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죽을 만큼 그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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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죽을 만큼 그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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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죽을 만큼 그리워서
2022.05.20.
레온의 부모가 경비행기 사고로 한날한시에 사망한 것은 9년 전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사업을 물려받게 되면서, 레온은 그간 부모가 자신에게 철저히 숨겨왔던 일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아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를 낳은 여자가 살아 있다는 것.
알았을 때는 이미 아들이 한국 나이로 17세. 분노와 배신감이 너무 커서, 부모님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슬픔조차도 금세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레온은 한국에 있는 아들에게로 달려갔다.
다행히 혼혈이라는 조건 덕분에 태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되어 있는 여자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찾고 있는데도, 여자는 마치 유령처럼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어디서 봤다는 제보를 듣고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보면 닮은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틀림없다고 해서 또 사람을 보내보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후라고 했다.
늘 가명을 쓰는 데다 어디서든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아서, 그게 진짜로 그녀였는지 아니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날린 세월이 벌써 9년.
레온은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혹시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은 아닐까. 사고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린 건 아닐까. 어차피 서류상으로는 죽은 사람이니까, 진짜 죽는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 아닌가.
첫사랑이자 하나뿐인 자식을 낳아준 여자였다.
비록 실제로 결혼하지는 못했지만, 레온은 평생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여기고 있었다. 여태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 찾아서 하루빨리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나날이 간절해졌다.
그러면서도 태하에게는 아직도 친엄마가 살아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도 만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자식에게만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결국 레온은 결심했다. 아예 한국으로 옮겨가서 살기로. 호텔도 그래서 인수한 것이었다. 물론 아들인 태하 곁에 있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직접 그녀를 찾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채 한국에 가기도 전에 제대로 된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비서가 준 사진에 찍혀 있는 것은 틀림없는 그녀, 정희선이었다. 비서는 그녀가 일하고 있다는 식당의 주소도 함께 가져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레온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대기해 있던 차를 타고 그녀가 일한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기내에서 미리 새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매만졌는데,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차 안에서 몇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혹시 내가 많이 늙었으면 어쩌지?’
긴 비행에 지친 탓인지,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던 다크 서클이 오늘따라 눈에 확 띄어서 속이 상했다. 생기라고는 없어 보이지 않나.
사진에는 희선의 옆모습만 겨우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 역시 많이 변해 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레온은 그런 걱정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거기 있어 주기만 하면 그걸로 족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고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걱정을 안고 도착한 곳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심장이 가슴뼈를 뚫고 나올 기세로 세차게 두근거렸다.
식당 안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 혼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바로 사진에 찍혀 있던 아줌마였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주인을 향해, 레온은 다짜고짜 물었다.
“혹시 정희선 씨라는 사람이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까?”
외국인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흘러나오자 상대는 화들짝 놀라서 엄마야, 하고 한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제발 알려주십시오. 정희선 씨를 찾고 있습니다.”
그제야 주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 없는데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수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사용하는 걸로 추정되는 가명 중 하나를 대자 그제야 주인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아, 수연 씨?”
역시나 맞았다. 그러나 레온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하자마자 상대는 어깨를 으쓱했다.
“수연 씨 그만둔 지 벌써 몇 달 됐어요. 어디 가서 식당 차린다고 했던 거 같은데, 차리긴 했을라나 모르겠네.”
“그럼 연락처를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해봤더니 그새 번호를 바꿨더라고요.”
희망이 눈앞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레온은 매달리듯 물었다.
“어디로 갔는지, 혹시 짚이는 곳이라도 없습니까? 아니면 알 만한 사람이라도.”
그러나 식당 주인은 대답 대신 푸념을 했다.
“아유, 말도 말아요. 뭐가 그렇게 켕기는 게 많은지, 자기 얘기라고는 한마디도 안 하는 여잔데 뭘. 일할 때도 전화번호를 한 달이 멀다 하고 바꿔대는 통에 아주 불편해서 혼났네. 아니, 같이 일하는 사이에 하다못해 저 사는 데도 얘기를 안 한다니까?”
레온은 더 추궁해봐야 알아낼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번에야말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원점에 섰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혹시 연락이 닿거든 꼭 이쪽으로 전화해주십시오. 크게 사례하겠습니다.”
시큰둥한 주인에게 억지로 명함을 쥐여 주고 레온은 식당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해서 금세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 하하, 하…….”
허탈한 웃음 끝에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
주말 내내 호텔에서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는 호텔에서 곧바로 회사로 출근했다. 결국 집에 돌아온 것은 월요일 저녁, 퇴근한 후의 일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시현은 태하와 함께 근처 마트에 들렀다.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서였다.
“갈비찜 좋아하지?”
대뜸 비싼 한우 갈비가 든 팩을 집어서 카트에 넣는 태하의 손목을 붙들고,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응?”
“너도 요즘 사정 어렵잖아.”
조금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태하의 어깨를, 시현은 다 안다는 듯이 두드려 줬다.
“힘내. 내 돈은 안 갚아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얼마 전에 우진에게 돌려받은 전세금 1억 5천을, 태하가 달라고 해서 통째로 주었다.
그래서 시현은 태하의 회사 사정이 어려운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웬만한 일이면 저한테까지 부탁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 그건…….”
뭐라고 말하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태하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당신은 걱정 안 해도 돼.”
결국은 한우 대신에 생선 코너에서 큼지막한 도미 한 마리를 샀다.
“넌 가만히 있어. 내가 낼 거야.”
계산대 앞에서 우기다시피 해서 카드를 꺼내는 시현을, 태하는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와서 잠시 문 앞에서 헤어졌다.
