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그의 이름은 (68/181)


#68. 그의 이름은
2022.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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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장사 준비를 하기 위해 시장에 나갔다. 가게 근처에 있는 작은 재래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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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한 관 주세요. 양파도 큰 걸로 한 망 주시고요. 그리고 또…….”

단골인 채소 가게에 들러 먼저 주재료인 감자와 양파부터 주문해 놓고 다른 채소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주인아줌마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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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오늘은 물건이 하나같이 영 별로네. 미안하지만 다음에 사 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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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수연은 진열된 감자와 양파를 들여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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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거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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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는 물렀고, 감자도 여기저기 싹이 나서 별로야. 다음에 좋은 거 들어오면 그때 와.”

아줌마는 말 끝났다는 듯이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수연은 시장 안의 다른 채소 가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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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하고 양파 좀 주세요. 감자는 한 관, 양파는…….”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인이 말을 가로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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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오늘은 벌써 다 팔리고 하나도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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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많이 있는데요.”

가게 앞에 잔뜩 쌓여 있는 양파와 감자 박스를 가리키며 말하자 주인은 딱 잡아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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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벌써 팔린 거예요. 이따가 중국집에서 한꺼번에 가져가기로 했어요.”

눈에 뻔히 보이는 핑계에 기가 막혔지만 주인이 안 팔겠다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가게를 나온 수연은 또 다른 가게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생각했는데 세 번째로 들른 가게에서 드디어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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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딴 데 가 봐요. 내가 굶어 죽고 말지 댁한테는 안 팔아.”

수연이 저만치서 오는 걸 보고, 주인아줌마는 아예 입구에서부터 딱 버티고 나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이쯤 되자 수연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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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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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몰라서 물어?”

아줌마가 흰자 가득한 눈으로 수연을 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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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돼. 좋은 사람 찾아서 시집갈 생각을 해야지, 멀쩡히 처자식이 있는 남자한테, 쯧쯧.”

그제야 수연은 깨달았다. 가게로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던 여자 때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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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전 그분 얼굴도 본 적…….”

아줌마는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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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고, 길게 말 섞기 싫으니까 빨리 나가. 확 소금 뿌려버리기 전에.”

결국 수연은 그대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래서야 시장 안의 다른 가게들도 다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역시나 시장 골목을 지나는 수연의 귀에, 여기저기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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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집 민우네 엄마가 말하던 게 저 여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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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민우 아빠가 아주 혼이 쑥 나가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꽃을 사다 바쳤다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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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도 벌써 제 엄마보다 저 여잘 더 따른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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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홀리게는 생겼네. 젊은 여자가 왜 하필 유부남을,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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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남의 얘기 아냐. 혹시 모르니까 각자 남편 단속들 잘해.”

수연은 목에서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대체 내가 뭘 어쨌다는 걸까.

여태 가정부 일이나 식당 설거지, 건물 청소 따위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살다 보니 억울한 일이라면 수도 없이 겪었다.

치근덕거리는 남자는 어딜 가나 있었고, 더러운 누명을 뒤집어쓰고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적도 있다.

그래도 이렇게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까지 당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어쨌든 이 시장에서는 앞으로 더 이상 물건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훨씬 멀고 더 비싸지만, 결국은 마트로 갈 수밖에 없었다.

빈 카트를 끌고 터덜터덜 마트로 향하며, 수연은 가게로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던 여자가 태하의 한 마디에 찍 소리도 못 하고 쫓겨나던 것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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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댁의 부군이시라니 꼭 좀 전해주시죠. 두 번 다시 저희 어머니께 허튼수작 부렸다간, 손목을 꺾어 놓겠다고요.]

마치 레온의 그것처럼 넓디넓은 태하의 등이, 얼마나 든든해 보였는지 모른다.

나한테도 남편이 있었다면, 하다못해 아들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서러운 마음에 그리움이 한층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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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그 애라도 나한테 남겨주면 안 됐던 거예요?’

남의 속도 모르고 쨍하니 파랗기만 하늘을 바라보며, 수연은 무정한 남자를 조금 원망해보았다.

*

퇴근 후 시현은 태하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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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아!”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온이 웃으며 팔을 벌렸다. 어제 그렇게 엉망으로 취해 있었던 게 거짓말처럼, 말끔하고 수려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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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시현은 달려가서 와락 안겼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운 나머지 눈시울이 다 뜨거워졌다.

시현의 등을 반갑게 토닥여 주고 나서 레온은 아들을 향해서도 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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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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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다가서는 태하를, 레온이 꽉 끌어안았다.

시현은 흐뭇한 눈으로 부자를 바라보았다. 당당한 체격과 훤칠한 키가, 누가 봐도 한눈에 혈연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꼭 빼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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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

레온은 두 사람을 호텔 안에 있는 한식당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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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그가 호텔의 새 주인이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는 듯, 입구에서부터 전 직원이 미리 나와 있다가 인사하며 맞이했다.

남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좋은 자리에 안내를 받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먹은 레온이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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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한식이 최고야. 속이 다 풀리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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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도 한식당은 많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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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국에서 먹는 것만 못하지.”

젓가락을 완벽하게 사용해서 식사하는 아버지를 향해 태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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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언제까지 계실 예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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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돌아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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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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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국에서 살려고, 죽을 때까지. 그러려고 호텔도 인수했잖니?”

웃으며 말하니 꼭 농담 같지만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시현은 놀랐지만, 태하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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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거처는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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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호텔에서 머물면서 적당한 집을 찾아볼까 해.”

