에 시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냥 두면 진짜로 저 멋진 근육들을 다 없애 버릴 기세였다. 차마 지금이 훨씬 좋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워서 시현은 돌려 말했다.

1655195257666.jpg “그럴 필요 없어. 지금도 괜찮은데 뭐.”

그러나 태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51952576664.jpg “난 강시현 취향의 남자가 되고 싶어.”

태하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1655195257666.jpg “이 바보야.”

속삭이며 시현은 태하의 입술에 가만히 제 입술을 가져갔다. 이젠 아무 데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꽉 부둥켜안고, 태하가 뜨겁게 응답해 왔다. 제 입술로 시현의 입술을 열고, 달콤한 입안을 깊숙이 더듬었다. 마치 그가 평생을 찾아 헤매었던 보물이 그 안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방금까지 힘들어 죽겠다고 투정 부린 것도 잊고, 시현 역시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최선을 다해 응답했다. 부디 내 마음이 네게 전해졌으면. 즉 나름대로 진심을 담은 입맞춤이었는데, 어느 순간 태하는 갑자기 시현을 밀쳐내듯 입술을 확 떼더니 급하게 돌아누웠다.

16551952576664.jpg “……여기까지만.”

이유를 알아챈 시현은 새빨개졌다. 그녀는 돌아누워 있는 태하를 베개로 마구 내리쳤다.

1655195257666.jpg “그러니까 네가 사람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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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절하듯 태하의 팔에 안겨 길고 달콤한 낮잠을 자고 나서 눈을 뜨자 이미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었다. 꽤나 피곤했는지, 태하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1655195257666.jpg ‘너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소리죽여 쿡쿡 웃으며, 시현은 태하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사람을 못살게 군 주제에, 잠든 얼굴은 마치 천사 같았다. 등 뒤를 더듬어보면 틀림없이 날개가 만져질 것 같다. 아까 자는 동안 뭔가 나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깨고 나니 무슨 꿈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슬프고 외로웠던 느낌만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시현이 잠꼬대라도 했던 걸까, 태하는 잠결에도 금세 알고 꼭 안아주었다.

16551952576664.jpg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다정한 위로를 들으며 시현은 도로 편안히 잠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완벽한 안도감에 휩싸여서. 생각해 보면 살아오는 내내 늘 마음속 어딘가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빨리 결혼하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아, 여기가 내 자리구나, 하고 마음 깊이 느낀 것은 태하의 곁이 처음이었다. 예전에도 물론 사랑스러웠지만, 지금은 바라보면 가슴이 떨렸다. 윤태하. 입속으로 가만히 세 글자를 입에 담는 순간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까지 가빠 왔다. 어느 틈에 너는 내게 이름만으로도 설레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을까. 눈앞에 있는 남자가 동생이 아니라, 진짜 연인이라는 것을 시현은 마음 깊이 깨달았다. 더 자게 놔두고 싶어서 시현은 발소리를 죽여 거실로 나왔다. 어젯밤에 그가 준 목걸이 상자들이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갑자기 자신도 태하에게 뭔가 선물하고 싶어졌다. 뭐가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 문득 아주 오래된 기억 한 자락이 떠올랐다. 태하가 고등학교 때였다. 몇 학년 땐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초여름쯤이었던 것 같다. 한번은 같이 거리를 걷다가 태하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1655195261922.jpg [나 저거 하나만 사줘.]

그가 가리키는 것은 길거리 좌판에서 파는 만 원짜리 싸구려 반지였다. 차라리 그냥 단순한 모양이었으면 별생각 없이 하나 사줬을 텐데, 크롬 하츠 디자인을 어설프게 카피한 것이 꼭 날라리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다.

1655195257666.jpg [학생이 무슨 반지야?]

1655195261922.jpg [그래도.]

늘 시현에게 고분고분했던 아이가, 그날만은 왠지 끈질기게 굴어서 왜 이러나, 싶었다.

1655195257666.jpg [너 돈 많잖아. 네가 사면 될 거 아니야?]

핀잔을 주고 걷기 시작하는 시현을, 태하가 어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네 가슴에 박아 넣은 가시가 대체 몇 개나 되는 걸까. 한참을 마음 아파하다 시현은 마음을 먹었다. 시간은 돌릴 수 없지만, 반지는 지금이라도 사줄 수 있다. 다행히 시계를 보니 아직 초저녁이었다. 태하는 아직 한참 더 잘 것 같아서, 시현은 옷을 입고 살짝 객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태하였다. 와이셔츠 자락이 옷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것이, 옷도 제대로 못 챙겨 입고 서둘러 뛰쳐나온 티가 역력해서 시현은 놀라 물었다.

1655195257666.jpg “벌써 일어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와락 끌어안겼다.

16551952576664.jpg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 테니까 가지 마.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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