“들어가서 좀 쉬고 있어. 밥 다 되면 부를게.”
잠깐 떨어지는 것조차도 아쉬운 듯, 태하는 시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며칠 동안 비워 두었던 집에 들어서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특급호텔의 스위트룸에 달랑 3박 4일 있었다고, 여태 잘만 살았던 열 평짜리 원룸이 새삼 비좁게 느껴지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어느덧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앞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뜨자, 깨우러 온 태하가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구나. 와서 얼른 저녁 먹고 또 자.”
태하를 따라가자 이미 식사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제 앞에 놓인 작은 가마솥 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와 함께 김이 확 피어올랐다. 새하얀 쌀밥 위에 예쁘게 칼집을 낸 큼지막한 도미살이 얹혀 있고, 그 주위를 잘 익은 표고버섯과 우엉이 감싸고 있었다.
도미 솥밥이었다.
시현은 젓가락으로 도미 살 한 점을 떼어서 먹어 보았다. 살짝 구운 도미 살이 입안에서 확 녹아 없어졌다. 도미 머리와 뼈로 끓여낸 맑은 국도 일품이었다.
“와 윤태하 진짜…… 장가가야겠다, 가야겠어.”
“말로만 그러지, 맨날.”
태하는 왠지 조금 심술궂은 얼굴을 했지만, 이미 도미 솥밥에 정신이 팔린 시현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곁들여진 양념장에 생선 살과 함께 밥을 비벼서 입에 넣자 그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참, 태하야.”
맛있게 밥을 먹으며, 시현은 문득 생각나는 것을 물었다.
“너 여기로 이사 오기 전에 원래 살던 집 있었을 거 아냐. 그건 어떻게 했어?”
“팔았어, 얼마 전에.”
“아.”
정말 회사가 어렵긴 어려운가 보구나.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시현은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 정도 스케일의 문제는 제가 걱정해 봐야 도울 방법이 없다. 게다가 정 급하면 그의 아버지가 있지 않은가.
레온은 미국에서 꽤나 유명한 사업가라고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서울에도 그렇게 큰 호텔을 인수한다는데, 상상 이상으로 부자인 게 틀림없었다. 그토록 애틋하게 여기는 아들의 회사가 망하는 꼴을, 앉아서 보고 계실 분이 아니다.
“호텔이 정말 좋긴 좋더라. 레온 아저씨 덕분에 좋은 경험 했어.”
“그럼 나중에 당신 집도 호텔처럼 꾸며야겠네.”
시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얘가 현실을 잘 모르네.
“어느 정도 사이즈가 나와야 그렇게 꾸미지. 이십 평짜리 아파트 전세나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일 텐데.”
태하가 불쑥 물었다.
“언제는 펜트하우스가 좋다며?”
“응?”
펜트하우스라곤 드라마에서만 봤지, 실제로 가본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릴까. 그러나 태하는 대답 대신에 시현의 그릇 위에 도미 살을 얹어주었다.
“많이 먹어. 잘 먹어야 기운이 나지.”
그제야 시현은 숟가락질을 멈추고 태하를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나 이렇게 잘 먹여서 또 뭐 하려고 그러지?”
“아니야!”
태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말 그러려던 거 아니야. 당신 너무 피곤해 보여서 그래.”
“내가 누구 때문에 피곤할까?”
흘겨보자 태하가 혼이 난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미안. 곁에 있으면 참을 수가 없어서…….”
시무룩한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이쪽이야말로 참을 수가 없어졌다. 에잇, 밥이고 뭐고 모르겠다. 시현은 몸을 기울여 태하에게 입을 맞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입술을 빼앗긴 남자가, 곤란한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나 또 못 참을지 몰라.”
살짝 빨개진 얼굴을 바라보며, 시현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까딱했다.
“누가 참으래?”
태하가 커다랗게 숨을 삼켰다. 순식간에 확 바뀐 눈빛으로, 그는 시현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가슴이 두근, 하고 커다란 소리를 낸 순간.
마치 노린 것처럼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버지?”
휴대폰을 본 태하가 아쉬운 듯이 시현에게 잠깐만, 하듯 눈짓을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예? 지금요?”
갑자기 태하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잠시 후 전화를 끊고, 태하는 말했다.
“아버지가 한국에 오셨대.”
“연락도 없이?”
“응. 지금 호텔에 계신다는데.”
레온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시현은 민망함부터 앞섰지만, 태하는 왠지 표정이 심각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좀 이상해. 아버지는 괜찮으니까 걱정 말라고, 내일 만나자고 하시긴 하는데…….”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다, 태하는 금세 일어섰다.
“아무래도 아버지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
“나도 같이 가.”
시현은 냉큼 그를 따라나섰다.
호텔에 도착하자 이미 태하를 알고 있는 직원이 다가와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요? 어디 계시죠?”
“그게, 회장님께서…….”
호텔 라운지 바에서 폭음을 한 끝에 쓰러져서, 직원들이 객실에 모셔다 놓았다는 것이다.
태하와 시현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레온이 있는 객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마자 독한 술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커다란 침대 위에 레온이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아버지.”
태하가 그를 부르며 살며시 어깨를 흔들었다.
“괜찮으세요? 저 왔어요.”
그러나 레온은 대답 대신에 괴로운 신음만 흘렸다. 시현은 태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너무 취해서 안 되겠어. 주무시게 놔두자.’
그런 뜻이었다.
태하는 레온의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베개도 바로잡아 주고 나서 조용히 객실을 나가려는 순간.
레온이 베개를 꽉 껴안으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절망에 찬 목소리였다.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잖아. 언제까지라도, 날 기다리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