레온이 문득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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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레온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태하가 불쑥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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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하고 같이 지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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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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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내 곁에 있고 싶어서 한국까지 오신 거잖아. 호텔방에 혼자서 외롭게 지내시게 두고 싶지 않아.”

시현은 어젯밤에 술에 취해 있던 레온을 떠올렸다. 무슨 사정인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는 무척이나 지치고 외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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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집을 구하실 때까지만이라도, 곁에 있어드리고 싶어.”

시현은 대번에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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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했어!”

옛날부터 데면데면했던 부자 사이가 늘 안타까웠던 터였다. 무뚝뚝하기만 한 아들을, 레온이 얼마나 애타게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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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태하, 다 컸네. 아버지 생각도 다 할 줄 알고.”

시현이 칭찬하듯 등을 쓰다듬어 주자 태하는 뒤늦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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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곁에 없어도 괜찮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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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시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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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네가 나 때문에 괜히 좁아터진 원룸에서 지내는 게 계속 신경 쓰였어. 걱정 말고 아버지 곁에 있어 드려,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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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밤중에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진다든가 하면 지금처럼 바로 만날 수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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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 보고 싶은 거 아니고?”

놀리듯 말했지만 태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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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늘 보고 싶지. 같이 있어도 당신이 보고 싶어, 난.”

가슴이 따뜻해졌다. 자기가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는 사람. 내 앞에서는 자존심 따위 세우려 하지 않는 사람.

왜 나는 너를, 이제야 알아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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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밤중이든 언제든 보러 오면 되지 뭐. 집에서 호텔까지 차로 삼십 분이면 되는데. 아저씨는 너하고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계셨잖아. 그동안 네가 얼마나 보고 싶으셨겠어?”

시현은 태하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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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 걱정 말고 지금은 아저씨 곁에 있어 드려, 응?”

문득 태하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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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그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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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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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반했는데, 이 이상 더 반하게 만들면 어쩌라는 거야.”

태하가 시현의 이마에 살며시 입 맞추는 순간, 레온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얼른 떨어져서 시치미를 뚝 뗐다.

도로 자리에 앉는 레온에게, 태하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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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시면 제가 호텔에서 아버지하고 같이 지내고 싶습니다.”

레온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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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쓸 필요 없어. 너한테 부담 주려고 온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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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제가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태하는 차분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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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제가 사정이 있어서 살던 집을 처분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새집을 구할 때까지, 당분간만 아버지 묵으시는 방에서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러나 레온은 극구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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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라면 방을 따로 내줄 테니 얼마든지 편한 대로 쓰면 돼. 나하고 같이 지내면 네가 불편하잖니?”

지켜보는 시현은 가슴이 뭉클했다. 태하 곁에 있고 싶어서 한국으로 이주까지 결심할 정도인데, 얼마나 같이 지내고 싶을까. 그런데도 혹시나 아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아무래도 돌려 말하면 안 되겠다 싶었던 걸까. 시현에게 늘 직진이었던 남자는, 아버지에게도 같은 방식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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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버지와 친해지고 싶습니다.”

잠시 제 귀를 의심하듯 태하를 바라보던 레온의 얼굴에, 서서히 기쁜 빛이 떠올랐다. 태하와 닮은 그 얼굴이 무척 아름답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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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우리 아들하고 같이 살아보는구나!”

그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기껏해야 태하의 큰형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지만, 표정만은 영락없는 아버지의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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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 짐 정리해서 내일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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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필요하면 호텔 직원들을 보낼 테니 얘기하렴.”

얼마나 들떴는지, 레온은 청포묵을 집으려다 몇 번이나 젓가락질에 실패했다. 그런 아버지의 접시에, 태하는 말없이 대신 묵을 집어서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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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현아.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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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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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름다운 아가씨하고 단둘이 데이트하고 싶어서.”

시현은 슬쩍 눈치를 보았다. 혹시 질투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는데, 다행히 태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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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 괜찮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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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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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질투할 줄 알았는데?”

레온이 짐짓 김이 샜다는 표정을 하자 태하가 보란 듯이 시현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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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 씨가 저를 많이 좋아하거든요.”

시현은 얼굴이 빨개져서 테이블 밑으로 태하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러나 워낙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허벅지라 결과적으로는 애꿎은 양복 천만 꼬집었을 뿐이었다.

하여튼 얄미워 죽겠다니까! 흘겨보자 태하가 대신에 제 손등을 내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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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꼬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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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거든?”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레온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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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을 먹고 돌아온 시현은 혼자서 카레 집으로 향했다. 그저께 웬 아줌마가 와서 행패를 부린 일 때문에, 수연이 잘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다행히 별일 없었는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던 수연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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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태하는 왜 같이 안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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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 지금 바빠요, 짐 싸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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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디 여행이라도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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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미국에서 오셨거든요. 당분간 아버지랑 같이 지내고 싶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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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래? 그분은 언제까지 계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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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한국에 살러 오신 거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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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잘됐네! 그분도 그동안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

수연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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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레온 아저씨 좋아하시는 거 보니까 제가 다 눈물이 나지 뭐예요.”

순간 수연이 흠칫하며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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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시현은 영문도 모르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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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랑 같이 살게 돼서, 레온 아저씨가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수연은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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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요, 이모?”

그제야 수연은 꿈에서 깬 사람처럼 흠칫 고개를 들더니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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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태하는 원래 성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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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윤 씨잖아요. 윤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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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고. 그러니까, 음, 아버지 성은 뭔가 싶어서.”

아, 하고 시현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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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미국 대통령하고 성이 같아요. 뭐게요?”

수연의 얼굴이 하얘지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시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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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예요. 레온 프랜시스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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