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 아주 오래된 이야기 (66/181)


#66. 아주 오래된 이야기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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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케네디는 수연의 첫사랑이자 평생토록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이를 낳은 지 어언 스물다섯 해. 그 일 때문에 거짓 사망신고까지 하고 여태껏 죽은 사람으로 살아오면서도, 수연은 한 번도 레온을 만나 사랑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친엄마 얼굴도 모르고 컸을 자식에게 한없이 죄스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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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감히 왜 울어? 자격도 없는 애미 주제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아내며 수연은 애써 중얼거렸다.

수연은 여태껏 모진 고생을 하며 살아왔다.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몸으로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수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하다못해 아파도 병원 한번 갈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나날을 여태껏 버텨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언젠가 아들을 만나겠다는 희망, 그리고 레온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식당에서 고된 설거지를 하다 잠시 쉴 때도, 입주 가정부 일을 하다 더러운 누명을 쓰고 쫓겨나서 허름한 여관방에 몸을 누일 때도, 그녀는 습관처럼 레온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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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만 있으면 언젠가는 한 번쯤 볼 수 있을지 몰라. 그러니까 힘내서 살아야 해.’

60세가 되어서라도, 70세가 되어서라도 좋으니까 언젠가, 단 한 번만 볼 수 있었으면.

그 덧없는 소망 한 자락이 살아갈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일까. 가게 앞에 놓여 있는 꽃을 본 순간, 자연스럽게 그가 떠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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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한 거야. 그 사람은 지금쯤 자기 가정을 꾸려서 잘 살고 있을 텐데.’

자신에게 기댈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여태 단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지만, 그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당연히 다른 사랑도 몇 번은 했을 테고, 물론 결혼도, 다른 여자와의 아이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자신을, 수연은 애써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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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 새끼가 엄마도 없이 자라길 바랐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눈물은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

그 시각, 레온은 서울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 있었다.

한참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던 레온은 문득 손짓으로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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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카레 준비해줄 수 있습니까?”

그가 자주 찾는 음식이라 전용기에는 언제나 인스턴트 카레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인 스튜어디스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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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회장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스튜어디스가 물러가고, 잠시 후 카레 냄새가 은은하게 기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운 냄새가 오래된 기억을 불러와서, 레온은 눈을 감았다.

*

레온 케네디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전공은 경영학.

사실 그는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완고한 부모는 외아들인 그에게 경영을 배워서 사업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강압적인 부모에게 질려, 레온은 학기 중에 기숙사에서 도망쳤다.

부모는 귀신같이 알고 아들을 잡으러 사람을 보냈다. 무작정 공항으로 향해서, 당장 티켓을 구할 수 있는 곳 중에 가장 먼 곳으로 간다는 것이 공교롭게도 한국이 되었다.

한국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한국전쟁과 88서울올림픽밖에 없는 그였다.

당연히 한국어라고는 한마디도 몰랐으므로, 공항에 내리자마자 무작정 눈에 보이는 버스를 타고 가서 마지막 정거장에 내렸다. 거기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서 또 마지막 정거장에 내렸다.

그렇게 몇 번을 되풀이해서 다다른 곳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첫눈에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확실히 유럽의 시골 마을에서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은 아니었다. 시골 마을이라도 주택은 모두 현대식이었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파릇하니 자라고 있는 밭 사이마다 경운기나 트랙터가 오갔다.

밭에서 일하는 아낙네는 물론 길거리에 채소를 늘어놓고 파는 할머니까지도 모두 꼬불꼬불 펌을 하고 있었다.

시골과 도시의 느낌이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 묘하게 섞여 있는 이 특이한 풍경이 오히려 레온의 마음에 쏙 들었다.

모두가 약속한 듯이 그려대는 남프랑스의 농가보다 훨씬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쯤 왔으면 부모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레온은 당장 시내에 단 하나뿐인 작은 모텔에 방을 얻고 매일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실컷 그림만 그리는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물가도 비싸지 않아서, 가져온 돈으로 1, 2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한 달쯤 되었을 때 벌어졌다. 방을 비운 사이 객실에 도둑이 든 것이었다. 공항에서 환전해 온 한국 돈은 물론이고 달러까지 싹 털려버렸다.

지방의 작은 파출소는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의 신고 따위 받아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사관에 연락해서 도움을 청했다가는 부모에게 들키게 될까 봐 두려웠다. 케네디 가는 정, 재계 할 것 없이 두루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방값은 몇 달치를 선불로 지불해놓아서 당장 쫓겨날 걱정은 없었지만, 문제는 생활비였다.

믿을 만한 대학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언제 그 편지가 도착할지 알 수 없었다.

덕분에 레온은 이틀째 굶은 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열흘쯤 전에 찾은 곳으로,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작은 마을을 내려다보고 그리는 풍경화였다.

예술가란 원래 배가 고파야 한다지 않나. 이것도 좋은 경험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온은 작업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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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집중을 깬 것은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얼굴이 희고 조용한 눈을 한 여자.

처음 이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매일같이 저렇게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곤 하는 여자였다.

사실 동양인의 나이 따위, 얼굴만 봐서는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화장기도 없는 것이 영락없이 십대 소녀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마을에서 마주쳤던 학생들은 모두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러니까 아마도 성인일 거라고 레온은 짐작하고 있었다.

늘 비슷한 시간에 마주치는 걸 보면 이 언덕이 그녀가 오가는 길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마다 여자는 먼발치에서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곤 했다.

처음엔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나, 하고 생각했는데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와 보니 그녀가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넋을 잃고 그림을 보고 있는 여자에게 살금살금 다가가서, 레온은 슬쩍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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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나요?]

그러나 말을 걸자마자 여자는 놀란 토끼처럼 도망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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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천천히 봐도 괜찮은데…….]

황급히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이라는 게 대부분 이랬다. 영어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외국인이 다가가면 일단 지레 겁부터 먹는 것이다.

거기서 몇 마디 더 나눠 보면 금세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시선이 느껴져도 일부러 모른 척을 하게 되었다. 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괜히 다가가서 또 말을 걸었다간 자칫 영영 안 올 것 같아서.

즉 레온에게는 처음 생긴 팬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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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만 할 수 있으면, 좋아하는 걸 그려줄 텐데.’

아쉽게 생각하며 한참 그림을 그리다 기지개를 켜는 척 슬쩍 돌아보자 어느새 여자는 가버리고 없었다.

레온은 허전함을 느꼈다. 동시에 여자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허기가 되살아났다.

참다못해 레온은 캔버스를 접고 시내로 내려갔다. 이 돈으로 마켓에서 뭘 살 수 있을까. 주머니에 든 동전 몇 개를 만지작거리며 걷다 걸음을 멈춘 것은 작은 식당 앞이었다.

안에서 못 견디게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 가끔 기숙사 메뉴로 나왔던 인도 커리 냄새와 비슷한데, 그보다는 덜 강렬하면서도 훨씬 향긋한 냄새였다.

먹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레온은 고민했다. 하다못해 말이라도 통하면 부탁을 해볼 텐데, 한국어라고는 몇몇 식당에서 주워들은 인사말 정도밖에 할 줄 몰랐다.

고민하는 도중에 맛있는 냄새는 점점 더 짙어졌다.

하다못해 눈으로라도 보고 싶었다. 그는 유리벽 너머로 안에서 식사하는 손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역시나 커리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하얀 쌀밥에 얹어서 먹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것이, 레온에게는 여태껏 살면서 먹어본 그 어떤 만찬보다도 맛있게 보였다. 저것 한입만 먹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굶주린 눈길로 한참 동안 음식을 노려보다, 문득 레온은 앞치마를 두른 웨이트리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자였다.

깨달은 순간, 얼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레온은 황급히 돌아서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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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창피한 나머지 어느덧 배고픔도 깜빡 잊어버렸다.

대체 그녀가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레온은 도로 언덕으로 돌아갔다. 배고픔도, 수치심도 잊게 해 주는 것은 오직 그림뿐이었다.

마을에 드리운 마지막 노을빛을 담으려 필사적으로 붓을 움직였다. 그리고 노을이 거의 다 저물어갈 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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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등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자 그 웨이트리스가 서 있었다.

그녀는 레온의 캔버스를 바라보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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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어요.]

문법도 발음도 엉망이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어쨌든 그녀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게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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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화가로서 생전 처음 들은 칭찬에, 기쁜 마음과 동시에 조금은 속이 상했다.

정말로 내가 아니라 그림이었구나. 관심이 있었던 건.

레온은 그녀가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게 살짝 몸을 비켜주었다.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본 후, 그녀는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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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이거요.]

비닐봉투에 작은 플라스틱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뭔가 싶어서 열어보는 순간, 아까 식당에서 맡았던 맛있는 냄새가 훅 끼쳐 왔다.

흰 쌀밥에 노란색 커리를 얹은 음식이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덕분에 살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왠지 목이 메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도시락을 건네주고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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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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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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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카레 나왔습니다.”

스튜어디스의 친절한 목소리에 레온은 눈을 떴다. 눈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라이스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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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카레를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가며, 레온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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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조금만 더 있어줘. 내가 갈 때까지만.’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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